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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3, Jun 2014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박이소

2014.4.19 – 2014.6.1 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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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듣고 싶은 말, 너에게 듣고 싶은 말”



박이소(본명 박철호) 작고 10주기. 미술계 사람(어른)들은 여전히 그와 공유했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그들은 생전에 그가 남긴 말 한마디, 한 구절의 글귀를 애써 되새기며 그리워한다. 나는 그를 만난 적 없다. 하지만, 나도 그립다, 박이소가, 또 박모가. “요즘 세상에 가만히 벽에 붙은 그림이 뭘 할 수 있을까.” 그 스스로에게 한탄 섞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전시가 시작됐다. 전시작을 통해 처음 질문은 계속 반복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른 방식으로 되물어지더니, 결국 무한 반복되는 영상작품, 즉 무한 탄식으로 끝났다. 부채꼴 모양의 전시장, 그 동선을 따라 가보니, 작가가 1982년부터 1995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던 ‘박모(Mo Bahc)’와 1995년 귀국하여 2004년까지 ‘박이소’로 활동하며 선보였던 작품으로 전시를 나누려든 흔적이 보였다. 


겸재의 <총석정도>(1759)를 모사하고 전통 문인화의 방식을 따라 글귀(질문)를 적어 넣은 <무제>(1986) 이후, 벽면에는 연이어, 엉터리로 난을 치고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그냥 풀’이라고 적은 <그냥 풀>(1988)과 커피·콜라·간장으로 그린 <쓰리 스타 쇼>(1994) 등의 드로잉으로 이어진다. 아마 이 동선이 ‘박모’가 전시 초입에 남긴 질문들이 되물어지는 과정일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스스로에게 익명성을 부여한(혹은 부여받은) 박모는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아니면, 반대로 질문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컨템포러리, 혹은 컨템포러리-아트, 포스트모던-아트에 대해. ‘컨템포러리(동시대)’를 풀이하면 ‘한 때에 함께 머물다’는 뜻도 된다. 전후미술이라 불리는 쪽도 있지만, 이런 맥락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란, 전쟁의 참담함을 겪어낸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미술로도 설명할 수 있겠다.                                                                 




<Pride Series> 1993 36×145×12cm




그렇다면 2차 대전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 한 한반도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술’은, 엄밀히(혹은 억지로) 따지자면 컨템포러리 아트가 아닌 셈인가? 박모는 그가 1985년 뉴욕에 설립한 대안공간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통해, 또 당시 제작한 작품들을 통해 질문을 받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먼저 ‘편리한 전통’과의 거리두기 방식을 취했다. 전시장 벽에는 처음 ‘벽에 붙은 그림이 뭘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이, 전통에서 정신 혹은 신비, 대체 불가능성이란 허물을 벗겨낸 상태로 매달려 있었다. 나름 성심을 담아 세련되게 질문을 재구성한다. 전시에서 박모가 박이소로 바뀌는 순간은, <달밤도>(1989)가 <북두팔성>(1997)과 <무제(샌안토니오의 하늘)>(2000)로 곧바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두어 발자국 차이지만 대략 10년을 뛰어넘는다. 박이소는 1995년에 귀국하며 ‘아시아 남성 이민자’ 노릇을 내던지고,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업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번역자” 노릇을 한다. 그의 번역은, 번역자인 자신의 해석을 숨기는 씁쓸한 ‘저항’의 방식을 취한다. 


즉, ‘직역’이라 이음새가 매끄럽지 않다. 도리어 두 문화(혹은 수많은 관념들)가 맞닿는 경계에 생긴 이음새를 부각하여 따로 내보인다. ‘루츠(Roots, 뿌리)가 아니라 루츠(Routes, 과정)’라고 말한다. 박이소는 질문을 다시 고친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전시는 설치작품 <As an Escape>(1998)으로 끝났다. 각목과 불투명 비닐로 만든 가설물로, 전시의 뒤안길이다. 좁고 곧은 길을 따라 가면, 전시장 벽면과 작품이 만들어낸 다소 폐쇄적인 공간이 나온다. 여기엔 단 하나의 영상작품 <개 물 먹는 장면 반복>(1998)이 있다. 강아지가 신나게 물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영상으로 무한 반복된다. 나는 그 귀엽고 재치 있는 방식에, 또 강아지라는 귀여운 동물 때문에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금새 씁쓸해졌다. 사실 이 긴 탄식은 전시 초입에 이 작품을 먼저 만날 수도 있다. 박이소는 예술의 영역을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호구역”이라 말한 적 있다. 이에 따르면, 예술가들은 엄한 허울을 좇으며 스스로 무기력해진 존재라, 보호구역 안으로 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자율성이라는 이상을 지금, 여기에 떡하니 만들어 놓는다면, 그건 바로 예술가라는 존재로, 예술작품이란 형태로 드러날 것이다. 이런 예술가에게 책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의 모순과 한계를 경고하고 비판하는 예언(豫言)을 하는 일일 테다. ‘우리’는 이제껏 당면한 시대를 무엇으로 어떻게 명명할 수 있는지 따져 물은 적이 없기에, 더 이상 ‘탈주’할 수 없는 절박한 국면에 다다랐다. 따라서 반성할 수 없고, 반성이 없으니 미래 사회로의 이행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세태에서 우리는 가장 절박한 것과 가장 근본적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나는 이 물음을 구성해내는 것, 즉 유의미한 현재를 만드는 일이 문해력 있는 현대-한국-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모더니스트’ 박이소는 계속 되물었다, 어느 위치에서든. 현대-한국-예술가 중 모더니스트는 과연…. 그래서 나는 박이소가 그립다.                             




* <무제(샌 안토니오의 하늘)> 2000 비디오 카메라 4대, 비디오 프로젝터 4대, 나무와 석고판 벽 38×333×3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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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정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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