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과 생존의 조건이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해 오래 전부터 성찰해온 예술가가 있다. 다양한 매체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형태와 장르를 개척해온 현대미술의 거장, 브루스 나우먼이다. 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각양각색의 예술형태들이 대거 등장했던 그 중심에는 브루스 나우먼이 있었다.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설치·과정·개념예술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모든 예술장르와 범주의 초석을 다졌다 할 정도로, 나우먼의 파격적인 예술행보가 현대예술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다시 프랑스 파리를 찾았다. 까르티에 재단에서 준비한 이번 나우먼의 전시는 거장에게 바치는 오마주가 담긴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다.
이제 75세의 나이로 백발이 다되었지만, 작가는 자신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아직도 ‘현재진행 중’인 자신의 예술세계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나우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8-90년대에 제작된 설치와 비디오작품 두 점과 최근 그가 작업한 비디오와 음향설치작품들을 통해 관객은 여전히 창작 앞에 고뇌하는 한 노장작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매체를 통해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해온 탓에 나우먼의 광범위한 예술세계를 범주화시키기는 힘들지만, 그 대신 그의 드넓은 예술적 스펙트럼을 관통하는 한 가지 예술적 영감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인간의 삶, 그리고 사회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다. 형태와 지각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각각의 작품들은 인간의 삶의 조건이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수렴한다. 시대와 환경이 다르다 해도, 인간과 삶의 조건이란 문제는 누구나 살면서 자연스레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세월과 함께 깊어진 나우먼의 주름의 깊이만큼 그가 말하는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을 더욱더 깊게 파고든다.
View of the exhibition <Bruce Nauman> at Fondation
Cartier pour l’artcontemporain 2015 Visuel ⓒ Luc Boegly
까르티에 재단을 등장하는 순간, 쉬지 않고 되풀이되는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온다. 약 2분 남짓한 분량의 음성파일을 설치한 나우먼의 신작, '어린이들을 위하여(For Children/Pour les enfants)'(2015)이다. 제목과 동일한 문구가 영어와 불어버전으로 교차하며 울려 퍼지는 이 음향설치작업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전시 홀 전체를 어느새 빽빽한 공기로 가득 메운다. 홀 가운데에는 어린아이가 쓴 듯한 가지런하지 못한 글씨체의 녹음문구만이 덩그러니 걸려있다. 굉장히 짧고 단순한 문구이지만, 규칙적으로 무한 반복되는 음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에게 이유 모를 심리적 압박감을 전달한다. 서서히 죄어오는 압박. 이것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고 또 우리의 아이들이 답습해오고 있는 규율과 통제, 반복으로 행해지는 교육과 배움의 상징적 표현이기도 하다.
약 2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우리 지각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준 이 ‘반복’이라는 장치는 나우먼의 또 다른 작품에서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0년, 2009년 각각 도쿄와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해 제작된 작품, <무제(Untitled)>(1970/2009)는 여자 무용수 두 명이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한 퍼포먼스가 담긴 비디오 영상이다. 몸에 꼭 달라붙은 검은색 의상을 입은 두 무용수는 서로의 양손을 얽혀 잡고 누워, 한 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초침을 재현한다. 기하학적으로 나눠진 흰 매트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도는 무용수들의 부드럽고 유연한 움직임은 1초를 지나 곧 1분에 다다르고, 어느 순간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된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이 인간시계 퍼포먼스-비디오는 무한히 흘러가는 시간성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시간 속에 종속되어버린 공간의 파편, 인간의 나약함을 역설한다. 나우먼이 말하는 인간의 조건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들도 있다.
<Untitled 1970/2009> Film stills
ⓒ Bruce Nauman/ADAGP, Paris 2015
성악가 린드 에커트(Rinde Eckert)가 참여한 퍼포먼스-비디오작품 <인류사회학(Anthro/Socio), (Rinde Facing Camera)>(1991)은 나우먼이 인류 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한 인간과 사회의 상관관계가 잘 반영되어있다. 독창적인 설치구조를 통해 미디어아트의 수용방식을 넓혔다고 평가 받는 이 작품은 앞서 본 음향설치작업과 동일하게 간단한 세 가지 문구의 음성반복으로 구성된다. 총 3개의 거대한 벽면 스크린, 그 사이에 설치된 6개의 모니터 속에는 린드 에커트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세 문장을 교차, 반복하여 부른다. 돌림노래처럼 들려오는 ‘Feed me, Eat me, Antropology,’ ‘Help me, Hurt me, Sociology,’ ‘Feed me, Help me, Eat me, Hurt me’ 의 문구는 한 사회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상반된 가치의 조건들이 담겨있다. 텍스트와 이미지, 그리고 소리의 반복은 스크린의 이중설치구조에서 오는 중첩효과에 더해져 관객의 지각적 피로와 심리적 불안감을 배가시킨다. 마치 인간이 살기 위해 느끼는 불안과 공포, 좌절을 마주한 순간처럼 말이다.
나우먼이 바라본 인간의 조건 속에는 모순이 있다. 그가 말했던 ‘서로가 먹고 먹히는 인류’, ‘서로가 돕고 해치는 사회’라는 말은 두 개의 대립된 항이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잘려진 사슴과 코요테, 스라소니의 목과 몸통이 서로 엉켜 매달려 목마대신 원판을 빙빙 돌고 있는 <회전목마(Carousel)> (1988)의 모습처럼 나우먼이 생각한 인간의 조건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냉정하고 참혹하기까지 하다. 시간은 인간의 삶을 잘게 쪼개어버렸고, 사회는 우리가 습득하고 지켜야만 하는 통제된 규율들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익숙한 우리의 현실이다. 어찌 보면 삶이란 생존을 위한 타인과의 투쟁이기도 한 셈이다.
View of the exhibition Bruce Nauman Fondation
Cartier pour l’artcontemporain 2015 Visuel ⓒ Luc Boegly
이 잔인한 투쟁과 경쟁을 우려한 사람들은 삶의 템포를 늦추어 보라고 하지만, 나 혼자 느려진 속도가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잠식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제 인생의 황혼 문턱 앞에 선 작가가 그려낸 우리의 세상은 불안과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이 고통들은 인간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대가이자, 인간의 타고난 숙명이다. 나우먼이 직접 참여한 비디오 '연필들어올리기(Pencil Lift)/(Mr. Rogers)'(2013) 영상 속에는 양쪽이 깎긴 몽당연필 세 자루가 뾰족한 서로의 심지를 맞댄 채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연필을 지탱하는 작가의 양손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도 떨리긴 마찬가지이다. 긴장감이 맴도는 이 떨림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함께 들어 올려진 연필은 조화로운 균형을 탄생시킨다. 이것 역시 모순이지만, 균형이란 대립과 불화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이기도 하다. 대립된 존재 사이의 감도는 적당한 긴장감은 결코 우리를 추락하게 놔두지 않는다. 힘들고 조금은 불안할지라도, 함께 버티게 될 뿐이다. 피곤, 불안, 공포, 좌절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는 지금 균형을 찾아 버티는 중이다.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Vincennes-Saint-Denis)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예술과 뉴미디어아트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 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