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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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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6 - 2023.3.12 부산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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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볼 수 없는 사람들


잘 본다는 건 무슨 뜻인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인가? 그런 뜻이라면,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 간에 어떤 불순물도 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있는 그대로’는 투명한 주시를 요청한다.1) 집착이나 섣부른 판단 없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관람이 쉽지 않다.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 무수한 찌꺼기가 끼어 있어 시선이 드나들 틈이 확보되지 않는다. 여기서 찌꺼기가 무엇인지 다 열거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대표적인 현상 세 가지만 들겠다.

하나,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와 그의 작품을 둘러싼 유명세다. 명성은 관용어구로 굳어진 말과 과장된 행위로 뒷받침된다. 전자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대중문화 선구자’, ‘슈퍼플랫(Superflat)’이며, 후자는 포즈 취하기, 친분 과시하기다. 둘, 관람객의 내면에 세워진 나르시시즘의 벽이다. 이 벽의 뒷면은 자기혐오이고 앞면은 자기애다. 이 보이지 않는 벽은 작품을 가린 채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는 모습으로 노출된다.

셋, 관람객들과 언론, 미술관을 포괄하는 우리 사회 전체의 의식 둔화다. 어떤 신문은 “왜색이 짙고 선정적인 작품 앞에서 관람객들이 관대해졌다”고 전했는데,2) 관대한 게 아니라 감각이 무디어진 것이다. 여기서 감각의 마비에 주목함으로써 말하려는 바는 국내 관람객들이 혐오를 느끼고 그것을 내비쳐야 한다는 게 아니다. 작품에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작품이 일으키는 반향을 자기 감각으로 느끼며,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왜색이라는 표현은 일본에 대한 무비판적 혐오를 내포하는데, 언론은 일부러 이 단어를 씀으로써 혐일 정서를 자극하고 이슈 아닌 이슈를 만든다. 선정성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그저 야한 장면이니 관람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써 두면 해소될 일이 아니다. 이건 수위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 문화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과 왜곡된 시선, 성적 대상화의 문제다. 많은 세계시민이 오랫동안 맞서 싸워온 진부한 이미지가, 2023년에 버젓이 공립미술관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아무리 유명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이라고 해도, 윤리적 감수성이 한참 뒤떨어지는 작품을 전시에 올릴 이유는 없다.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관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도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이제는 예술의 가치에 대해 물을 때, 가격과 판매량, 방문객 수와 조회 수, 유명인의 방문과 소장 여부를 보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기 마련이고 주위 사람들을 쉽게 휘두른다. 그런데 원래 가치를 만드는 일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며, 그 가치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은 능동적인 노력을 요한다. 이것이 귀찮은 사람들은 남이 제시하는 숫자를 보고 우르르 몰려가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숫자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둔갑한다.

이 이야기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문제다. 무기력해지지 말고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자. 지금 당신 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탄탄보: 감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불꽃과의 조우>(2014)와 <스파클 / 탄탄보: 영원>(2017)을 살펴보자. 그림 속 탄탄보는 눈이 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눈이 반쯤 감겨 있거나 까뒤집어져 있다. 회오리치듯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동자는 안으로 감겨 들어가는 중이다. 그는 외부의 감각 폭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살기 위해 자기를 폐쇄한다. 그림 옆에 붙어 있는 ‘변명’ 중 하나를 보자.



<스파클 /  탄탄보: 영원(Sparkle / Tan Tan Bo: Eternity)> 
2017 Acrylic, gold leaf and platinum leaf on canvas 
mounted on wood panel 240×73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 2017 Takashi Murakami/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François Odermatt collection



이 글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솟구치다(soar)’이다. 다카시의 그림에서 끝없이 무언가를 집어삼키는 주체는 사실 욕망에 집어 삼켜진 주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소화되지 않은 것들이 말 그대로 솟구친다. 금방이라도 토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탄탄보. 그의 턱은 이미 벌어져 있고, 뾰족한 이빨 사이로 타액이 흘러내린다. 감각적, 정신적 토사물로 뒤덮인 동산에 해맑은 꽃들이 한가득 폈다. ‘야호!’ 소리치는 작은 캐릭터들이 군데군데 서 있다. 얼핏 보면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것 같다. 자세히 보면 폭격 직후, 눈을 치켜뜬 채 혼이 빠져 있는 모습이다. 놀이동산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처럼 알록달록하고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흘러내린다. 음식 포르노의 한 장면 같다. 과도한 자극에 눈알이 빠져나오고, 길게 늘어난 혀는 파리지옥처럼 탐욕스럽다. 그러나 열렬한 탐욕이 아니라 지겨워죽겠는, 넌덜머리나는, 관성의 끝에 도달한 탐욕이다. 이윽고 폭발.

다카시의 불안, 나의 불안, 우리의 불안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작가가 그려낸 욕망을 무작정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포함’하고 ‘초월’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면이 있음을 주시하고, 사회 전체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면서, 더 높은 의식 단계에서 통합해야 한다.3) 그래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물론 다카시의 작품은 명상적인 그림이 아니다. 명상을 ‘요청하는’ 그림이다. 그것은 감각 가능한 현상으로서 이 세계에 출현했고 타인처럼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의 말과 행위를 관찰하며 내면을 짐작하듯이, 그림이 표현하는 것을 통해 그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쓱 보고 지나가지 말고 멈춰 서서 바라봐야 한다. 그럴 거리가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 상상식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 앞에서 웃고 떠들고 포즈 취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전시실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이뤄진다. 아무도 일그러진 탄탄보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세히 보는 이도 물론 있으나, 그 속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 그림은 귀엽다고들 하니까 귀여운 요소를 찾고, 용케 찾아낸다. 그러면 끝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다카시의 자아(ego)가 비대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그의 의식 상태가 그림과 조형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느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전시실 가득 펼쳐 놓았으니까. 소유욕, 성욕, 식욕, 명예욕, 어떤 것이든 과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위험은, 미술관에 무언가 걸리면 사람들은 그것이 ‘바람직하고 가치 있다’ 또는 ‘쾌적하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점이다. 물론 미술관은 다카시의 작품이 ‘현대인의 불안’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 말은 ‘현대인의 불안은 바람직하다’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작품이 제시되는 환경과 홍보, 전달 방식이 비판적 거리를 설정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실제로 관람객들은 스펙터클을 소비하듯 그렇게 작품을 소비한다. 자기를, 우리를, 이 세계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그림 안의 욕망과 불안, 혼란을 그림 밖에서 똑같이 재생하고 있었다. 저마다 인스타그램을 켜고. 액자식 구성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다카시는 이 모든 광경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 그가 명상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매일 마음챙김을 했다면 애초에 이런 작업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전시의 마지막 섹션 ‘덧없음’에 있다. 거기엔 죽음이 없고 죽음을 흉내 낸 것만 있다. 온갖 신들과 해골을 그린 작품에서는 무상함이 일깨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상함에 대한 욕망이 나타날 뿐이다. 덧없음의 지옥과 재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구원에 대한 세속적 갈망과 더불어. 무엇보다 거기서 다카시는 죽지 않았다. 그는 ‘좀비’로 나타났다. 차라리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하는 자는 매일 죽는 자이고, 비좁은 자아를 부숨으로써 널리 깨어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거대한 자아 투영물을 전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이게 바로 나야, 무라카미 다카시’라고 말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다. <무라카미 좀비와 폼 좀비>(2022)를 보고 나서 이우환 공간에 마련된 ‘원상’ 섹션에 갔다. 재밌었다. 왜냐하면 ‘원상’은 불교 선종의 개념으로 영적인 힘과 수행성을 이야기하는데, 다카시가 본관 2층에서 보여준 평생의 모습과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2층에 걸린 화려한 작품과 똑같은, 강박적인 해골 무늬 배경 위에 스프레이로 원을 그렸다. 그것도 멋들어지게. 여전히 뭐가 많지 않나? 수행마저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자는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과시한다. ‘이 모든 환락은 아무 소용없다는 걸 마지막에 폭로하고 싶어. 나는 현대 사회의 욕망과 그 덧없음에 통달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세상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지적했듯 현 시대의 감각적 경험을 돌아보지 않고서 제대로 된 창작과 비평을 할 수 없다. “무절제와 과잉 생산에 기초한 문화” 속 “좌충우돌하는 도시 환경에 폭격 당한 우리의 감수성”은 “예리함”을 잃었다. 그렇게 우리는 눈 뜨고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 다녀오며 또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감성의 회복’이라고.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비평가의 임무는,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중략)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4)  

[각주]
1)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 - 그리고 비평 - 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Susan Sontag, Against Interpretation: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 도서출판 이후, 2002, p. 33
2) “‘선정성 논란’ 日작가 전시에도 긴 줄…“韓관객 달라졌다””, 『한국경제신문』, 2023.1.29, hankyung.com/life/article/2023012901611, 2023년 2월 10일 검색
3) Ken Wilber, Integral Meditation: 김명권·김혜옥·박윤정 옮김, 『켄 윌버의 통합명상』, 김영사, 2020, 참조
4) 수전 손택, 위의 책, p. 34

* ‘이우환과 그 친구들 Ⅳ’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 전시 전경 2023 부산시립미술관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 Takashi Murakami/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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