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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10, Mar 2024

김덕희
Kim Doki

빚다, 빌다, 빚지다

● 김대성 문학평론가 ● 이미지 작가 제공

'밤 속에 녹아있는 태양' 2023 파라핀 왁스, 염료, 캔들심지 가변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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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덕희의 개인전 <목소리를 삼키고 달을 만나다>(2022)가 열린 전시장은 낡고 오래된 다세대 주택을 개조한 곳이었는데, 산복도로 기슭에 자리한 탓에 도착하기까지 꽤나 험난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곳에 들어섰을 때 어쩐지 ‘끝자락’에 도착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왼쪽 방 천장엔 태아로 보이는 상(像)이 맺혀 있었고, 오른쪽 방 천장엔 양 날개를 활짝 편 새가 맺혀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 발붙일 수 없는 존재를 기리기 위한 재단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여겨져 낮고 좁은 전시 공간이 마치 관(棺) 안을 잠시 밝혀둔 것 같았다.*

오른쪽 방 안으로 연결된 옛날식 부엌으로 내려가니 센서가 작동해 모래처럼 보이는 가루 한 줌이 발밑으로 떨어졌다(<우리의 차가운 시간>(2022)). 누군가의 발길이 그곳에 닿아야 가루가 떨어져 발밑에 쌓인다. 발밑에 작은 둔덕을 이룬 이 더미를 여러 사람들이 발걸음으로 만든 무덤이라 부를 수 있다면, 전시장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시작되는 애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밤 속에 녹아있는 태양> 2023 
파라핀 왁스, 염료, 캔들심지 가변 크기



발밑에 쌓인 둔덕을 바라보며 태엽을 감아야 흐르는 시계를 떠올렸다. 태엽만 감는다면 영원히 멈추지 않는 시계. 애도 행위가 떠난 이를 슬픔으로 배웅하는 일만이 아니라 저마다의 발걸음으로 무언가를 쌓아가는 일이거나 태엽을 감아 시간을 계속 흐르게 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거실로 짐작되는 곳에 천장부터 바닥까지 여러 갈래로 늘어놓은 진주 목걸이 모양을 한 설치 작업의 작품명은 <목소리를 삼키고 달을 만나다>(2022)였다. 이 작업은 2023년 ‘바다미술제’에서 <메아리, 바다 가득히>(2023)라는 작품으로 확장된다. 폭이 8m, 높이가 4m에 이르는 커다란 그물 형태를 띤 이 설치 작품은 사전에 시민들로부터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한 사연을 수집해 이를 진주 배열을 통해 모스 부호로 형상화한 것이다. ‘전하지 못한 말’은 아쉬움이라는 감정과 맞닿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처와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메아리, 바다가득히> 2023
인공진주, 비즈, 스텐와이어 
400×800×800cm



미워했거나 미숙했거나 무지했기에 말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하지 못한 말은 대개 감춰버리거나 말끔히 지워버리려고만 한다. 말을 이성과 로고스(logos) 그리고 눈앞에 있는(현전) 존재와 묶는다면 명료하고 뚜렷한 메시지가 되지만 김덕희는 여러 사람들의 ‘전하지 못한 말’을 엮어 희미하지만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메아리’로 전환한다. 그렇게 그물은 무언가를 낚아채기 위한 도구에서 무언가가 맺히는 장소로, 더 멀리까지 나아가려는 염원을 품은 매체로 전환된다.

그간 열역학이나 양자역학을 비롯해 물리학 용어를 매개로 김덕희 작품을 이야기해온 것과 달리 한 사람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되지만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닌 ‘메아리’를 중심에 놓아두고 이야기를 이어가보고 싶다. 메아리는 뚜렷한 메시지 전달보단 이어짐(지속)으로 나아가는 운동성을 가리킨다. 나는 김덕희 작업 안의 물리학을 가시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만이 아니라 연약하기에 언제라도 사라져버릴 수 있는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밤 속에 녹아있는 태양> 2023
파라핀 왁스, 염료, 캔들심지 가변 크기



작품의 주요 테마가 죽음과 이어져 있는 건 김덕희가 바라보는 세상 속의 생명이 너무나 취약하다는 걸 가리키고 있기 때문 아닐까. 물리학이라는 건조한 법칙과 딱딱한 원리 속엔 쉽게 휘발되고, 기록되지 않으며, 취약한 존재에 형체를 부여하려는 마음과 의지가 포개져 있다. 인간중심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태도가 뚜렷한 것과 무관하게 김덕희의 작품 속엔 익명의 존재들이, 미미한 감정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염원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연과 이야기 또한 깃들어 있다. 그래서 단호하고 무표정해 보이는 작품이 한편으론 연약하고 취약한 존재에 기대어서 지탱하고 있다고 느낀다.

메시지가 도착(종결)을 목표로 하는 것과 달리 메아리는 허공에 울려 퍼짐으로써 끝을 유예한다. 때론 희미하고 연약한 것이 끝이라는 단절된 시공간을 여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부산시립미술관에 전시됐던 <밤으로 덮다>(2023)는 여러 층(겹)을 이룬 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관은 ‘끝’을 가리키는 공간이다. 시신이 들어 있다면 살아 있는 이들과 단절된다는 뜻이며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면 한 존재의 끝을 예비하는 공간이 된다.



<밤으로 덮다>
 2023 관, 파라핀 왁스, 염료 
300×195×51cm Courtesy of Busan Museum of Art 
사진: 송성진



그런데 관이 무언가가 흘러내린 흔적으로 뒤덮여 있다. 이 흘러내림에 주목하고 싶다. 관 전체를 뒤덮은 파라핀은 처절하고 절망적인 죽음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흘러내린 시간을 머금은 파라핀 질감은 관 속에 차가운 시신이 아니라 뜨거운 존재가 있었음을 말하는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흘러내린 파라핀은 관이라는 죽음의 시공간이 ‘끝’이라는 예정된 도착지로만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또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가리킨다.

<밤으로 덮다>와 마주보고 있던 작품은 작가가 직접 지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손을 석고로 본뜬 작업물 <하얀 그림자>(2023)였다. 얼핏 데스 마스크(death mask)를 떠올리게 하지만 무릎을 꿇어 바닥에 놓인 석고상을 만져보면 작품 안에 설치된 전열기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한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온 손이라는 익명의 형상, 그곳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에서 김덕희가 ‘빚다’(작품을 만드는 일)를 대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하얀 그림자>
 2023 석고, 히터 가변 크기
Courtesy of Busan Museum of Art 사진: 송성진



김덕희에게 ‘빚다’는 ‘빌다’나 ‘바라다’와 맞닿아 있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빚는다. ‘빚는 행위’가 ‘비는 것’과 이어져 있기에 김덕희 작품에서 죽음은 벼랑 같은 끝이 아닌 발밑에 쌓이는 둔덕처럼 봉긋하고, 메아리처럼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 울려 퍼진다. 엄밀한 물리학 법칙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김덕희의 작업이 취약하고 연약한 것들에 기대어 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빚지다’나 ‘빛내다’ 또한 ‘빚다’와 맞물린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빚’은 갚아야 할 의무보다 ‘비비다’(가령, 비빌 언덕)나 ‘기대다’는 뜻이 앞서 있다. 기댈 수 있기에 사라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우열이나 위계 없는 ‘에너지 흐름’은 김덕희 작업의 중심이 되는 질료다. 이 질료가 나아가며 빚어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김덕희에게 ‘빚는다’는 건 ‘기댄다’는 것과 이어져 있고, 이 맞물림의 힘이 밝히는 장소가 있다고 말해두고자 한다. PA



<하얀 그림자> 
2023 석고, 히터 가변 크기 
Courtesy of Busan Museum of Art 사진: 송성진



김덕희 작가



작가 김덕희는 1980년생으로 일본 도쿄예술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주요 개인전으로 <목소리를 삼키고 달을 만나다>(영주맨션, 2022), <숨 쉬지 않는 것들의 밤>(비온후 책방, 갤러리 보다, 2022), <유령의 죽음>(홍티아트센터, 2021) 등이 있고 일광해수욕장에서 개최된 ‘2023바다미술제’를 비롯 <빛2023>(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2023),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3: 슬픈 나의 젊은 날>(부산시립미술관, 2023) 등 그룹전에 참여해 작품을 선보였다.


[각주]
* 나는 한참 후에야 <바르도(Bardo)>란 이름을 단 이 작품이 불교에서 환생을 기다리는 장소의 이름을 딴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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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대성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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