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Issue 208, Jan 2024

이신자
Lee ShinJa

뜨겁거나 아주 뜨거운

● 정송 피처 에디터 ● 이미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신자, 실로 그리다' 전시 전경 2023-202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동경 129°, 북위 36°와 37° 사이 경상북도 최동북단에 있는 울진. 북쪽은 갈령산을 경계로 강원도 삼척시와 접하고 동쪽은 동해와 맞닿는 그곳에서 1930년 작가 이신자는 태어났다. 1896년 칙령에 의해 강원도 울진군이었던 도시는 1963년 경상북도 관할로 편입됐는데, 그만큼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뜨는 해를 만나며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까, 이신자의 화폭에는 뜨겁게 솟아오르는 해와 철썩철썩 굽이치는 파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신자는 세로줄인 날실을 캔버스로 두고 가로줄인 씨실을 붓처럼 움직이는 태피스트리에 평생 천착해왔다. 씨실의 색상만으로 표면에 무늬를 만들어 내는 그의 작업 방식은 정열적 추상부터 뚜렷한 서사를 지닌 구상까지 다양한 작품으로 완성됐다. 작품 속에서 날실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며 씨실은 작가의 상상력에 따라 불연속적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섬유가 갖는 고유한 물적 특성을 유지하며 수공예의 노동집약적이고 지극히 섬세한 조련과 솜씨를 보여주는 이신자의 작품은 화려한 색은 물론이거니와 비물질 요소인 빛과 공기의 흐름까지 머금는다. 그리하여 매체의 한계적 영역을 넘어 환경의 장으로 확장해간다.




<이신자, 실로 그리다> 전시 전경
 2023-202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마냥 오밀조밀 손바느질 하는 이화여대 스타일이 싫었다”는 작가는 1950년대 중반부터 거칠지만 자유롭고 대담한 시도들을 했다. 그는 실을 짜고, 감고, 뽑고, 엮어 자연의 정서와 정경을 단순화해 작품으로 완성했다. 천을 덧대는 아플리케 기법으로 한국 섬유의 폭과 깊이를 확장한 <장생도>(1958), <도시의 이미지>(1961)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1961년 발표한, 쇠망에 염료를 묻혀 바탕을 찍고 그 위에 천을 붙이거나 화학섬유로 수를 놓은 <노이로제> 역시 그 시기의 작품인데, 네 명의 아이와 태양을 주제로 꿈을 펼쳐나간다는 긍정적 의미를 담았음에도 제작 당시 주변의 냉담한 반응 때문에 작품 제목은 ‘노이로제’라 지어졌다. 전통적 섬유 소재 대신 밀 포대, 방충망, 벽지, 종이 같은 소재를 활용하는 등 전통 공예 기법과 틀에서 벗어나 당시 “대한민국 자수는 이신자가 다 망쳤다”라는 혹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혹평조차도 그가 거칠고 투박함을 화폭에 끌어들여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파격을 구현했기 때문일까, 독자적이고 실험적 표현 기법의 이 작품은 ‘제1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로서 출품됐다.



<기구 I> 1985 모사, 펠트; 태피스트리 
318×10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72년 작가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통해 국내 최초로 태피스트리를 소개했다. 어릴 적 할머니의 베틀에서 익힌 직조 과정을 토대로 틀에 실을 묶어 짜는 방식의 태피스트리 작업 <숲>(1972)과 <원의 대화 I>(1970년대) 등을 완성한 것이다. 차분하게 엮인 전형적 태피스트리를 벗어나 작가는 올을 풀어 독특한 표면 질감을 유발하거나 이미 짜인 실을 밖으로 돌출시키는 부조적 표현으로 화폭 밖 공간적 의미를 서사로 엮어낸 확장성을 획득함으로써 또 다시 화제를 집중시켰다. 그는 면사와 마사, 모사를 섞어 쓰면서 실을 꼬아 말거나 면이 분리되게 엮어 잇기도 했다.


재질과 입체감을 부각하기 위해 씨실을 들어 올려 강조하기도 하는 등 그는 다양한 실험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중 <숲>의 경우 중앙을 가로지르는 나무 막대를 넣었는데 이는 기능적으로 처짐을 방지하는 동시에 마치 두 개의 화면으로 이뤄진 듯한 조형적 역할을 하는 등 기존의 형식과 내용의 한계에서 벗어난 새로움으로 관념적 전통적 자수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따뜻한 색감의 원과 사각 형태들로 완성된 작품은 작가의 심상을 거쳐온 유년과 장년의 수많은 나날을 담은 햇살 가득한 숲을 연상시킨다.



<노이로제> 1961 면에 모사, 합성사, 
화학염료; 납방염, 아플리케, 자유기법
 158×92.5cm 작가 소장



이 시기 작가는 고향 울진의 아름다운 일출과 석양을 타원형의 기하학적 모티브와 서정적 색감으로 표현했다. 순환 에너지를 상징하는 원의 표현은 당시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남편 고(故) 장운상 화백의 회복을 기원하며 생에 대한 바람을 담는 것이기도 했다. 대표작 <원의 대화 I>은 ‘섬유’라는 재료의 물성 속에서 감정의 단위를 다양하게 환원시켜 입체화하는 작가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비례의 미학이 숨어 있는 구조는 그의 작업을 건축적 구조로도 보이게 한다. 때로 촘촘하게 때로 성글게 구성된 작업은 실과 실 사이의 공간을 맘껏 드나드는 빛과 공기처럼 무엇이든 소통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이신자의 철학을 담고 있다.


작가 이신자의 영향일까, 1980년대 중반은 ‘한국 섬유미술의 개화기’라 불릴 만큼 독특한 섬유예술이 부흥했다. 유학파를 중심으로 다양한 재료를 차용하고, 작품 안에서 시각과 촉각이 뒤섞여 상호작용하는 시도들이 넘쳐나자 작가는 무대막과 의상디자인으로 작업 범위를 넓히는 한편 긴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태피스트리 작업에 더욱 매진했다.




<이신자, 실로 그리다> 전시 전경 
2023-202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태피스트리야말로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회화적 분위기와 서사적 의미를 가장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매개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추억을 더듬어 울진 앞바다에 반사된 일출과 석양의 강렬한 빛을 적색으로, 산과 나무의 형상을 노랑과 갈색 계열로 수성했다. 또한 <기구 I>(1985), <메아리>(1985) 같이 붉은색과 검은색의 대비로 1980년대 초 사별로 인한 상실과 절망, 생명에 대한 외경, 부활의 의지를 담아냈다.

그러던 중 작가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길이 19m에 달하는 <한강, 서울의 맥>(1990-1993)이 완성됐다. 팔당 산골짜기에서 행주, 서해에 이르는 한강의 물줄기를 다루면서 올림픽 주경기장, 63빌딩, 워커힐 등 서울의 모습을 요목조목 묘사한 작품은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작가는 서울의 모습을 구상적으로 다루되 사실적 묘사를 생략하고, 흑과 백이 결합된 회색 톤에 물체의 윤곽을 자연스럽게 번지듯 그리는 스푸마토(sfumato) 풍으로 빛을 은유하듯 이미지를 투영했다. 붓 대신 손으로 그린 태피스트리 수묵화 <한강, 서울의 맥>은 아주 세밀한 명암 표현으로 태피스트리 고유의 특성을 제대로 살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신자, 실로 그리다> 전시 전경 
2023-202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0년대 중반 그의 작품엔 금속 프레임이 등장한다. 이는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하나의 창 역할을 하는데, 3차원 세계를 구성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확장된 시각을 보여준다. 그 시기 제작된 ‘산의 정기’ 시리즈는 “어린 시절 울진 앞바다에서 본 바다 풍경과 아버지 손을 잡고 오르던 산의 정기엔 파도 소리, 빛, 추억, 사랑, 이별, 이 모든 것이 스며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평생을 지배해온 주제인 자연의 영원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실을 짜고 옷감을 지어 정성스럽게 만든 우리 옷에는 한국 여성들의 신성한 유전자가 녹아 있으며 이 유전자는 또 다시 작가에게로 이어져 수만 곡절의 의미가 담긴 확장된 예술로 재탄생했다. 엮이고 꼬아지고 표현됨으로써 또 다른 창조적 진화를 구현해내고 마침내 그가 가지고 있는 오늘의 시대정신과 만나 더 진하고 더 화려하고 더 아린 생의 굴곡과 서사를 갓 떠오른 태양처럼 토해내는 것이다.




<이신자, 실로 그리다> 전시 전경 
2023-202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이신자의 작업은 이러한 전통 한국 여성들의 삶을 뜨겁고 강렬하게 올올이 숨은 서사로 숨겨놓고 쌓고 흩트리고 부수어낸 조형언어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오로라를 직조한다. 그리하여 살아 꿈틀대는 생명 생성의 에너지가 뿜어내는 태고로부터의 시간들과 마주하고 소통하며 현재와 우주가 조형화 되는 언어 색채 그 이상의 것에 집중한다.

작가는 말한다. “내겐 스승이 없었다.” 다 짜인 작품에서 올을 뜯어 입체감을 만들 때도 펠트 천을 쪽쪽 찢어 높게 드리울 때도 그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스승이 없었기에 그는 미술의 진짜 역사가 되었다.PA



<이신자, 실로 그리다> 전시 전경 
2023-202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이신자 작가


작가 이신자는 1930년 울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와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 현대공예를 대표하는 1세대 섬유공예가이자 교육자로서 다양한 섬유 매체를 발굴하고 독자적 표현 기법의 작품으로 이정표를 세운 작가는 밀포대, 방충망, 벽지, 종이 같이 일상생활의 평범한 소재들로 작품을 완성했다. 재료가 지닌 풍부한 질감과 잠재력에 대한 이해, 그에 합당한 표현 기법과 새로운 조형 실험을 통해 섬유예술을 새로운 영역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얻는 그는 1965년 신문회관에 마련된 <제1회 이신자 작품전>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국립중앙공보관, 국립현대미술관, 호암갤러리(현: 호암미술관), 덕수궁 석조전 궁중유물전시관(현: 국립고궁박물관) 등 유수 기획전에 참여했다. 1997년까지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99년 ‘은관문화훈장’, 2011년 ‘대한민국미술인상 대상’을 받았다.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정일주 편집장

Tags

More Articles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