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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96, Jan 2023

안리 살라
Anri Sala

음악은 현실이 사라진 후에도 존재한다

● 이가진 미술 저널리스트 ● 이미지 작가, Hauser & Wirth, Pinault Collection 제공

Installation view of 'Time No Longer' 2021 Bourse de Commerce - Pinault Collection Photo: Andrea Rosse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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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멀리까지 미치며, 단번에 전 공간을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음악은 느릿느릿 리듬을 통해서 공간을 차지하고, 언제나 다시 같은 멜로디로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음악의 소리는 마치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고, 도처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정된 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것, 즉 공간적인 멂과 가까움, 무한과 유한이 음악을 통해서 부드럽게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 영혼에게는 하나의 은총이자 위안이다.”*

1986년 1월 28일, 7명의 승무원을 태운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발사 73초 후 공중에서 폭발해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빚었다. 폭발 장면이 TV로 고스란히 생중계되어 충격의 여파는 더욱 컸다.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로널드 맥네어(Ronald McNair)는 우주로 향한 두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우주비행사이자 프로 색소폰 연주자였다. 챌린저호에 오른 맥네어에겐 프랑스 출신의 일렉트로닉 뮤지션 장 미셸 자르(Jean-Michel Jarre)와 공동 작업한 곡 <Rendez-vous 4>의 색소폰 파트를 우주에서 직접 연주하고 녹음해 나사(NASA) 창립 25주년 축하 공연에서 초연한다는 미션도 주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초로 우주에서 녹음될 수 있었던 음악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오직 ‘의도’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Three Graces> 2020 Three altered snare drums,
 loudspeaker parts, snare stands, drumsticks 
Dimensions variable Each drum: 75×56×41cm 
Edition of 1 + AP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Anri Sala



알바니아 출신 예술가 안리 살라(Anri Sala)는 실현되지 못한 그 의도에 주목했다. 살라가 2021년 선보인 작품 <Time No Longer>는 무중력 상태의 우주 정거장에서 유영하는 턴테이블 위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장의 레코드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간헐적인 멈춤 상태의 침묵, 불규칙한 진동까지 전해진다. 작품에서 들을 수 있는 곡은 사고 이후 장 미셸 자르가 맥네어를 기리며 완성한 <Last Rendez-vous>가 아닌,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이 작곡한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Quartet for the End of Time)>다. 이 실내악의 초연은 음악사의 전설적인 한 장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였던 메시앙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독일군 포로로 잡혀 스탈라그 VIII-A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피아노 연주를 맡은 메시앙과 더불어 동료 수감자였던 클라리네티스트 앙리 아코카(Henri Akoka), 첼리스트 에티엔 파스키에(Étienne Pasquier), 바이올리니스트 장 르 불레흐(Jean Le Boulaire)는 1941년 1월 15일, 모든 것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밤, 수용소 한쪽에 모인 수백 명의 포로들과 몇몇 간수 앞에서 낡은 악기로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처음으로 연주했다.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영감을 받은 이 곡에서 메시앙은 심판이 임박한 종말에 대한 예언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이 없으리라(There shall be time no longer)’는 메시지를 전쟁에 대한 비관이나 캠프에 갇힌 상황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즉,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대로 승화시켰다. 당장의 절망보다는 영원과 불멸의 희망을 기도하는 곡인 셈이다.



<Time No Longer> 2021 
4 channel HD computer-generated imagery
 and five-channel sound, colour, translucent screen,
 pulse-generating speakers, dynamic lights 13min
Courtesy the artist, Hauser & Wirth, Marian 
Goodman Gallery, Buffalo Bayou Partnership 
and Weingarten Art Group © Anri Sala
 Photo: Elizabeth Lawrence Knox



살라는 8악장 중 세 번째 장 ‘새들의 심연(Abîme des Oiseaux)’을 원곡의 클라리넷에 맥네어가 연주하고자 했던 색소폰을 더해 새롭게 편곡했다. 1940년대나 1980년대가 아닌 2020년대에 속하는 동시대 버전의 음악에서 클라리넷과 색소폰은 ‘듀엣’을 이루는 대신 작가의 설명처럼 “서로의 유령 또는 그림자”로서 서로가 들리지 않는 듯한 대화를 나눈다. 함께 있지만 그 간극은 까마득하다. 3D로 국제우주정거장(International Space Station, ISS)을 재현하고,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완성한 영상 속 턴테이블은 지상의 중력에서 해방된 상태로 영원히 춤추고, 그 모습을 응시하는 우리는 마치 최면에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 의도, 공간, 외로움, 비극이 한자리에서 조우하며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성을 증언한다.”

살라는 사운드와 음악을 주요하게 활용해 이미지와 건축, 역사, 시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사운드 인스톨레이션(Sound Installation)’이라 불리는 그의 작업은 소리를 매개로 인식의 지평을 넓히며 일종의 ‘사운드 스케이프(Soundscape)’를 영리하게 구현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작품이 놓이는 공간의 조건과 특성을 치밀하게 계산해 종종 대단한 스케일을 보여준다. 일례로 <Time No Longer>는 지난해 여름과 가을 내내 이탈리아 베르가모 현대미술관(Galleria d’Arte Moderna e Contemporanea di Bergamo, 이하 GAMeC)에서, 이어 부르스 드 코멕스(Bourse de Commerce)에서의 전시 <Une seconde d’éternité>에 포함돼 이달 16일까지 여러 관람객과 만난다.



Exhibition view of <Anri Sala. Le Temps coudé>
 11 Oct 2019 - 5 Jan 2020 Mudam Luxembourg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Rémi Villaggi | Mudam Luxembourg



GAMeC에서는 18세기의 역사적 건물 내부를 새롭게 개조한 전시장에 16m 너비의 스크린을 지층에서 살짝 띄워 설치했다. 조도를 낮춘 어둠은 빛과 중력이 없는 우주 공간을 연상시키고,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섬광이 음악의 리듬과 박자를 맞춘다. 부르스 드 코멕스 전시에서는 로툰다(rotunda)의 벽면을 따라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24m 너비 스크린을 설치해 몰입감을 한층 높였다. “나는 세계의 영향 아래에 소리와 음악을 통해 아이디어와 공간을 같은 파장 위에 배치하고 함께 진동하도록 하는 것을 좋아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방식으로 건축을 연주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전시장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Exhibition view of <Anri Sala. Le Temps coudé> 
11 Oct 2019 - 5 Jan 2020 Mudam Luxembourg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Rémi Villaggi | Mudam Luxembourg



이처럼 “소리가 현실에 스며드는 방식”에 깊이 매료된 살라는 꾸준히 음악을 미술로 번안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서도 여러 번 소개된 <붉은색 없는 1395일(1395 Days without Red)>(2011) 속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Chaikovsky)의 교향곡 <비창(Pathétique)>이나 ‘제55회 베니스 비엔날레(55th Venice Biennale)’에서 프랑스 국가관을 대표했던 <Ravel Ravel Unravel>(2013)의 중심에 있는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Concerto pour la main gauche)> 등이 대표적이다. 두 작품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는 특정한 시대의 영향을 담은 음악이 이후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 새로운 현실에 파고들거나 변화하는 양상을 시각화한다. 원곡의 구성과 흐름도 재맥락화한다.



Exhibition view of <Anri Sala. Le Temps coudé> 
11 Oct 2019 - 5 Jan 2020 Mudam Luxembourg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Rémi Villaggi | Mudam Luxembourg



살라는 이미지 뒤에 이야기나 메시지를 심는 대신 음악과 소리를 따라가게 한다. 호흡, 몸짓, 분위기를 이루는 박자, 사이사이의 침묵과 휴지(休止)에 집중하게 한다. 특정한 시점을 핀으로 고정하지 않고, 시간의 통로를 벌려 음악으로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을 잇는다. 간격을 유지한 채 다른 이들의 삶을 추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 분명 역사, 정치 등 겹겹의 맥락이 얽혀 있음에도 현학적으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음악이 마치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우리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써 무언가를 보게 만든다. 그는 언어를 믿지 않는다. 문학적 이야기 혹은 특정 내러티브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 또한 경계한다. 공산 정권 집권 시기에 고향 티라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는 동안 언어 또한 시스템을 위해 복무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알바니아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등 자신이 머물렀던 모든 나라의 말을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Untitled (Congrus authoris/California)> 2019 
<Installationsansicht Erdgeschoss Kunsthaus Bregenz> 
2021 Courtesy the artist, Hauser & Wirth and Esther Schipper,
 Berlin © Anri Sala Photo: Markus Tretter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주재료를 쓰지만, 살라를 주저 없이 미술가로 호명하는 까닭은 그가 선택한 음악이 감각을 깨워 결국 총체적으로 시공간을 조망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압도적인 몰입은 때로 짧은 실신과 비슷한 경험을 유발한다. 과거의 맥락에서 떼어낸 새로운 음악 덕분에 ‘지금, 이곳’의 찰나를 자각할 때, 순간과 영원이 동의어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어떤 음악은 우리가 현실이라 여기는 것이 사라진 후에도 존재하며, 모든 장소에 존재 가능하다. 그저 존재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한다.PA



Portrait of Anri Sala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Jutta Benzenberg



작가 안리 살라(Anri Sala)는 1974년 알바니아 티라나에서 태어났다. 티라나 국립예술대학교(National Academy of Arts, Tirana)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에서 비디오를, 프레노아 국립현대예술스튜디오(Le Fresnoy, Studio National des Arts Contemporains)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전 세계 유수 기관에서 수많은 전시를 개최했고,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에서 ‘청년작가상(Young Artist Prize)’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MoMA), 파리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독일 뮌헨 피나코텍 현대미술관(Pinakothek der Moderne) 등에 소장돼있다. 살라는 현재 베를린에 머물며 작업하고 있다.


[각주]
* Max Picard, Die Welt des Schweigens: 최승자 옮김, 『침묵의 세계』, 까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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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진 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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