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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77, Jun 2021

신미경
Shin Meekyoung

조각적 질료의 흔적들

일제히 벽에 붙어 있는 여러 색의 질료들(matters)을 내보았을 때, 나는 이렇게 시작하는 서사의 첫 장면의 내막을 알기 위해 이것의 전편은 어떻게 끝났던가를 다시 기억해보려 했다. 신미경의 개인전 '앱스트랙트 매터스(Abstract Matters)'는 그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하지만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새로운 장면의 전개를 보여준다. 크기며 형태며 색채까지 다양한 비정형의 평면 작업들이 유독 각각의 표면을 과시하면서, 마치 일련의 질료로서 완결되어버린 듯한 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는 2018년 전시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고되었던 조각의 질료와 그것이 드러내는 조각의 표면을 새롭게 전개시킬 반전을 보여준다.
● 안소연 미술비평가 ● 이미지 작가 제공

'앱스트랙트 매터스' 전시 전경 2021 씨알콜렉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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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료의 흔적들


신미경은 주로 비누를 재료로 삼아 고전적인 인체 조각의 형상이나 유물 및 유적의 형태를 모방함으로써 그것의 (역사적·문화적·물리적) 존재 방식에 대한 질문과 개입을 통해 동시대의 작가로서 조각에 대한 참조적 갱신을 시도해왔다. 그가 ‘트랜스레이션 시리즈’, ‘풍화 프로젝트’, ‘고스트 시리즈’, ‘회화 시리즈’, ‘화장실 프로젝트’, ‘건축 프로젝트’,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등에서 줄곧 비누를 사용하여 조각이 환기시키는 시간과 장소의 문제를 재해석한 일련의 시도들이 매체적 관습에 담보 잡혀있던 ‘조각적’ 사유에 대한 재인식을 유도해온 셈이다. 이를테면, 비누를 사용한 모각(模刻)의 방법론으로는 조각의 원본성과 초월적이며 자율적인 권위에 대한 가치의 전환을 제시했으며, 건축이나 회화, 공예품 혹은 일련의 사물이 조각으로 환원될 수 있는 조건들을 살피면서 고대로부터 확립되어온 조각의 일반적인 범주를 재인식할 단서들을 제안하기도 했다.




‘화장실 프로젝트’의 조각상

<트랜스레이션-서사적아카이브>

전시 전경 201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조각의 재료로 비누를 선택한 그는, 숱한 소멸의 위협 속에서도 제 형상을 굳건히 지켜온 조각의 고전적 함의를 ‘전유’함으로써 비누라는 재료의 질료적 특성을 제 조각적 형상의 위계와 중첩/충돌시키곤 했다. 이는 ‘트랜스레이션 시리즈’를 비롯해 ‘풍화 프로젝트’, ‘화장실 프로젝트’, ‘고스트 시리즈’ 등 그의 작업 대부분에서 크게 드러나는 특징으로, 역사적 서사의 상징성이 강한 대표 유물의 형상을 한갓 전통적인 조각적 재료의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 비누를 사용해 불완전하게 재현함으로써 다시 그것을 조각적 형태로 재규정하려는 일련의 참조적 과정을 말한다. 특히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논의를 지속해 왔던 ‘번역’과 ‘모각’이라는 행위자/조각가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비누라는 재료가 스스로 형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혹은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조각의 질료로서 형태의 흔적을 표상하면서 사유의 실체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주목해볼 만하다.


예컨대 <화석화된 시간>(2006)과 <화장실 프로젝트>(2013), <풍화 프로젝트>(2018)의 경우 그것으로부터 기념비적 조각상이나 유물 및 유적 등으로 특정된 형상의 상징성을 떼어내면 남는 것이 비누의 소멸 및 변환의 상태인데, 신미경은 그것만으로도 조각적 사유, 즉 형태의 양감과 질감, 윤곽과 표면, 중력과 기념비성을 오가는 조각적 사유의 실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되레 그는 형태의 풍화와 소멸을 재료의 물성을 통해 현전하도록 했으며, 어쩌면 그러한 실제적인 형태의 소멸에 대응하는 질료의 흔적들이 조각의 범주를 재인식할 구체적인 사건을 발생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더 이상 비누가 아닌 <육신을 떠난 영혼(A Disembodid Soul)>(2018)을 구축하는 수수께끼 같은 물성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형상/육신으로부터 떼어온 (추상적) 질료의 흔적들을 이미 암시한 바 있다.




‘거석 시리즈’ 2019 도자 가변설치 

<날씨> 전시 전경 2019 런던 바라캇갤러리




조각적 질료


신미경은 최근 씨알콜렉티브에서의 개인전 <앱스트랙트 매터스>에서 어떤 반전을 보여주는데, 형상과 질료의 관계에서 그가 그토록 긴밀하게 엮어냈던 둘 사이의 위계를 전복시켜 놓은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조각적 형태의 정체성을 사유하기 위해 재료를 그것에 종속시켜 섬세한 조형의 논리로 탐구해 왔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일체의 조각적 관습으로 용인되던 형상에 대한 참조가 사라지고 동시대의 조각적 재료를 그대로 가져와 기존 작업에서 다뤄온 일련의 실험과 스스로의 조형적 성취를 갱신하려는 조각가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다. 


적어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에서 선보인 초기 작품부터 당시 몰두했던 신작 <폐허풍경>(2018)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작업 세계를 회고하는 기대 속에 그는 뜻밖에도 조각적 형상에 대한 참조와 갱신으로부터 선회하여 그것을 수행하던 재료 자체의 물성과 그것의 추상성에 집중했다. <폐허풍경>은 말 그대로 고대의 유적지를 연상시키면서 그 풍경 안팎에 잠재적인 유물의 형상이 자리 잡게 했다. 이때 유물화 혹은 조각적 당위의 과정과 절차를 드러내기 위해 신미경은 비누라는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게 됐는데,  그것이 만들어내는 형태의 균열, 소멸, 파편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조각의 단면과 변형의 흔적을 조각적 실체로 현전하게 한 것이다. 추상적인 회화의 표면처럼 보이는 ‘비누로 쓰다’(2012) 연작들과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거울>(2013)에서 <폐허풍경: 벽>(2018)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다수의 평면적인 형태들로부터 조각의 표면과 그것이 드러내는 조각적 질료의 특이성을 보여준 예다.




<트랜스레이션 시리즈-웅크린 아프로디테> 

2002 비누




이렇듯 그가 최종적으로 완성시켰던 조각의 형태를 유물 형식과 비누 재료로 절충하여 사유했다면, <앱스트랙트 매터스>에서의 반전은 비누와 동격으로 사용된 제스모나이트(Jesmonite)라는 동시대 조각의 재료가 더 이상 (조각적 행위의) ‘모방’이 아닌 조각적 ‘실천’을 통해 하나의 추상적 물성으로의 완결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미경은 여러 용도로 작업실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낡은 고무판이나 스티로폼 또는 유리판 같은 것을 하나의 원형 혹은 주형(mold) 삼아 제스모나이트로 캐스팅했다. 비누가 아닌 다른 재료로, 그가 <육신을 떠난 영혼>에서 캐스팅 테이프를 사용한 이후 제스모나이트로 급격한 선회를 보여준 것은 “캐스팅”이라는 조각적 방법을 구현하기 위해 가장 최적화된 재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재료에 해당했던 비누의 의미는, 마치 모각과 캐스팅을 통해 조각적 열화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동안 비누라는 재료의 정체성 또한 모방과 번역을 수행하는 도구의 불완전성을 역설적으로 나타냈었다. 반면 ‘앱스트랙트 매터스’(2020-2021) 연작에서 신미경은 그 역할을 전복시켜 (흠결 없는) 조각적 재료를 가져와 이미 열화된 사물의 표면을 조각의 표면으로 환원시킬 자기 참조적 갱신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리하여 조각적 행위를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조각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조각적 형태, 즉 그것의 표면과 질료적 상태를 (재)창안해 내는 행보를 보여준다.




<고스트 시리즈-레드> 2007-2013 비누 가변 크기

<진기한 장식장> 전시 전경 2015-2016 학고재 상하이




비정형의 추상적 평면을 과시하는 ‘앱스트랙트 매터스’ 연작을 보자. 사실 평면이기보다는 표면이라 말하는 게 적절해 보이는 일련의 작업에서 조각적 감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이 형태가 품고 있는 평면적인 시점이 캐스팅의 방법으로 완성된 ‘어떤 것의 표면’이라는 정황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조각에 있어서 ‘시간의 층위’와 ‘시간의 물성’을 가시화하려 했던 그간의 노력과 시도들이, 이번 연작에서는 추상적이면서도 매우 명쾌한 논리로 조각의 캐스팅 방법과 그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공간과 표면에 대한 ‘조각적 인식’으로 다시 강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을 점유하는 삼차원의 입체물이라는 조각에 대한 일반 범주를 선회해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시간에 대한 사유의 실체로서 조각의 질료를 강조한 셈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조각적 질료가 강조하는 추상적 형태의 표면과 그것이 가늠케하는 공간에 대한 감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PA




신미경




작가 신미경은 서울대학교 조소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런던 슬레이드 미술대학(Slade School of Fine Art) 조소과,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세라믹 & 유리과를 졸업했다. 성곡미술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국제갤러리, 스페이스K, 아르코미술관, 씨알콜렉티브 등 국내는 물론 영국, 중국, 벨기에 등 세계 유수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Leeum을 비롯 미국 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Houston), 네덜란드 프린세스호프 국립도자박물관(Princessehof National Museum of Ceramics), 영국 브리스톨 미술관(Bristol Museum & Art Gallery) 등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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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연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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