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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99, Apr 2023

박지혜
Park Jihye

얼어붙은 시간을 넘어서

● 유운성 영화평론가 · 『오큘로』 공동발행인 ● 이미지 작가 제공

'Fragmented Love' 설치 전경 2017 아트스페이스 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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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혜의 영상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집요한 무시간성으로 일시적인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영원이라는 관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얼어붙은 시간의 감각이다. 8mm나 16mm 필름으로 작업한 초기 작품들에서부터 한동안 박지혜는 철저한 무시간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리적·역사적 지표가 소거된 외딴 장소나 고립된 장소에서 촬영하는 방식을 고수해왔다. 이처럼 별다른 특정성이 없는 추상적 장소에서, 한없이 되풀이될 것만 같은 지속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단순한 동작과 몸짓이 응결되는 과정을 본다. 가령 <Evanesce>(2015)같은 작품은 실제로 벌어진 특정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이지만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숲속에서 배회하다 쓰러진다는 동작과 몸짓 이외에 사건에 대한 어떤 언급도 담고 있지 않다.

박지혜의 작업에 어떤 변화가 감지된 것은 2019년에 발표한 <그곳에 아무도 없다>부터다. 이 작품의 주요 무대는 어느 건물의 폐허다. 장소와 관련된 지리적·역사적 지표는 여전히 없거나 불충분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용도로 지어진 것이건 여하간 꽤 구체적 장소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건물은 그저 폐허라고 부르기엔 여전히 꽤 단정한 외양을 유지하고 있기도 해서 철저하게 자연화된 폐허에서나 스며 나오는 무시간성의 감각을 자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사실 이곳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 있는 하수 종말 처리장으로, 한국토지공사가 하수 처리를 위해 1993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97년에 완공해 시험 가동을 마쳤지만, 악취에 대한 주민들의 집단 민원으로 곧바로 가동 중단되어 그 이후 버려진 채 방치되어 온 곳이다.



<아름다운 벽이 있다(The Wall without a Name)> 
2021 싱글채널 4K비디오, 컬러, 사운드 12분 9초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에서 선보인 <아름다운 벽이 있다>와 <그림자와 그림자들> 그리고 2022년 ‘제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세 개의 문과 하나의 거울’ 연작에서, 우리는 박지혜의 장소가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인 특성을 띠는 방향으로 분명하게 이동하고 있음을 본다. 197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의 상징인 동일방직 공장의 벽이나 신화적 기원의 장소로써의 제주 삼성혈 같은 장소가 이 작품들의 무대가 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들에서는 인물이 아예 사라지고 풍경에만 초점이 맞춰지면서 단순한 동작과 몸짓이 응결되는 과정을 탐구하곤 했던 초기작들과는 꽤 다른 느낌이 든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 이후 박지혜가 천착해온 장소들이 종종 폐허의 특성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을 한동안 유행한 에세이적 폐허 영상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우리는 박지혜가 무엇보다 온갖 종류의 클리셰(cliché)들을 자신의 예술적 소재로 삼는 작가이며, 폐허 자체는 물론이고 동시대의 영상작품들이 그것을 포착하는 방식까지도 방법적 클리셰로 끌어오곤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 개의 문과 하나의 거울 2
(Three Doors and a Mirror 2)> 
2022 싱글채널 4K비디오, 컬러, 사운드 7분 40초



클리셰에 대한 박지혜의 관심은 작가가 한동안 관심을 둔 콜라주 작업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작업의 소재가 되는 것은 빅토리안 스크랩(Victorian Scrap)으로 알려진 이미지들이다. 이는 19세기 중엽에 다색석판술(chromolithography)이 개발되면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장식용 종잇조각으로 숙녀, 아이, 천사, 새, 화초 등이 인쇄되어 있어 그 자체로 수집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일기 같은 것을 예쁘게 꾸미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콜라주 작업 가운데 하나인 <Trust to Me>(2014)에서 박지혜는 19세기 유럽의 세속적 낭만주의로부터 탄생해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종잇조각들을 꽃다발처럼 한데 모아 특유의 무시간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홀로 배에 타고 있는 여자를 무성한 잎사귀들 틈으로 바라보면서 살며시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의 상투적인 몸짓은 어쩐지 은밀하면서도 불길한 느낌을 준다. 거울에는 한 소녀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데, 짓궂게도 거울은 관람자의 얼굴을 반사하는 위치에 놓여 있어 흡사 이 작품을 보는 우리마저 안으로 끌어들여 클리셰들 가운데 자리매김하려는 듯한 느낌이다.

이처럼 박지혜는 상투적인 것의 콜라주를 통해 무시간적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의 생경함으로 관람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콜라주 작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박지혜의 작업을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이든 임의대로 분리해내서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할 뿐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Trust to Me>의 주요 구성적 요소라 할 나룻배는 박지혜의 <The Sisters Vol.2>(2009)와 <Lost in the Fathomless Waters>(2010)에도 등장하는 사물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다른 요소들(역시 클리셰들)과 관계함으로써 감각을 산출하는 사물일 뿐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사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의미도 발하지 못하는 클리셰들은 바로 그 때문에 박지혜 작업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소재가 된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 설치 전경 
2019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박지혜의 영상작품에서 클리셰의 활용은 미장센(mise-en-scène)의 구성 요소가 되는 소재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촬영 또한 뮤직비디오나 광고 제작에서 관용화되다시피 한 방식을 거의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스튜디오 촬영 시 광원의 근거를 아랑곳하지 않고 조명을 설계한다든지, 사물이나 인물 가까이 다가갈 때면 초점거리가 긴 렌즈를 활용하곤 하는 것이 그 예다. 박지혜의 영상에서 감지되는 이러한 기술적 클리셰는 콜라주 작업에서 종잇조각의 배치에 가이드가 되어주는 틀 노릇을 하는 바구니나 배의 형상에 상응한다.

소재와 틀, 내용과 형식을 이루는 온갖 클리셰들의 콜라주가 박지혜의 작업을 무시간적 세계로 이끌고 있음은 앞서 밝힌 대로다. 사건이 일어나는 결정적 순간 자체가 정작 작품에서 가시화되는 일은 없지만, 인위적으로 한데 모인 클리셰들이 미묘하게 서로를 밀쳐내면서 작품에 긴장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박지혜 작업의 성패는 눈에 띄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으면서 결코 온전히 달라붙지는 않는 클리셰들의 배치를 구상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灰⾊空間(The Gray Space)> 2021 
싱글채널 4K비디오, 컬러, 사운드 11분 20초



팬데믹 이전까지 박지혜가 내놓은 영상작품들에는 종종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동작과 몸짓에는 어떤 제의적 의미나 수행적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팬데믹 직전에 발표한 <그곳에 아무도 없다>의 춤 시퀀스(sequence)가 얼마나 이례적인 것인지를 가늠해보고 싶다면, 폐허나 재개발 지역, 혹은 신도시 같은 공간을 무대로 한 오늘날의 풍경 에세이들에서 흔히 퍼포먼스가 활용되는 방식과 기능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할 터다.

박지혜는 춤 자체에 직접 어떤 명시적·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이것을 구체적인 폐허의 이미지와 콜라주해 생경한 감각을 유발하는 데 더 관심을 두는 작가다. 춤 시퀀스 이후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하수 종말 처리장의 콘크리트 구조물들로 돌아가 잠시 배회한 다음, 폐허 저편의 숲을 배경으로 새소리를 들려주며 끝난다. 하지만 이 숲은 더 이상 예전처럼 무시간적이고 추상적인 지속의 장소로는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No One Is There)> 
2019 싱글채널 4K비디오, 컬러, 사운드 23분 25초



따라서 <아름다운 벽이 있다>와 <그림자와 그림자들>에서 화면 가득 보이는 공장 담벼락의 잎사귀들은 더는 무역사적이고 추상적인 자연의 클리셰로 남아 있지 못한다. 그것들은 이미 빅토리안 스크랩 이미지의 잎사귀들과는 다른 시간에 있다. 잎사귀들과 함께 보이는 완고한 불길함을 품은 벽과 철조망 그리고 작가가 채록한 소리와 베케트의 텍스트에서 발췌해 구성한 내레이션 등이 그것들을 저 얼어붙은 시간 속에 좀처럼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잎사귀들이 모종의 역사적 시간으로 곧바로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박지혜는 자신의 콜라주 방법론을 영상작품으로 더욱 깊숙이 끌고 들어와 실제의 구체적 장소에서 채록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생경한 감각을 끌어내는 데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제주 산지천 주변의 풍경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 특히 <공간조각>(2021)에서 뚜렷이 감지된다. 박지혜의 작업이 얼어붙은 시간 너머로 이행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역사적 시간과 신화적 시간의 언저리에서 여전히 조심조심 더듬듯 거닐고 있는 그의 발걸음은 과연 앞으로 어디로 향하게 될까? PA



<Trust to Me> 
2014 린넨에 콜라주 49×55cm



작가 박지혜는 2007년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대학교(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서 순수미술실기 및 미술비평 학사, 2009년 동 대학원에서 순수미술실기 석사를 졸업했다. 주요 개인전으로 <아름다운 벽이 있다>(인천아트플랫폼, 2021), <그곳에 아무도 없다>(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9) 등이 있고, ‘제주비엔날레’(2022-2023)와 ‘부산비엔날레’(2016) 등 그룹전에 참여했다. 다양한 관계 속에 경험하는 심리적 흔적을 영화적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뤄진 공감각적 장치로 매개, 불명확한 하나의 형상으로 풀어내는 그는 2019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2013년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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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유운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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