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r | Art in P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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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 Made in Korea |
댄 웹(Dan Webb) <Gnome> 2010 Cast aluminum, stainless steel, paint, completed
131×80×50inch Located in Bellevue Washington, funded by King County
콘래드 쇼크로스(Conrad Shawcross) <The Dappled Light of the Sun> 2015 Weathered steel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t The Royal Academy, London
Photograph by Marc Wilmot Courtesy the artist and Victoria Miro, London
20세기가 들어오면서 산업화의 생산성에 초점을 맞춘 조직과 체계는 도시일상의 큰 틀이 되었다. 이 안에서 인간은 전체 조직의 부품과 같이 잘 짜인 생산 공정의 부분으로 전락함으로써 확산된 도시화로 붐비는 도심에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소외를감당해야 한다. 일찍이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같은 철학자가 지적하듯 소외를 짊어지고 있으나, 예상치 못하는 시기에 벗어나게 될까 두려운 산업주의의 일상은 인간소외를 더욱 악화시킨다. 21세기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내는 인간소외는 자본의 도구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산업화의 소외와 궤를 같이 하고 있지만, 조직의 일부로써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상이 예술의 지리학이 만들어낸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결국은 원치 않는 자본의 논리에서다시 배제되어야 하는 점은 다르다. 이런 지역에서 비자발적으로 이사를 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거주지 이동 그 자체보다는 자본의 잔치에서 배제되는 소외에 더 아파한다.
우리가 판교에서 주거지 개발 때문에 땅을 보상받고 떠나는 이들을 보고 거주지 이동에 따른 사회문제라고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건물 값이 올랐는데 그것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제안을 할 때 무력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예민한 상황에서 그들을 공감해주는 어떠한 장치도 없어 느끼게 되는 소외감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이태원의 ‘테이크아웃 드로잉’ 사안은 이러한 소외감에서 비롯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새로운 건물주가 마침 유명한 가수인 바람에 뭔가 좀 더 큰 바람을 관철하기 위해 우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제 막 뿌리를내리기 시작한 예술정착지를 또 떠나야 하는 ‘테이크아웃 드로잉’의 입장을 공감하지 못하고 법을 앞세워 자본의 논리로 밀어붙였다는데 있다. 소외된 사람들을 더욱 고립시켜 막다른 길로 몰아버린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낸 인간소외는 얼마간쥐어주는 이사비용과 같은 금전보상으로 해소되기 힘든 사회문제다. 그렇다고 건물주가 떠나는 이 세입자의 마음을 잘 공감해주라는 것을 어떻게 법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리차드 메이어(Richard Meyer) <Maxalot> 2007 비디오작업 네덜란드 헤이그시 청사
최근 서촌 지역에 관해 서울시는 음식점이나 프렌차이즈가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규제책을 내놓았다. 성동구청은 성수동 일대에 젠트리피케이션을 감시하기 위해 앵커시설을 세우고 있다. 예술이 개입된 자생적 도시재생이라고 선전을 할 때는 언제고 소외된 세입자의 그림자를 지우기에 급급하다. 더 깊은 소외 앞에서 행정가들은 규제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근본적인 대책일까? 본질적으로 낙후지역의 고급화는 결국 인간 사이의 문제다. 예술을 자본의 공모자로 몰아 경계하는 것은 사안을 얄팍하게 보는것이다. 어찌 보면, 예술가도 피해자다.
거식증에 걸린 자본이 무엇이든 먹어 치우는 바람에 저렴한 비용으로 작업실을 얻어 사람들 사이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을 해온 예술가들도 한때 그들의 작업과 작업실, 심지어 예술가 자신들마저 낙후지에 등장한 구경거리의 한 요소가 되어 자본을 증식시켜주는 배지로 사용된 후, 다시 작업실을 옮겨야 하고 소외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그 지역을 계속 있던 그대로 두고 새로운 건물주인을 무조건 배척해야 할까? 자본이 관심을 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낀다는 것과 같다. 개발되지 못한 동네에서 공공미술이나 예술가들의 활동으로 매력지수가 높아진다면 활력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점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순기능이다. 여기서우리가 소외라는 문제에 신경을 쓴다면 이러한 사회현상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순기능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양면성을 지닌 문제를 다루는 묘안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누는 것이다. 그 동안 나눔에 관한 사안은 사회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거론되고 정책에 반영되어 왔다. 기부를 독려하기도 하고 대기업이 기업이익을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 지원하면 세제혜택을 주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나누는 방식을 경제활동의 부수적 기능에서 본격적인 활동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경제학자 제레미리프킨(Jeremy Rifkin)이 얘기하는 협력적 공유관계로 만드는 3차 산업혁명과 같은 것이 있다.
시그리드 칼론 <KANTEN HUIS (LaceHouse)> 2009 3×7×10m Crocheted tubular netting Tilburg NL
낙후된 동네의 세입자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새로운 경제 모델을 얘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있는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의 언급처럼 21세기 인간소외는 금전적 보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공감과 공유로 해결해야 한다.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의 문제를 건물주와 세입자의 대치국면으로 해석하기보다 공감과 공유의 필요성으로 봐야 한다. 그러한 관점 안에서 우리는 공공미술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공감과 공유가 앞으로의 공공미술에 중요한 핵심어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건물주가 세입자를 몰아낼 궁리만 한다면 그 동안 공공미술로 만들어진 도시마을의 환경은지속되기 힘들다. 낙후된 지역에 들어온 예술가도 높아진 월세를 감당하기 힘든 세입자 중에 하나가 될 테니 말이다. 갈등 안에서 예술은 상호간의 자극적인 선언과 선전에 동원될 것이다. 다시 도구가 되어 본질은 왜곡되고 사라질 수 있다. 이해 당사자 간에 공감이 있다면 공유는 쉽게 성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개의 상가를 예술가와 다른 사업자가 시간대별로 나누어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영업시간 이 외의 시간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영업장에 예술작업이 자연스레 전시 되어 있다면각 세입자가 내는 금액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상승한 월세를 충당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몇몇 재래시장에서 빈 상가를 예술인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빌려주고 대신 예술가들은 시장 상인의 마케팅을 예술프로젝트로 진행해 상생의 효과를 거두는 사례도있다. 임대료가 비싼 도심에서는 시간적 켜를 구분하여 두 세입자가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도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본을 탐하는 모습으로 드러나 있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하여 인간관계에 집중해 본다면, 공감이나 공유와 같은 이전과 다른 패러다임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시대로 도시 공간의 시간대별 프로그램이 달라진다면 그 또한 색다른도시공간의 매력으로 유효하다. 이런 관점에서 공공미술은 결과물로 나오는 예술품도 중요하지만 도시공간과 인간을 연결하는프로그램으로써의 예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감과 공유 안에서 공공미술이 우리 일상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매김하는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