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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2, May 2014

양마오웬 ─ Trace of Time

2014.4.3 – 2014.5.10 갤러리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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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에서 명멸하는 빛



실내에 스며든 햇빛 부분을 기하학적 색띠로 변형시킨 그림, 둥글게 갈린 동서양의 대표적 두상, 몸통은 도자기에 얼굴은 비너스인 조상 등, 29점의 조각과 회화가 전시된 양마오웬 전은 동양과 서양, 재현과 추상 등이 한 작품에 공존한다. 원근법을 따르는 색띠의 계열은 그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재현과 추상이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려준다. 동양과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동/서양의 차이가 생겨나기 이전의 단계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것은 아마도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에 그 차이가 사라질 것이라는 직관에 따른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계는 더욱 평평해지고 있으며, 그렇게 닦인 길로 정보와 자본이 넘나든다. 전에는 시공간적 차이에 의해 비교될 수 없었던 것들의 비교가 상시화 된다. 차이를 차별로 전화하려는 정치경제적 압박에 대항하여, 예술은 생태학 및 역사학과 더불어 종 다양성 및 진정한 다원주의를 지지할 것이다. 


양마오웬의 작품에서 차이는 서로에 의해 상쇄되지 않고 이질성을 보존한다. 입체작품에서 두드러진 구형은 분리 이전의 원초적 단계를 상징하며, 색이 회화적 요소라 할 때, 조각에 사용된 원색은 평면/입체의 구분도 흐릿하게 한다. 모든 것이 맹렬하게 분리, 분열되어 궁극적으로는 물질과 육체까지 디지털 코드로 환원되려는 시대에, 차이의 공존이라는 깨달음을 준 계기는 사막여행이었다. ‘TRACE of TIME’이라는 전시부제는 모래와 빛만이 가득한 대지를 유목했던 시간의 순례를 암시한다. 20년 전 작가는 타클라마칸 사막 여행을 하면서 로마제국과 중국이 만나는 고대도시를 탐험하였고, 사막에 있는 유적지에서 덧없는 시간의 흐름을 보았다. 흐르는 시간에 대한 자각은 움직이는 빛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모든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사막 같은 광막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빛이다. 산란하는 빛에 대한 관심은 외광파의 점묘법을 활용한 누드나 초상에서도 두드러진다. 윈도 갤러리에 걸린 작품 <북쪽의 초상>은 햇빛을 가득 받는 바다같이 펼쳐진 초상으로, 빛의 입자와 색 점을 중첩한다.




<파르테논 2_8(Parthenon 2_8)> 

2007 브론즈 55×30×35cm




실내 풍경의 경우 빛은 보다 분석적이다. 백색광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여러 파장으로 구별되는 색 띠로 나눈 물리학자처럼, 화가는 빛 즉 시간을 쪼개어 일련의 단위로 만든다. 이렇게 분석된 색들은 숫자가 매겨지기도 하고, 그 온도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빛 자체는 재현 불가능한 숭고한 대상이지만, 분석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전시부제와 같은 작품 <trace of time>은 작업실 문과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실내 바닥에 드리워진 색띠로 표현되었다. 대개는 텅 비어있는 방에 들어온 빛은 친숙한 실내의 광경에 끼어들어 이물감을 준다. 그러나 빛을 나타내는 기하학적 색선들은 원근법을 따르는 건축적 요소와 크게 모순되지는 않는다. 마치 물질 속에 내재한 허의 공간처럼,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빛, 즉 시간은 강고하게 현전하는 공간을 한쪽 귀퉁이부터 침식할 것이며, 실재를 근원적 요소로 분해할 것이다. 물리적 실재는 그러한 요소들의 집합이다. 실재 속의 공, 색 속의 빛, 공간 속의 시간, 또는 그 역의 관계는 양마오웬의 작품에 내포된 형이상학적 측면이다. 그가 사막에서 만난 빛은 또한 깨달음의 빛이었다. 만물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들을 무한 공간 속의 입자인 모래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도 빛이다. 생명이 죽을 때 제일 먼저 거두어지는 것은 눈빛이다. 살아있는 눈의 보석 같은 광채는 훅 꺼져 버리며, 생물학을 대신하는 물리학의 보다 긴 시간의 주기에 포함된다. 소리 지르는 인간이 죽죽 내려 그은 색의 띠로 형상화된 <외침> 시리즈는 유채색 띠가 검은 색띠에 의해 침식된다. 그것들은 인터페이스에서 사라지려 한다. 




<비명 NO.2(Scream NO.2)> 

2012 캔버스에 아크릴릭 50×40cm




대부분 화면으로만 보게 되는 유명인사들 역시 같은 패턴으로 그려져 있다. 뭉크의 <외침>이나 워홀의 실크 스크린 작품도 생각나는 초상들은 죽음에 가까운 광막한 세계에 직면한 유기체의 파토스를 나타낸다. 그것은 살아있는 채 죽음을 보는 신비의 체험이다. 작품 <parthenon>에서 갈린 청동두상은 주변을 거울처럼 반사하는데, 모든 것이 통과하는 시간의 시험은 주체와 객체를 동일화한다. 유기체는 무기물은 호환적이다. 불두(佛頭)같은 종교적 도상도 조약돌처럼 마모된다. 일순간 모든 것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빛은 현존의 체험을 자아내며, 여러 버전으로 호출된다. 이 전시에서 시간을 타는 몰입의 체험은 연극성과 얽힌 설치가 아닌, 조각과 회화로 번역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시간의 궤적(Trace of the Time)> 2006 설치 (사진: Ming Tombs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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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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