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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8, May 2022

우르스 피셔
Urs Fischer

평화로운 나라의 이상한 피셔

지난 1월, 드디어 파리 중심가에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가 문을 열었을 때, 프랑수아 피노(François Pinault) 회장의 쟁쟁한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화제를 모은 작품은 단연 우르스 피셔(Urs Fischer)의 왁스 조각이었다.
● 이가진 미술 저널리스트 ● 이미지 Sadie Coles HQ 제공

[Big Clay #4] 2013-2014 Cast aluminum, stainless steel, stainless steel bolts, wax coating, anchor bolts, stainless steel washers, stainless steel nuts, stainless steel lock washers, PVC washers, copper lightning rods 1,300×840×520cm Installation view of [Big Clay #4], 2013-2014 Piazza della Signoria, Musei Firenze, Florence, 22 September 2017 - 21 January 2018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 the artist Photo: Silvia Mann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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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술관 로툰다의 정중앙에서 조각상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찍은 목격담은 한동안 소셜 네트워크를 달궜다. 해당 작품인 <무제(Untitled)>(2011)는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지암볼로냐(Giambologna)의 작품 <사빈느 여성들의 납치(The Rape of the Sabine Women)>(1583)를 실물 크기로 복제한 것이다. 지암볼로냐의 원작이 대리석 조각인데 반해, 피셔는 작은 불씨에 속절없이 사그라드는 양초로 만들었다는 것만 달랐다. 기념비적인 크기의 조각상 주위를 둘러싼 인물 조각(피셔의 친구인 아티스트 루돌프 스팅겔(Rudolf Stingel)을 모델로 삼음)과 7개의 의자 조각 역시 동일하게 양초로 만들어졌다. 미술관은 “이 작품의 진정한 재료는 시간이다”라고 소개했다.

미술사에서 양초는 도상학적으로 빛, 생명, 신성 등을 상징하지만, 꺼진 초는 죽음과 파괴를 의미한다. 피셔의 왁스 조각은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상징체계를 목격하게 한다. 매끈한 최초의 상태로부터 불이 붙으면서부터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일그러지는 과정은 가까이에선 느릴지 몰라도 멀리서 보면 몇 배속으로 빠르게 돌린 인생의 축소판 같다. 작가는 광학식 스캐너를 이용해 모델을 실물 사이즈 혹은 그 이상으로 복제하고, 극사실주의에 가깝게 재현해낸다. 즉각 알아볼 수 있는 미술사의 명작이나 특징적인 오브제 외에도 유명 배우나 컬렉터, 큐레이터 등 실존 인물을 본뜬 양초 조각이 전시 내내 눈앞에서 서서히 변화한다. 조각이라는 행위 자체나 그로부터 생겨나는 결과물은 재료를 깎거나 긁고, 모델링하고, 용접해서 구상과 추상의 형태로 만드는 수많은 조각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Untitled> 2011  Wax, pigments, wicks, 
steel Installation dimensions variable Courtesy 
Palazzo Grassi, Venice and Sadie Coles HQ, London  
© the artist Photo: Stefan Altenburger



그러나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이 근본적으로 시간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면, 양초 조각은 시간의 힘에 순순히 따른다. 그 과정에서 온갖 은유들이 연기와 함께 피어오른다. 가령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 생명의 순환, 절정으로 꽃피운 한때의 아름다움이 세월과 함께 달아나는 것, 너무나 익숙했으나 더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존재 앞에서 밀려드는 정서 등 말끔하던 조각이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채 흘러내리는 동안 파라핀 덩어리라는 재료의 본래 특성을 환기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을음과 재를 남기며 소멸해가는 예술품 앞에서 이론가들은 작품의 영속성 그리고 탈신화화를 떠올린다. 시간은 생명이 태어나도록 허락하지만, 이유 없이 광포하게 모든 것을 몰살하기도 하는데, 예술이라고 피해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받아들이는 전 과정이 인생임을 피셔는 꿰뚫고 있는 것일까?

물론 피셔의 모든 작업이 녹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주요 장르가 무엇이라 규정짓기 힘들 정도로 다채로운 이력을 쌓아왔다. 맨해튼 한복판에 거대한 알루미늄 코뿔소를 등장시키거나, 공작용 점토로 만든 조각상을 두고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만져 새로운 형상으로 만들라고 권했다. 작품 목록에는 신선한 과일이 썩어가는 과정을 보게 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을 박제한 듯한 성인 크기의 해골 조각, 빵으로 지은 커다란 집, 구멍 뚫린 벽에서 튀어나오는 혓바닥 등도 있다. 갤러리의 하얀 벽에 얌전히 걸린 초현실주의풍의 회화는 기묘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평범해 보일 정도다.



Installation view of <Urs Fischer: soft> Sadie Coles 
HQ, London, 08 June - 18 August 2018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 the artist Photo: Stefan Altenburger



영원한 중립국, 평화로운 나라 스위스에서 태어난 피셔는 재기 넘치고 완벽을 기하는 대신 에너지 넘치는 추진력에 힘입어 급진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다양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1999년 중반 예술계에 데뷔한 이래로 피셔는 쉼 없이 작품을 쏟아냈다. “나는 일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듯 그가 지나간 자리엔 작품이 남았다.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 발 빠른 NFT 민팅(minting) 등 비단 미술계뿐 아니라 곳곳에서 피셔라는 이름을 마주하면서도 그를 떠올렸을 때 막상 몇 개의 키워드로는 요약되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예술의 상품화나 일상화에 개의치 않는 듯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조차 예술이 다룰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의 하나로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틀에 꿰맞춰지기를 거부하는 ‘돈키호테 정신’으로 무장한 악동이 부려 놓은 재주처럼 보이기에 십상인데, 보면 볼수록 그 면면은 실상 전통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회화, 조각, 사진, 설치 등 작가가 시도한 장르뿐 아니라 주제와 기법 면에서도 누드, 정물, 풍경, 초상 등은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다.

그동안 피셔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후예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피셔는 ‘레디메이드’보다는 ‘메이드’에 골몰해왔다. 기존에 존재하는 오브제나 이미지를 차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두는 대신, 거기서 취한 모티프를 바탕으로 회화나 조각으로 승격시킨다. 평범한 사물에 환상의 세계를 덧입히고, 규모와 형태의 변형을 통해 기존 개념을 부풀리거나 뒤바꾸는 유머와 풍자를 주요 전략으로 삼는다. 현실에 발 딛고 있지만 그 현실이 모순적이고,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으며, 가변적인 순간의 현실임을 공표한다. 그의 작업이 표면적으로 다다, 팝아트, 초현실주의 등의 스타일로 분류되는 근거다. 경력 초창기부터 피셔는 구체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 가능한 재료와 그것을 만져가면서 튀어나오는 형태를 발전시키는 식으로 작업했다. 일단 손으로 만들어 본 후 적합한 기술을 갖춘 인력을 고용해 구체적인 결과물을 완성했다.



<Untitled> 2011 
Wax, pigment, wicks Installation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of <Untitled> 2011, 
Bourse de Commerce, Pinault Collection, Paris, 
22 May 2021 - 29 January 2022  Courtesy Galerie 
Eva Presenhuber, Zurich © the artist and Tadao Ando
 Architect & Associates, Niney et Marca Architectes, 
agence Pierre-Antoine Gatier Photo: Stefan Altenburger



난해한 언어나 모호한 서사 없이도 그의 작업에는 종종 ‘개념론’이라는 라벨이 붙기도 한다. 피셔가 본인의 작업에 특정한 메시지를 담는지조차 뚜렷하지 않지만, 백지 위에 어떤 말이든 써넣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을 투영한다. 피셔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 그 자체는 별로 대단치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예술이 위대하고 풍부해지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다”라고 말한 그는 자기 작품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얼마간 변형되고, 구전되는 과정에서 또다시 각색될 것임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뇌리에서 금방 사라지기 힘든 독특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우선 과장된 크기나 표현 방식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하는데, 동시에 작품을 일격에 망가뜨리기도 하는 대범함은 ‘무용함에서 비롯되는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사뭇 원초적이고 고전적인 카타르시스 뒤에 따르는 질문은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시작점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코스모스와 카오스를 오가는 이 세계의 맨얼굴 또한 지치지 않고 상기시킨다.

2022년 4월 2일부터 멕시코시티에 위치한 우멕스 미술관(Museo Jumex)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연인들(Lovers)>은 피셔가 지난 20년간 일궈온 작품세계를 톺아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개최된 작가의 첫 전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출신 큐레이터 프란체스코 보나미(Francesco Bonami)는 이 전시를 “층층이 서로 다른 맛을 내는 생일 케이크”에 비유한다. 연대기적 흐름을 전형적으로 따르지 않고 공간 전체를 다채로운 경험과 자극이 펼쳐지는 장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으로 발산된 에너지가 툭툭 놓인 전시장에서 어떤 작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지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훗날 언젠가 우연히 ‘연인들’이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이상하고 기이한 피셔의 작품이 문득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라던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선언은 시대를 돌고 돌아 우리의 귓가를 맴돈다. 그리고 아마도 피셔의 작품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브르통이 예견했던 그 모습이 아닌가 싶다. PA



Installation view of <Urs Fischer> 
Sadie Coles HQ, London, 20 November 
2013 - 08 January 2014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 the artist Photo: Mats Nordman



Portrait of Urs Fischer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 the artist Photo: Chad Moore



작가 우르스 피셔는 1973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회화, 조각, 설치, 사진 등의 영역을 넘나드는 그는 음식부터 거울, 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를 유기적이고 실험적인 생산 과정에 배치한다. 전 세계 유수 기관에서 수많은 개인전을 개최했고 그룹전에 참여한 바 있는 피셔의 작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 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과 뉴욕 현대 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스위스 쿤스트뮤지엄 바젤(Kunstmuseum Basel), 이탈리아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과 모라 재단(Morra Foundation) 등에 소장돼있다. 현재 그는 뉴욕과 취리히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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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진 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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