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Issue 211, Apr 2024

크리스티안 브랜들
Christian Brandl

지난날의 한바탕 꿈이련가

● 정일주 편집장 ● 이미지 작가, Galerie Kleindienst 제공

'Die Schwimmerin' 2023 Oil on Canvas 110×150cm Courtesy the artist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1955년 서울. 빈민촌에서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주던 미영은 작은 사고로 가난한 청년 명수와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그 후 우연히 다시 미영과 마주치게 된 명수는 그녀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 딸이었음을 알고 사표를 제출한다. 그러나 며칠 후, 가면무도회에서의 재회를 계기로 다시 회사에 출근하게 된 명수는 미영과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고, 옥신각신하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미영의 부모는 그녀를 은행장의 아들 준호와 결혼시킬 계획이지만, 미영은 집을 뛰쳐나와 명수를 찾아간다. 그리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곧 행복한 둘만의 생활을 꾸려나간다. 미영은 집안에서 재봉 일을 하고 명수는 직장에 다니며 고등고시를 준비하는 평온한 생활 속에 두 사람은 첫딸 영옥을 얻는다.*



<Regatta> 
2024 Oil on Canvas 110×100cm 
Courtesy the artist and Rodler Gschwenter Gallery



1964년 개봉한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엔 세기의 커플 엄앵란과 신성일이 등장한다. 파격적 스토리, 감각적 화면 연출도 화제를 모았지만 무엇보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남녀 주인공의 견인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는 20세기 한국 예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꼭 그 세대가 아니더라도 예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주인공들의 아련한 투샷은 물론 극중 미영으로 분한 엄앵란의 세련된 패션은 지극히 익숙한 콘텐츠다. 부잣집 딸인 미영은 회사에서 사무를 볼 때조차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 혹은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을 연상시키는 원피스에 진주목걸이를 볼드하게 매치하고 커다랗게 부풀린 헤어스타일을 유지한다.

아름다운 남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이내 비극으로 치닫는다. 사랑하는 연인은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이고 그 사이를 침입한 갈등과 오해가 여주인공 목숨을 앗아간다. 딸의 죽음에 분노한 미영의 부모는 명수에게서 아이를 빼앗아가고, 자신의 어리석은 오해와 미영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딸을 되찾겠다는 희망 하나로 노력한 명수는 결국 고등고시에 합격한다. 외교관이 된 명수가 첫 발령지인 미국으로 떠나며 딸과 함께 비행기에 오르는 게 영화의 결말이다.



<An der Tür>
 2018 Oil on Canvas 135x135cm 
Courtesy the artist



등장인물의 무심한 표정과 정적인 풍경으로 마치 불투명한 형태로 납작해진 1960년대 심리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크리스티안 브랜들의 그림을 보고,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두 명작을 연결한 첫 번째 이유는 영화와 그림 속 주인공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쏙 빼닮았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브랜들의 그림이 구체적 스토리를 드러내지 않고도 어쩐지 비극적 결말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다. 호텔 리셉션, 배, 정원, 거실, 온실 등 식별할 수 있는 공공 및 사적 공간에, 작가는 혼자이거나 둘 정도의 인물을 배치한다.

어쩌다 세 사람이 놓인 그림도 있지만 매우 드물며 지극히 제한적 인물의 등장은 전반적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그림 속 남자 혹은 여자는, 아름답지만 복잡한 기분과 감성을 드러내는데 개방성과 폐쇄성 사이를 오가며 공포에서 폭력, 자기도취에서 애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 감정의 스펙트럼을 포괄한다. 일상과 동떨어진 느낌, 절대 익숙하지 않은 세상 같은 브랜들의 연출은 그림 속 인물의 생동감을 사실상 얼어붙게 만든다.



<Bahn II> 
2021 Oil on Canvas 110×100cm 
Courtesy the artist and Rodler Gschwenter Gallery



블론드헤어와 고급스러운 외모, 요트와 승마를 즐기며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것 같은 이들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심플하면서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액세서리와 우아해 보이는 중성적 컬러의 옷, 실크와 캐시미어 같은 고급 소재, 내추럴한 헤어스타일과 가벼운 메이크업은 최근 지대한 관심을 모으는 ‘올드머니룩’의 정수 그 자체다. 말 그대로 오래된 돈을 뜻하며 유산, 상속받은 돈을 가진 금수저, 부잣집 손녀딸처럼 고귀한 가문 출신의 사람들이 가지는 전통적이고 고급스러운 패션 스타일인 ‘올드머니룩’이 브랜들에 의해 완벽히 창조되는 것이다.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부는 코인이나 주식으로 생겨난 재벌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관점에서 올드머니의 삶을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만들어진 이 스타일을, 작가는 진즉부터 리드하고 있었다. 작가가 온 신경을 기울여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차려 입혔지만 주인공들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Reiseführer> 
2023 100×110cm Courtesy the artist



2023년작 <Reiseführer>를 보자. 깎아 지르는 절벽의 해안가에 남녀가 서 있다. 시선을 맞대지 않은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서 있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했다. 클래식 정장을 갖춘 남자는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화면 밖을 응시하고, 밍크 퍼 디테일의 투피스에 같은 재질 모자를 매치하고는 광택이 도는 장갑까지 낀 여자는 남자와 45° 어긋난 각도의 뷰를 내려 보고 있다. 여자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안내 책자 같기도 보딩 패스 같기도 하다. 제목 말고 어떤 힌트도 없는 작품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되는 걸까. 미학적으로 뛰어난 부르주아적 존재들은 겉보기에 안정감 있는 자아를 관람객에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매끈하게 이상화된 표면 아래에선 보이지 않는 어둠이 느껴진다.



<Unterwegs> 
2022 Oil on Canvas 110×160cm 
Courtesy the artist



<Unterwegs>(2022)도 마찬가지다. 심플하고 우아한 여성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됐다. 푸른 회색과 더 짙은 푸른 회색의 배경은 얼핏 바다 같기도 밀폐된 사무실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선 또한 용도를 명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시간도 상황도 전혀 알 수 없는 곳에서 과연 무엇을 위해 주인공은 서 있나. 언젠가 작가 스스로 그림 속 주인공은 자신의 뿌리를 극복한 문화적 대표자라고 말한 내용을 근거로 삼고서야 비로소 사회적이되 너그럽진 않은 유형이 짐작될 뿐이다. 그런 까닭일까. 브랜들 전시에 관한 한 리뷰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속지 말아라. 아름다운 겉모습 뒤에는 현재의 차갑고 뜨거운 유혹이 끓어오르고 있다.”

그렇다. 브랜들이 완성한 인물들은 어떤 표정도 지니지 않는다. 그의 작품엔 ‘정지 이미지 미학’을 추구한다는 해석이 빈번하게 붙지만 멈춘 순간을 포착했더라도 표정은 있을 수 있는 노릇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에 시간을 정지시킨다. 그리하여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사랑도 증오도 애틋함과 바람까지 철저하게 제거한다.  



Exhibition view of <Christian Brandl_Fortsetzung>
 2023 Galerie Kleindienst, Leipzig/Germany Courtesy 
Galerie Kleindienst, Leipzig/Germany
 Photo: Uwe Walter, Berlin, Germany



최근 독일 엥겐에서 브랜들은 개인전 <Continuation>을 개최했다. 전시에 내걸린 작품들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상상하고, 더 깊이 생각하며, 개별 장면의 숨겨진 줄거리를 상상토록 장려하며 어김없이 세련된 차분함을 발산했다. 그러나 전시에 대한 리뷰엔 “그러나 인상은 기만적이다”는 표현이 서슴없이 달렸다. 그림 속 인물들의 자세와 시선이 마치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상황을 담은 스냅샷 같지만, 마치 시대를 초월한 듯한 브랜들의 인물들. 1960년대의 패션 잡지나 영화에 등장했을법한 이들은 견고한 외관 뒤에 열려 있는 동작을 지님으로써 마치 얼어붙고 개성이 없는 듯한 부르주아 사회의 심연을 은유한다.



Exhibition view of <ChristianBrandl_Fortsetzung>
 2023 Galerie Kleindienst, Leipzig/Germany
Courtesy Galerie Kleindienst, Leipzig/Germany
Photo: Uwe Walter, Berlin, Germany



아름다운 남녀야말로 구상회화의 영원한 페르소나다. 그들 사이의 아슬아슬하며 끈적끈적한 감정 또한 예술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작가들이 인물을 포착해 화폭에 담지만, 브랜들의 작품만큼 보는 이가 캔버스 속 주인공이 처한 ‘내부’와 ‘외부’ 세계를 살피며 알 수 없는 결과와 함께 폭발적 사건을 상상하게 만드는 회화는 없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를, 나와 아무 상관없는 과거의 한 장면에 이토록 동화되는 이유다. PA


[각주]
*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1964) 네이버 설명 중 발췌




Portrait of Christian Brandl Courtesy the artist 
Photo: Luna Kauschke



작가 크리스티안 브랜들(Cristian Brandl)은 1970년 독일 에르푸르트 태생으로 라이프치히 그래픽 및 북아트 대학에서 회화와 그래픽을 공부했다. 1999년 라이프치히에서 첫 개인전 <이집트에서의 일주일, 아무것도 아닌 쇼핑>을 선보인 이후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비엔나 등에서 20여 차례에 달하는 전시를 개최했다. 지난해 비엔나 Albertina modern에 마련된 <오스트리아-독일. 회화 1970-2020>전을 비롯해 2018년 그리스 아테네 Frissiras Museum의 <New Horizons in Painting III> 등 기획전에 작품을 내건 그는 현대 구상회화의 중요한 대표 작가이며 ‘신 라이프치히 학파’의 주요 인물로 꼽힌다. 라이프치히에 거주하며 뚜렷한 소신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정일주 편집장

Tags

More Articles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