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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06, Nov 2023

리사 유스카비지
Lisa Yuskavage

에로와 로맨틱 사이

● 정일주 편집장 ● 이미지 작가, David Zwirner 제공

'Big Flesh Studio' 2022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Zwirner © Lisa Yuskav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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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에 건널목에 선 소녀 뺨의 솜털이 반짝였다. 생머리인지 파마를 한 것인지 까맣게 찰랑대는 단발머리의 소녀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듯하다. 셔츠 타입 상의에 굵은 주름의 플리츠 치마로 된 교복을 입었는데, 그 흔한 틴트 하나 바르지 않고서도 얼굴에서 윤이 난다. 허리를 꽉 조이고 단추를 풀어헤쳐 교복조차 섹시하게 입은 또래들 가운데, 맷맷하게 해사한 그 소녀에게 자꾸만 시선이 간다.

그토록 뜨겁더니 햇빛은 어느새 높고 청량해졌다. 그래서인지 평일인데도 공원엔 사람이 넘쳐흐른다. 도란도란 얘기하며 걷는 모녀, 한가로이 벤치에 앉아 쉬는 어른들, 누가 사람이고 누가 개인지 헷갈릴 만큼 잔디 위를 구르는 어린 무리들 가운데로 한 여성이 지나간다.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처럼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에, 완전 대조되는 가느다란 허리를 지닌 그는 목 아래까지 살을 다 가리는 옷을 입었음에도 고스란히 몸매가 드러난다. ‘크린랲’처럼 쫙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로지르는 동선을 따라 공원 안 모두의 시선이 이동한다. 잔디밭 위 어린이와 강아지의 시선만 빼고 말이다.



<Small Department of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 
2019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Zwirner 
© Lisa Yuskavage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성의 외형을 드러내는 원초적 수식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동안에 글래머 몸매를 지닌 여성을 일컫는 ‘베이글녀’나 굵고 탄력 있는 허벅지를 지칭하는 ‘꿀벅지’ 혹은 ‘찰벅지’ 같은 표현이 인터넷을 넘어 TV나 신문에까지 버젓이 나뒹굴었다. 성별을 나누고 성을 상품화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지금 분위기로서는 전혀 납득가지 않지만 정말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에 일어났던 일이다.

같은 세대를 사는 이들이 똑바로 인식을 가다듬고 자칫 가벼운 농담으로라도 성을 물건 취급하지 않도록 서로 제어하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신체의 아름다움은 문학과 미술, 예술의 영역에서 아낌없이 표현되는 것이 옳다. 지난 6월 프랑스 파리 마레 지구에서 리사 유스카비지(Lisa Yuskavage)의 작품들을 보며 내 그러한 견해는 더 확고해졌다.  

빨갛거나 노란 배경 위에 인물들이 있다. 마주 본 남녀, 나란히 앞을 보는 여자들 혹은 팔레트를 든 채 스스로의 그림 앞에 선 여자는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도 신성함과 불경함, 조화와 불협화음을 한꺼번에 자아낸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건은 있다. 남자와 마주 선 여자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젖가슴에 와인을 쏟아부을 것 같고 들꽃을 손에 쥔 여성이 걸터앉은 것은 의자가 아닌 엉덩이를 치켜 엎드린 여성이기 때문이다. 전라로 색동 니삭스만 걸친 여자 앞엔 무릎을 꿇은 채 여자의 배에 무언가 낙서하는 남자가 존재한다.



<Mrs. and Mr. Golden> 2018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Zwirner 
© Lisa Yuskavage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지만 우리가 보기 바로 직전이나 이후 어떻게 상황이 급변할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이 그림 안에 가득하다. 언뜻 미술사적 회화 기법을 충실히 따른 듯한 화면은 이마가 툭 불거진 캐릭터 때문인지 2D 만화 같다. 애절하고 갈등하는 주인공들을 때로 장난스럽고 조화롭게, 현실적 요소와 추상적 배경이 공존하며 색상이 의미를 결정하는 환상적 구성 속에 배치하는 작가의 역량은 30여 년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파리 전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한데 신기한 것은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팬티만 겨우 입은 유스카비지의 캐릭터들은 예전보다 더 대담하고 기괴하지만 어쩐지 보다 성찰적인 느낌을 선사한다는 사실이다.  

알루미늄 패널에 유채로 완성된 <Small Department of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2019)는 같은 해 리넨에 그려진 <Little Department of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와 비슷한 남녀를 주인공으로 삼고도 사뭇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그의 작품은 분류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대신 등장인물과 회화적 발명이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감정적 형식주의를 주장한다”는 설명처럼 색감이나 배경, 사사로운 모티프들로 유스카비지는 높고 낮은 것 사이의 근본적인 이분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홀랑 벗은 채 머리엔 수건을 두른 여성 앞에 전라의 남성이 무릎을 굽혀 선, 단조로운 서사의 25×20cm 남짓한 <Little Department of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에는 오로지 여성과 창문만이 색을 가졌다. 무언가에 몰두한 남자도 헝클어진 전선과 기계들도 모두 빛이 없다. 그와 대조적으로 <Small Department of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에는 색이 난무한다.



<The Artist’s Studio> 2022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Zwirner 
© Lisa Yuskavage



대충 얹었던 여자의 수건은 알록달록한 두건으로 변했고 정강이를 덮는 양말에도 색이 가득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 뒤쪽으로 자연광이 아낌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화면 중간엔 여자 주인공의 동료인지 모형인지 모를 알록달록한 여성이 또 하나 있다. 캔버스는 겨우 가로 세로 몇 cm씩 늘어났지만 사물은 빼곡하게 증가했다.

단 두 점의 그림을 예로 들었지만 유스카비지는 이렇듯 흑백으로 그렸던 그림을 총천연색으로 표현하거나, 혹은 작게 그렸던 그림을 완전히 대형으로 재생산한다. 파리 마레의 갤러리에도 입구 쪽 홀에 사진 액자 크기로 올망졸망 걸려 있던 작품들은 크기를 확확 키워 다른 홀에서는 공간을 꽉 메우듯 걸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릴 적 VHS(Video Home System)로 훔쳐보던 성인물을 초대형의 IMAX 영화로 보는 느낌이었는데, 각 그림은 스케일만 확대한 영화처럼 구석구석 조밀한 완성도를 갖췄다.

이 전시엔 ‘랑데뷰(Rendez-vous)’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는 서로 다른 순간을 담은 회화들이 동시에 한 공간에 공존하는 작가의 독특한 방식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엔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와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처럼 시간의 큰 흐름에 상징적으로 콕콕 박힌 예술가들의 도상도 존재한다. 사뭇 천박하고 뚜렷한 유스카비지의 주제는 작가의 독창적 접근 방식과 대조를 이루며 색면 회화,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와 같은 회화의 전통과 연결을 유도한다.  



<Tank Top Tondo> 2023 Oil on linen 
27.3×27.3cm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Zwirner © Lisa Yuskavage



한편 2022년 완성된 <Big Flesh Studio>에는 예술에 대한 복잡다단하고 예민한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깊고 보석 같은 색소에 흠뻑 젖은 듯한 그림은 상상 속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삼는데, 작가의 모습 주변으로 각 그림에 등장했던 여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들이 분방하게 얽혀 있다. 가로 3m에 이르는 대형 캔버스는 마치 시간을 앞뒤로 움직이는 무대가 되어 오래된 것, 새로운 것, 미처 실현되지 않은 장면들을 쓸어 담는다. 이 헛간 같은 스튜디오에서 누가 진짜 작가인지 헷갈릴 정도로 캔버스 안에 캔버스가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

내가 유스카비지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그림 맨 앞쪽의 두 모델에게 등 돌린 채 노랗게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는 여성. 화면의 여타 인물들과 달리 둔탁한 코트를 입고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서 있는 그는 그래서 오히려 눈길을 끈다. 상대적으로 전경에 있는 여인들은 정교한 손질로 다듬어져 있다.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단추는 물론 말갛게 부푼 유륜까지, 진짜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실제와 상상의 캐릭터 혹은 설정이 결합하는 역설적 스튜디오를 묘사함으로써 그는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그림의 독특한 능력을 강조한다.  



<Yellow Studio>) 2021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Zwirner © Lisa Yuskavage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정말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동시에 추상적이다. 웃는 모습이 예뻐서,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머릿결이 부드러워서, 향수 냄새가 좋아서 등.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자극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자연히 마음도 따라간다. 여기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마법 같은 사랑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어떤가.

사랑에 빠졌던 그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이 이제 다시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사랑을 했다면 마찬가지로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사랑이 식는다. 사랑에 빠지고 또 깨지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우리가 결국 사랑의 양면에 중독되었듯 유스카비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로맨틱과 에로를 포착한다. 마치 치열하고 험난한 사랑의 여로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신비의 마법을 찾듯. 정말로,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면 말이다.PA



Portrait of Lisa Yuskavage
Photo: Jason Schmidt



작가 리사 유스카비지는 1962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Tyler School of Art에서 BFA를, Yale School of Art에서 MFA를 받은 그는 지난 2006년 뉴욕의 David Zwirner와 Zwirner & Wirth에서 개인전을 동시 선보인 이후 2009년, 2011년, 2015년, 2017년, 2021, 2023년 파리와 뉴욕의 David Zwirner에서 신작들을 발표했다. Art Institute of Chicago를 비롯해 로스앤젤레스의 Hammer Museum, 워싱턴의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상하이의 Long Museum 등 주요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있다. 작가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작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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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정일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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