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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26 – 2014.9.21 일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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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디자인’은 ‘전시’인가



해방이후 한국사회는 자유화, 민주화, 산업화에 휩싸였다. 자유화와 민주화는 자유민주주의로 붙어서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敎導民主主義)로 탄생했으나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였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의 역사는 ‘교도’를 통해 무지렁이 국민을 훈육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도 훈육보다는 잘 길들여진 전근대적 피지배계급을 고착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국민이 아니라 순종하는 국민, 지배자에게 열광하는 국민, 제도적(규범적) 국민을 만들고자 했으니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 그리고 천황주의나 제국주의와 다를 게 없었다.


한국사회는 그런 교도민주주의의 독재에 저항하는 다른 한쪽의 역사를 깊이 새겨왔다. 이것을 대칭적 인류학의 관점으로 보아야 할지, 음양이론으로 읽어야 할지, 대항역사의 민중사관으로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독재에 맞서고 투쟁하는 삶의 역사로 한국사회는 어느 때보다 뜨겁고 긴 시대를 보내야 했다는 점이다. 국가 주도의 ‘근대인 만들기’라는 ‘규범적 존재론’에 강력하게 반응하면서 ‘비규범적 실천주체(Practice)’로 거듭나기는 매우 어렵고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자유/민주화 : 산업화’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유형을 분류하는 단순한 코드라면, ‘규범적 존재: 비규범적 실천주체’는 국가를 형성하는 국민주체의 성격을 판단하는 철학적 코드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20세기 한국사회의 ‘민중’을 어떻게 해석하고 읽어낼 것인가에 대해 깊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는 엑스비션매니저(Exhibition Manager)의 관점에서는 매우 훌륭한 전시다. 전시기획자로 직역해서 부를 수 있는 이 전시의 매니저는 디자이너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미술관 전시답게 이 전시는 전시디자인에 생각보다 많은 방점을 찍은 듯하다. 1층과 2층의 전시연출은 그야말로 시각적 전시상태로서는 매우 양호했다. 그러나 이 전시(Exhibition)는 전시에 출현한 오브제들의 담론과 담론의 뿌리, 뿌리사유, 사유의 전이과정, 또는 사유과정 없이 곧장 결론으로 이어져서 ‘양산되듯’ 길러졌거나, 자각해서 일깨워진 모순에 찬 양면성의 근대인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 권의 책이 인간의 지적 사유과정이라는 알레고리 속에서 탄생하고 그것이 다시 사회와 인간의 알고리즘 속에서 소비(책)와 창조(인간. 그것은 어떤 이들에겐 ‘개조’이고 어떤 이들에겐 ‘거듭남’에 가까울 것이다)라는 두 개의 프리즘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놓친 것이다.  




2층 전시전경




지금 여기에서 보는 20세기의 풍경이 잡다하고 산만하고 이것저것이 엉겨 붙어서…, 아니, 모든 것의 해석을 열어두고 그야말로 해석 없이 읽는다고 할지라도 20세기를 만들어 온 그 수많은 다층적 관계망 사이에서의 ‘길들이기’와 ‘길들여지지 않기’의 ‘싸움(battle)’의 역사는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책과 저 책이 다투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싸우고, 이 정신과 저 정신이 대립하고, 이 영혼과 저 영혼이 한 우물로 혼합되지 않았다. 2진법이든 3수 분화든, 그것이 과학이든 샤머니즘이든, 이성이든 감성이든, 그 무엇이든 큐레이터는 20세기가 방출한 자료들 속에서 전시를 위한 그들 스스로의 큐레이션 철학을 ‘공간화’ 해야 했지 않을까?


전시장에는 전시를 위해 구빈된 책들과 이미지들과 텍스트들이 ‘전시되고’ 있었을 뿐이다. 특별강연에서 진중권이 ‘이미지 인문학’으로 이것들의 정체를 헤집어서 알고리즘적 사유체계로 근대인을 바느질해 줄지는 모르겠으나, 전시는 디자인으로 존재할 뿐 큐레이터들의 큐레이션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전시기획자를 큐레이터(Curator)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공간디자이너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사유를 공간화 하기, 사유를 디자인화 하기는 큐레이션이 맞겠지만. 기획 담화로 묶은 “인문학박물관에서 <다음의 문장을 읽으시오>까지”의 대화를 왜 전시공간에 ‘공간화’하는 실험을 하지 못했을까? 전시와 강연과 교육, 책은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라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이 전시는 아카이브를 보여주는 방식으로는 훌륭하나 아카이브를 박물화함으로써 전시를 ‘싸움의 형식’으로 담론화 하지 못했다. 차라리 강연으로 기획한 그 모든 주제어들을 공간 속에서 ‘혁명적으로’ 실험하는 큐레이션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사족하나.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와 1975년 기자 해직, 그 기자들과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 기자들, 그리고 수천 명의 시민이 참여해 1988년 한겨레신문 출범이 보이지 않았다. 2층의 잡지 표지모델들이 그토록 많은 공간을 할애 받았음에도… 우리는 도대체 어떤 문장을 읽어야 하는 거지?                                                                    




* 1층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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