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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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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modernism

● 기획 · 진행 김미혜 기자

아담 밀러(Adam Miller) 'Quebec' (detail) 2016 105×1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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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모더니즘은 문화학자 티모테우스 베르뮬렌(Timotheus Vermeulen)과 철학 교수 로빈 반 덴 아커(Robin van den Akker)가 2010년 「메타모더니즘에 관한 노트(Notes on Metamodernism)」를 통해 주창한 개념으로, 2000년대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오가는 감성의 출현으로 특정하며 기후변화와 금융위기, 정치적 불안 등에 반응하는 흔들리는 문화적 코드를 지칭하고 확산했다. 여기서 접두사 ‘메타’는 플라톤(Plato)의 메타시스(metaxis)에서 유래한 것이며 극과 극 사이의 진동과 동시성을 묘사한다.

이번 특집은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해체와 상대주의적 경향에 한계를 느끼며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Post-postmodernism)을 정의하고 동시대성을 규정지으려는 담론들 중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노출·논의돼온 메타모더니즘을 소개한다. 이를 위해 먼저 베르물렌, 반 덴 아커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론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글을 함께 편집했다. 지면상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어 메타모더니즘의 기조와 핵심을 담기 위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눴고 각색한 글의 국영문 버전을 모두 싣는다. 이어 미술비평가 문혜진이 메타모더니즘과 동시대 현대미술의 연계성을 바탕으로 메타모던이라는 용어의 적정성은 보류한 채 동시대 미술 작업에 드러나는 느낌의 구조를 추출한다. 메타모더니즘은 전 세계 석학들 사이 여러 차례 논쟁이 벌어진 주제이나 국내에선 아직 그 시작점에 있다. 패러다임이 향후 미학적 관점에서 주류가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볼 기회다.





SPECIAL FEATURE No.1
메타모더니즘과 예술
티모테우스 베르뮬렌 & 로빈 반 덴 아커
Metamodernism and Art
Timotheus Vermeulen & Robin van den Akker

SPECIAL FEATURE No.2
메타모던, 깊이감, 동시대 미술의 느낌의 구조_문혜진





라보프, 론코 & 터너(LaBeouf, Rönkkö & Turner)

 <#IAMSORRY> 2014 © Luke Turner






Special Feature No.1

메타모더니즘과 예술

티모테우스 베르뮬렌 & 로빈 반 덴 아커



묘한 시대다. 적어도 서구의 관점에서 보면, 비교적 태평성대를 누렸던 시기가 지나고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여러 차례 거친 석유 파동과 극단적인 포퓰리즘(populism) 등으로 정치적 안정은 바닥부터 금이 갔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결과적이거나 혹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의 폭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1990년대를 점철했던 역설과 아이러니, 냉소주의, 해체주의와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동시대 ‘예술적 수행’은 애정과 진실성, 희망의 관점에서 논해진다. 더불어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표어도 자주 등장한다.


뉴욕의 유명 미술 평론가 제리 살츠(Jerry Saltz)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시니컬/냉소적인 미술은 게임스맨십(gamesmanship, 스포츠맨십에 대조개념으로 정정당당하지 못한 꼼수와 편법을 즐기는 행위 일반)에 근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쿨하게 아이러니하고, 쿨하지만 둔하고, 아이러니하게 아이러니하고, 특정 예술 작품에 대한 멘트를 담은 또 다른 작품에 토를 다는 그런 꼼수와 편법 말이다.” 이러한 예술사조의 인기는 한풀 꺾인듯 보인다. 오히려 요즘은 진정성 있게 “내가 만드는 미술이 우둔하거나 유치해보이거나 혹은 이것이 우습고 멍청하고 또 새롭지 못할 수 있어도 진지하게 다뤄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1)


그런 사회적, 미학적 흐름이 도드라지자 학자와 비평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식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현재의 패러다임은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알터모더니즘(Altermodernism), 문학 이론가 크리스찬 모라루(Christian Moraru)의 코스모더니즘(Cosmodernism), 철학자 앨런 커비(Alan Kirby)의 하이퍼모더니즘(Hypermodernism), 문화 이론가 로버트 사무엘스(Robert Samuels)의 오토모더니즘(Automodernism) 등 다양한 이름을 덧대고 탐색해왔다. 우리도 사회/미학적 변화와 자본주의의 변화를 이어서 바라보며 21세기를 지배하는 상기 ‘감정 구조’를 ‘메타모더니즘(Metamodernism)’이라는 단어로 포착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변화의 본질, 단어의 선택에서 한 걸음 물러서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경험의 방식이 도래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 방식을 비평하고 묘사할 적절한 용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내용을 개괄적으로라도 윤곽하려는 시도를 다음 글에 담는다.




데이비드 블랜디(David Blandy) 

<Duals & Dualities> 

2012 Film still © the artist




포스트모던에서 메타모던으로

“메타모던을 위해 포스트모던을 버린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포스트모던을 논할 때 특정한/구체적인/대표적인 포스트모던을 논할 수는 없다고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더’ 포스트모던(‘the’ postmodern)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러 모순적인 경향을 ‘캐치프레이즈’로 일원화했을 뿐 일관성 없는 다방면의 감성인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이합 하산(Ihab Hassan) 등이 분석한 문화 현상도 각기 달랐다.


물질적 풍경의 변화, 불신에 따른 메타내러티브의 이반, 후자본주의의 등장, 역사주의의 쇠퇴, 정동(情動)의 감쇠, 예술의 새로운 체제 등 일원화할 수 있는 공동주제조차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2)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획일화된 ‘더 모던’/현대주의에 대한 반향적 대립 구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모더니즘의 어떠한 뚜렷함, 유토피아적 이상주의, 선형적이고 구체적인 진보, 대서사, 이성(주의), 기능(주의), 형식적 순수주의 등을 거부했다는 점이 공통이다. 철학 인류학자인 요 드 뮬(Jos de Mul)이 이를 적절하게 요약했다고 판단하여 포스트모던의 역설(니힐리즘, 풍자, 불신과 대서사의 해체, 진실의 획일성)과 모던의 진지한 열의(유토피즘과 이성에 대한 맹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대치로 요약하겠다.3)


포스트모던적 경향이 온전히 흘러갔다고 할 수 없으나 그중 다수가 다른 형태를 취해가고 있고 있으며 무엇보다 새로운 감각, 의미,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읽고 있다.4) 여러 차례의 금융 위기, 지정학적 불안정성, 기후 불안으로 인해 경제시스템의 개혁이 불가피했음이 지배적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에 어울리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주창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자본주의(un nouveau monde, un nouveau capitalisme)”뿐만 아니라 화이트에서 그린 컬러로의 경제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 하나, 국제지정학적 주축과 국가 단위에서 정치 주축의 융해, 전자는 동아시아 경제의 부흥에 의한, 후자는(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공식화했던) “제3의 길(Third Way)”이 맞이한 실패와 지역-민족-사회계층의 양극화, 인터넷 미디어의 영향 등이 야기한 결과로, 기존 정치 담론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대체 에너지 생산 및 분산/다원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개발이 도래한 시공간 및 에너지 허비에 대한 대안, 지속가능한 미래도시 계획 등의 필요는 크게 물질-환경 영역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여기서 요점은 문화산업이 기존 파스티셰(Pastiche, 모방하기)나 파라탁시스(Parataxis, 나열하기) 방식을 버리고 선택한 전략이 신화와 메탁시스, 희망을 향한 시름과 근심, 참여를 지향하는 노출이었다는 점 등이다.




메리 퍼킨스(Mary Perkins) <Children Game> 

Courtesy of BIS ART GALLERY




메타모던 전략

메타모더니즘이 가장 구체적으로 표명되는 곳은 신낭만주의적 감수성의 창발 현상 속이다. 예술계에서는 낭만주의로의 회귀, 그게 스타일, 철학, 마음가짐이든 크게 관계없이 폭넓게 표방/호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프리즈(Frieze)』의 공동 편집자인 요르그 헤이저(Jörg Heiser)는 전시 <낭만적 개념주의(Romantic Conceptualism)>를 기획해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개최했다. 그로부터 불과 2년 전, 프랑크푸르트 쉬른 미술관(Schirn Kunsthalle)에서는 <이상향: 현대미술의 신낭만주의(Ideal Worlds: New Romanticism in Contemporary Art)>가 열렸다. 더불어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은 피터 도이그(Peter Doig) 회고전을 선보였고,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은 바스 얀 아더(Bas Jan Ader)의 삶과 업적을 되돌아보았다.


그 외에도 수많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황혼과 보름달, 천상의 도시 풍경과 숭고한 지경, 비밀스러운 모임과 종파, 소외된 남녀, 기묘한 소년, 소녀를 묘사하는 전시가 잇따랐다. 세월이 흐르고 되돌아본 패러디와 파스티셰(제프 쿤스(Jeff Koons), 제이크와 다이노스 채프먼 형제(Jake and Dinos Chapman),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등), 역설적 해체주의(신디 셔먼(Cindy Sherman), 사라 루카스(Sarah Lucas)), 허무주의적 파괴(폴 맥카시(Paul McCarthy))는 그들이 늘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며 ‘척’했던 모습 그대로 제자리를 잃은 듯하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감성은 매체와 형식을 넘어 다양한 스타일로 나타났다. 이는 헤르조그 앤 드뫼롱(Herzog & de Meuron)의 영구적인 것과 한시적인 것의 협상, 아더가 던진 이성에 대한 비이성의 질문, 도이그가 자연을 매개로 한 문화의 재전유 그리고 그레고리 크루슨(Gregory Crewdson)과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가 그린 원시(주체)가 문명에 적응하는 모습에서도 잘 드러나며, 평범함 속의 천상을 집착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글렌 럽사멘(Glen Rubsamen), 댄 앳토(Dan Attoe), 아민 보엠(Armin Boehm), 일상적 숭고함에 시선이 고정된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에게서도 보인다. 가상의 종파에 매료된 저스틴 컬랜드(Justine Kurland), 케이 도나치(Kaye Donachie), 데이비드 소프(David Thorpe)의 모습이나 가상의 타처(elsewheres)에 심취되었던 대런 알몬드(Darren Almond)와 찰스 애버리(Charles Avery)에게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 언급하지 않아도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받아들이고 구체화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가령 라그나 캬르탄손(Ragnar Kjartansson)이 “죽음, 갈망, 영원에 대한 에로틱한 환상”을5) (재)창조하려는 그로테스크하고 진심 어린 시도와 그 시도의 완전한 실패 속에서 비롯된 염세(Weltschmerz)가 하나의 예다. 또 하나는 셀자 카메릭(Selja Kameric)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회수하려는 노력, 유년기의 순진/순수함의 향수를 환기하려는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와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나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의 노력도 대표적이다.) 이러한 전략과 양식의 공통점은 신비주의-소외-이간 속의 보편적인 트로프를 은유처럼 사용해 대안을 제안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적인 대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대안을 의지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구현하려는 결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에린 쉬리프(Erin Shirreff) <Midday Dilemma>

2022 Dye sublimation prints on aluminum, latex paint Framed:

181×186.1×14.6cm  Courtesy of Sikkema Jenkins & Co., 

New York; Bradley Ertaskiran, Montréal © Erin Shirreff




아-토포스의 메탁시스

수많은 철학가, 문화 이론가, 예술 평론가가 포스트모던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했던 2000년대가 모두 지나간 현시점에 메타모더니즘을 고민하는 것이 부적절하고 시대착오적이며, 수많은 선험적 개념화를 번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가식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주축이 융해된 지정학적 현황과 예술의 자체적 표현/감수성을 적절하게 설명할 담론의 추구가 세 가지 ‘근심사’로 이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의도적/의지적인 ‘탈’시간, ‘탈’장소 그리고 희망하는 시공간의 탈피가 실제로는 불가하나 가능하다고 믿는 ‘탈’현실이다.


‘모던’이 발현되는 수단이 유토피아적 신탁시스(통어론적 다변)고 ‘포스트모던’이 디스토피아적 파라탁시스(나열하기)라면, 메타모던은 주체가 없는(atopic) 메탁시스를 통해 발현되는 듯하다. 그리스어-영어 어휘집을 참고하면 아토포스(ατoπoς)를 ‘이상-비범-역설’의 어떠한 것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통상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은 아토포스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장소(토포스)가 아닌 장소, 즉 ‘비-토포스’로 활용해왔다. 고로 아토포스는 (불가능하지만) 장소이지만 동시에 장소가 아니며, 경계가 없는 영역이고 파라미터(Parameter)가 없는 포지션이다. 본문에서는 이미 메탁시스를 동시에 여기, 저기, 어디이자 동시에 아무데도 아닌 것으로 정의했다.


또 하나, 탁시스(τα′≌ις)는 질서를 뜻한다. 따라서 모던이 시간순으로 질서를 제안하고 포스트모던이 공간순으로 무질서를 의미한다면 메타모던은 질서있지도 무질서하지도 않은 시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메타모더니즘은 현재의 파라미터를 미래가 없는 미래 존재의 파라미터로 대체한다. 지금 현재의 장소 경계를 장소가 없는 초현실적 장소의 경계로 대체하며 말이다. 결국 영원히 뒤로 물러나 사라지는 지평선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메타모던의 사명이다.PA


[각주]
1) Jerry Saltz, “Sincerity and Irony Hug It Out,” New York, May 27, 2010, nymag.com/arts/art/reviews/66277
2) C. Jencks, The Language of Post-Modern Architecture (London: Academy Editions, 1991); J. F.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F.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1); I. Hassan, The Postmodern Turn: Essays on Postmodernism and Culture (Columbus: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87), 84-96
3) J. de Mul, Romantic Desire in (Post)modern Art & Philosophy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9), 18-26
4) Our understanding of history, or rather historical periodization, is influenced by Raymond Williams's canonical description of dominants, emergents and residuals. See R. Williams, Marxism and Literature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121-8
5)  A. Coulson, ‘Ragnar Kjartansson’, Frieze 102 (October 2006) frieze.com/issue/review/ragnar_kjartansson


* 위 글은 2010년 『미학과 문화 저널』 Vol.2에 실린 「메타모더니즘에 관한 노트」와 2014년 『ARTPULSE』 매거진에 게재된 「미술비평과 메타모더니즘」, 두 편의 글을 재편집한 것이다.



아담 밀러(Adam Miller) 2015

<Song of the Cosmos> 86×44cm





Special Feature No. 1
Metamodernism and Art
Timotheus Vermeulen & Robin van den Akker


These are odd times. After a decade of relative peace and wealth, at least from a Western perspective, the world is in all kinds of disarray. Political stability was fractured by oil crises and Wikileaks, the Occupy movement and the rise of populist extremism. The arts have changed as well, perhaps as a consequence, perhaps coincidentally. But changed they have. Substantially. In stark contrast with the art of the 1990s, which tended to be characterized by irony, cynicism and deconstruction, contemporary practices are often discussed in terms of affection, sincerity and hopefulness. Another label that is featured with some frequency is ‘authenticity.’ As the renowned New York art critic Jerry Saltz put it, the “genus of cynical art that is mainly about gamesmanship, work that is coolly ironic, simply cool, ironic about being ironic, or mainly commenting on art that comments on other art” has become less popular. There is a new “attitude that says I know that the art I’m creating may seem silly, even stupid, or that it might have been done before, but that doesn’t mean this isn’t serious.”1)




아나스타시아 다니렌코(Anastasiia Danilenko) 

<Fulcrum> Courtesy of BIS ART GALLERY




Unsurprisingly, given these social and aesthetic shifts, scholars and critics alike have started to speak of an end to postmodernism. The current paradigm has been variously called Altermodernism (curator Nicolas Bourriaud), Cosmodernism (literary theorist Christian Moraru), Hypermodernism (philosopher Alan Kirby) and Automodernism (cultural theorist Robert Samuels). We ourselves, linking the social and aesthetic changes to changes in capitalism, have argued for the use of the term Metamodernism to describe the dominant structure of feeling of the early 21st century. But whatever the precise nature of the changes, and regardless of the label we stick to them, it is evident that a new experiential register requires a novel critical vernacular. What follows below is our attempt to sketch out-roughly, cautiously-the contours.




보 바틀렛(Bo Bartlett) <School of the Americas>

 2010 Oil on Panel 76×76cm Courtesy of the artist




FROM THE POSTMODERN TO THE METAMODERN

What do we mean when we say that “the” postmodern has been abandoned for the metamodern? It has become somewhat of a commonplace to begin a discussion of the postmodern by stressing that there is no one such thing as “the” postmodern. After all, “the” postmodern is merely the “catchphrase” for a multiplicity of contradictory tendencies, the “buzzword” for a plurality of incoherent sensibilities. Indeed, the initial heralds of postmodernity, broadly considered to be Charles Jencks, Jean-Francois Lyotard, Fredric Jameson, and Ihab Hassan, each analyzed a different cultural phenomenon-respectively, a transformation in our material landscape; a distrust and the consequent desertion of meta-narratives; the emergence of late capitalism, the fading of historicism, and the waning of affect; and a new regime in the arts.2)


However, what these distinct phenomena share is an opposition to “the” modern-to utopism, to (linear) progress, to grand narratives, to Reason, to functionalism and formal purism, and so on. These positions can most appropriately be summarized, perhaps, by Jos de Mul’s distinction between postmodern irony (encompassing nihilism, sarcasm, and the distrust and deconstruction of grand narratives, the singular and the truth) and modern enthusiasm (encompassing everything from utopism to the unconditional belief in Reason).3)




폴리나 수로보바 (Polina Surovova) 

<Russian Beauty> Courtesy of BIS ART GALLERY




We do not wish to suggest that all postmodern tendencies are over and done with.4) But we do believe many of them are taking another shape, and, more importantly, a new sens, a new meaning and direction. For one, financial crises, geopolitical instabilities, and climatological uncertainties have necessitated a reform of the economic system (“un nouveau monde, un nouveau capitalisme”, but also the transition from a white collar to a green collar economy). For another, the disintegration of the political center on both a geopolitical level (as a result of the rise to prominence of the Eastern economies) and a national level (due to the failure of the “third way”, the polarization of localities, ethnicities, classes, and the influence of the Internet blogosphere) has required a restructuration of the political discourse.


Similarly, the need for a decentralized production of alternative energy; a solution to the waste of time, space, and energy caused by (sub)urban sprawls; and a sustainable urban future have demanded a transformation of our material landscape. Most significantly perhaps, the cultural industry has responded in kind, increasingly abandoning tactics such as pastiche and parataxis for strategies like myth and metaxis, melancholy for hope, and exhibitionism for engagement.




데이비드 블랜디(David Blandy) <The End of the World> 

2017  Installation view at Seventeen Gallery, London 

© the artist  Photo: Damian Griffiths Supported 

by Arts Council England & The Elephant Trust




METAMODERN STRATEGIES

Metamodernism appears to find its clearest expression in an emergent neoromantic sensibility. For in the arts, the return of the Romantic, whether as style, philosophy, or attitude, has been widely professed. In 2007 Jörg Heiser, co-editor of Frieze, curated an exhibition in Vienna and Nurnberg called “Romantic Conceptualism”. A mere 2 years earlier, The Schirnhalle in Frankfurt hosted “Ideal Worlds: New Romanticism in Contemporary Art”. In addition, the TATE Britain has recently held a Peter Doig retrospective, while the MoMA looked back at the life and work of Bas Jan Ader.


And then we have not even mentioned the multitude of galleries exposing the often-figurative paintings and photographs of twilights and full moons, ethereal cityscapes and sublime landscapes, secret societies and sects, estranged men and women, and strange boys and girls. It appears that, after all those years, the parody and pastiche of Jeff Koons, Jake and Dinos Chapman, and Damien Hirst, the ironic deconstruction of Cindy Sherman and Sarah Lucas, and the nihilist destruction of Paul McCarthy, are finally as out of place as they always pretended to be-but, in times where “anything goes”, hardly ever were.




아나벨 다우(Annabel Daou) 

<WHEN IN THE COURSE OF HUMAN EVENTS>

 2019-2020 Ink, correction fluid on mircofiber paper 

570×99cm Installation views of <Trauma and Response> 

at The University of Texas at San Antonio, 

2021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Tanja Wagner, Berlin




This Romantic sensibility has been expressed in a wide variety of art forms and a broad diversity of styles, across media and surfaces. It has been visible in Herzog and de Meuron’s negotiations between the permanent and the temporary; in Bas Jan Ader’s questioning of Reason by the irrational; in Doig’s re-appropriation of culture through nature; and in Gregory Crewdson and David Lynch’s adaptation of civilization by the primitive. It can be perceived in Olafur Eliasson, Glen Rubsamen, Dan Attoe, and Armin Boehm’s obsessions with the commonplace ethereal, in Catherine Opie’s fixation with the quotidian sublime. It can be observed in Justine Kurland, Kaye Donachie, and David Thorpe’s fascination with fictitious sect, or in Darren Almond and Charles Avery’s interest for fictional elsewheres.


And one can see it in the plethora of works of artists anew attempting to come to terms with their unconsciousness (think, for example, of Ragnar Kjartansson’s at once grotesque and heartfelt attempts to (re)create both his “erotic fantasies of death, longing and eternity”5) and the Weltschmerz stemming from his failure to do so entirely, or of Selja Kameric’s attempts to retrieve an irrevocably irretrievable past, or of Michel Gondry, Spike Jonze, and Wes Anderson’s attempts to rekindle the naivety and innocence of their childhood). What these strategies and styles have in common with one another is their use of tropes of mysticism, estrangement, and alienation to signify potential alternatives; and their conscious decision to attempt, in spite of those alternatives’, untenableness.




데이비드 블랜디(David Blandy) <The Edge of Forever> 

2022 Film still © the artist Camera: Claire Barrett Commissioned jointly

 by John Hansard Gallery & Towner Eastbourne, 

UK Supported by Arts Council England & The Elephant Trust




ATOPIC METAXIS

Conceiving of the metamodern at the closing of a decade in which about every other philosopher, cultural theorist, and art critic has attempted to conceptualize the aftermath of the postmodern might be considered to be anachronistic, out of place, and—if one still feels the need to conceive it anew despite the multiplicity of attempts that conceptualized it priori-pretentious. It is therefore ironic that our inquiries into the discursivity by which current geopolitical tendencies can be explained and the sensibility by which the arts express themselves have led us precisely to those three concerns: a deliberate being out of time, an intentional being out of place, and the pretense that that desired atemporality and displacement are actually possible even though they are not.


If the modern thus expresses itself by way of a utopic syntaxis, and the postmodern expresses itself by means of a dystopic parataxis, the metamodern, it appears, exposes itself through a-topic metaxis. The Greek–English lexicon translates atopos (ατoπoς), respectively, as strange, extraordinary, and paradoxical. However, most theorists and critics have insisted on its literal meaning: a place (topos) that is no (a) place. We could say thus that atopos is, impossibly, at once a place and not a place, a territory without boundaries, a position without parameters. We have already described metaxis as being simultaneously here, there, and nowhere.


In addition, taxis (τα′≌ις) means ordering. Thus, if the modern suggests a temporal ordering, and the postmodern implies a spatial disordering, then the metamodern should be understood as a spacetime that is both—neither ordered and disordered. Metamodernism displaces the parameters of the present with those of a future presence that is futureless; and it displaces the boundaries of our place with those of a surreal place that is placeless. For indeed, that is the “destiny” of the metamodern wo/man: to pursue a horizon that is forever receding.PA


[각주]
1) Jerry Saltz, “Sincerity and Irony Hug It Out,” New York, May 27, 2010, nymag.com/arts/art/reviews/66277
2) C. Jencks, The Language of Post-Modern Architecture (London: Academy Editions, 1991); J. F.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F.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1); I. Hassan, The Postmodern Turn: Essays on Postmodernism and Culture (Columbus: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87), 84-96
3) J. de Mul, Romantic Desire in (Post)modern Art & Philosophy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9), 18-26
4) Our understanding of history, or rather historical periodization, is influenced by Raymond Williams's canonical description of dominants, emergents and residuals. See R. Williams, Marxism and Literature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121-8
5) A. Coulson, ‘Ragnar Kjartansson’, Frieze 102 (October 2006) frieze.com/issue/review/ragnar_kjartansson

 


*This article is a compilation of two articles, “Notes on Metamodernism” in Journal of Aesthetics and Culture Vol.2 in 2010 and “Art Criticism and Metamodernism” in ARTPULSE Magazine in 2014 that were written by the authors.



알렉산드라 도마노비치(Aleksandra Domanović)

 <Things to Come> Installation view at Gallery of Modern Art, 

Glasgow 2014 Courtesy of the artist and Glasgow International





Special Feature No. 2
메타모던, 깊이감,  

동시대 미술의 느낌의 구조
문혜진 미술비평가


Ⅰ.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주창된 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누군가 우리의 시대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며 지금의 미술을 무엇이라 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명쾌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답변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2009년 핼 포스터(Hal Foster)는 당대의 주요 비평가 및 큐레이터들에게 동시대 미술의 실체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한때 담론을 주도했던 패러다임이 궁지에 빠지고 대안적 모델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그 자체로 제도적인 대상이 된 동시대 미술을 어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전문가들의 답변은 제각각이었다. 그렇기에 이 설문은 동시대성에 대한 학술적 규정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당대 미술의 경향에 대한 산포하는 의견들을 일람하는 것에 그쳤다.1)


티모테우스 베르뮬렌(Timotheus Vermeulen)과 로빈 반 덴 아커(Robin van den Akker)가 쓴 「메타모더니즘에 관한 노트(Notes on Metamodernism)」(2010)2)도 동시대성에 대한 당대의 방향 모색의 일환이다. 실제로 2000년대 후반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당대의 시대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적 모색들이 쇄도했다. 비교적 미술계에 잘 알려진 것이 2009년 제4회 ‘테이트 트리엔날레(Tate Triennial)’의 주제였던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iaud)의 대안근대(Altermodern)일 것이다.3)




에린 쉬리프(Erin Shirreff) Video still from <Still> 

2019 Color video, silent 39min, looped Courtesy 

of Sikkema Jenkins & Co., New York; Bradley Ertaskiran,

 Montréal © Erin Shirreff




비서구의 다종적이고 혼성적인 근대성을 주창하는 대안근대는 당시 부상하던 탈식민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결합한 것으로 서구의 단일한 근대성에 대한 대안 찾기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만큼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설득력 있는 이론은 도출되지 않았다. 이런 결과는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다. 보편 이론의 종결을 선언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한 가장 근본적인 기획인 까닭이다. 총체성의 언어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의 딜레마다.


모든 것이 해체되고 혼성적이며 복합적일지라도 삶은 계속되며 미술도 지속된다. 살아있는 한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흘러가며, 지금 이 시대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버릴 수는 없다. 베르뮬렌과 반 덴 아커가 메타모더니즘에 대한 모색을 멈추지 않고 2017년 관련 연구를 규합한 책 『메타모더니즘: 역사성, 정동, 깊이(Metamodernism: Historicity, Affect and Depth After Postmodernism)』를 출판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임스 웰링(James Welling) <6109> 2008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Zwirner 

© James Welling




Ⅱ. 아마도 베르뮬렌과 반 덴 아커를 추동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동시대가 분명 19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와 동일하지 않다는 감각과 이렇게 달라진 문화 현상을 명명하고 2000년대를 규정할 필요일 테다.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역사의 종말을 주장했지만, 여전히 풀어야 할 큰 문제들은 남아 있으며, 역사는 끝나지도, 멈추지도 않은 채 진행되고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역사의 굴절과 이와 관련된 동시대 감각이다. 이와 관련해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유명한 글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1984)이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다.


동시대 문화 현상을 바탕으로 역사적 시대 구분을 시도하는 제임슨의 방식을 따라 이들은 영화, 문학, 미술, 대중문화, 글쓰기, 사진, 공예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동시대성을 논한다.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의 “그래 우리는 할 수 있어(Yes we can)”, 웨스 앤더슨(Wes Anderson)과 미란다 줄라이(Miranda July)의 “별난(the Quirky)” 영화, 코코 로지(Coco Rosie)와 데벤드라 반하르트(Devendra Banhart)의 “괴상한 포크(Freak Folk)” 음악,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의 “새로운 진정성(New Sincerity)”의 문학 등4) 여러 갈래의 현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포스터의 설문 조사와 별 다를 바 없는 시류에 대한 감각이다. 하지만 실상 저자들이 의도하는 것도 이런 정도다. 애초에 완전할 수 없는 기획인 것을 알면서도, 과거의 언어로는 2000년대 문화 현상을 설명하기 부적절하기에 동시대 문화 풍경을 설명하는 언어를 찾으려는 것이 집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루크 터너(Luke Turner) 

<HEWILLNOTDIVIDE.US> 

2017-2022 © the artist




굴절의 감각이라는 모호한 목표의 근거는 문화연구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느낌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다. 윌리엄스는 우리 삶에 깊이 내재되어 있지만 쉽게 요약하거나 추출할 수 없고 예술의 형태로만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정서나 감수성을 느낌의 구조라 칭했다. 그것은 모두가 공유하며 알기에 사회적 경험의 특수한 특질이 되고, 그래서 특정 시대나 세대의 감각으로 규정 가능한 역사적으로 구분되는 어떤 속성이다.5) 메타모던의 느낌의 구조가 무엇인지는 장르마다 달라지지만, 막연하나마 공유되는 몇 가지 특징은 있다. 과거나 미래와 단절하기보다 함께 가거나 어우러지는 것, 상충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진동하는 양가적 감각,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대한 역사적 자의식 등이다.6)


어차피 총체성이 불가능한 포스트-포스트모던 시대에 구체적 문화 현상에서 시대성의 단초를 확보하고자 하는 귀납적 시도에서 우리가 취할 바 역시 우리가 속한 계의 구체적인 작업에서 공유되는 느낌의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동시대 느낌의 구조를 역사적 시대 규정으로 확장시키고 싶어 하지만, 9·11테러와 반세계화 운동, 이라크 전쟁 등을 시대 구분의 논거로 드는 책의 주장은 아직 근거가 박약하고 비약이 크다. 2000년대 느낌의 구조가 의식의 구조와 사상의 구조로 확장되며 주요 사건과 연결되는 지점이 서술되어야 시대 규정의 설득력이 높아질 것이다. 더욱이 동시대성을 굳이 또 다른 모던의 형태로 명명하는 것 또한 생각해볼 지점이다.




크리스티나 코발척(Chrisitina Kovalchuk) 

<Reality Check> Courtesy of BIS ART GALLERY




일례로 메타모더니즘이 오마주를 바친 당사자인 제임슨은 현재를 진단하기에 근대라는 용어는 이미 특정한 의미와 이데올로기에 너무 젖어있다고 보며 대안근대나 대체근대 같은 새로운 근대성 담론에 반감을 표시한다. 그가 보기에 보편과 일반론이 무화된 현재에 유일하게 유효한 근대성은 전 세계적 자본주의뿐이다. 협소한 의미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끝났지만 후기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단계는 끝나지 않았기에,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역사적 시기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7) 그렇기에 여기서는 메타모던이라는 용어의 적정성은 보류한 채 동시대 미술 작업에 드러나는 느낌의 구조의 일단을 추출해볼까 한다.

Ⅲ.  동시대 미술과 관련해 베르뮬렌이 품은 생각은 메타모더니즘보다 몇 년 앞서 『이플럭스저널(e-flux journal)』에 발표한 한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깊이감(The New “Depthiness”)」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베르뮬렌은 2000년대 첫 십 년을 지나며 동시대 문화가 모더니즘 시대의 깊이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깊이 없음도 아닌 또 다른 종류의 깊이감(depthiness)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한다.8) 깊이감은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인 “깊이 없음(depthlessness)”의 비판적 계승이다. 베르뮬렌은 깊이감을 설명하기 위해 이탈리아 소설가 알렉산드로 바리코(Alessandro Baricco)의 『야만인들(The Barbarians)』(2014)에 등장하는 다이빙과 서핑의 비유를 끌어온다. 다이버는 바다의 깊이로부터 의미를 찾는 자들(모더니스트)이다. 반면 서퍼는 표면에서 의미를 찾는 수평적 인간(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아티 비어칸트(Artie Vierkant) <Image Objects> 

2011- Prints on aluminum composite panel, 

altered documentation images




베르뮬렌은 여기에 스노클러라는 자신이 제안한 세 번째 양식을 추가한다. 다이버가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를 향해 움직인다면, 서퍼는 파도의 흐름과 함께 움직인다. 반면 스노클러는 표면에서 떠다니면서 동시에 물고기 떼를 향해 헤엄친다. 스노클러는 깊이를 경험하지 않고 깊이를 상상하는 자다. 스노클러에게 깊이는 이론상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실행하지 않고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베르뮬렌이 말하는 ‘새로운 깊이감’이 바로 이런 것이다. 깊이를 수행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은 내부에 존재하는 깊이를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행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베르뮬렌은 명사형 깊이(depth)가 아닌 깊이 만들기(depthing)라는 용어를 주장한다. 깊이감은 깊이 없음의 인식론적 현실과 깊이의 수행적 가능성을 결합한 것이다. 깊이감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가능한 모드로서 깊이의 가능성을 복구한다.9)




다니엘 올리바 바베로(Daniel Oliva Barbero) 

<Evolution> Licensed under a Creative Commons 

Reconocimiento 4.0 Internacional License




표면의 쾌락을 알고 깊이의 허망함을 알지만 동시에 깊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상상하거나 추구하는 사례가 깊이감을 실천하는 동시대의 스노클러들이다. 베르뮬런은 동시대 미술에서 깊이감의 실례를 탐색한다. 표면을 탐색하면서도 깊이를 암시하거나 수행적으로 깊이를 만드는 경우가 그러한 사례다. 케이트 홀튼(Kate Holton), 모니카 스트릭커(Monika Stricker), 안느 메테 홀(Ane Mette Hol), 마크 렉키(Mark Leckey), 앤디 홀든(Andy Holden),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등 언급되는 작가들은 다종다양하지만, 주로 산업적이거나 복제적 요소를 수공적 혹은 인간적으로 재해석하거나, 가상이나 산업적인 것에 신체적이고 물질적 요소를 가미하여 재맥락화하는 작업이 많다. 그중에서도 알렉산드라 도마노비치(Aleksandra Domanović)의 개인전 <다가올 것(Things to Come)>(글래스고 현대미술관, 2014)은 표면에서 깊이를 상상하는 좋은 예다.10)




소이아닉(SoyAnik) <Memento Mori 02>

 Courtesy of BIS ART GALLERY




작가는 <에일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 <그래비티>(2013) 등 과거 SF 영화에 등장한 사물을 투명한 호일에 프린트해 긴 복도에 차례대로 걸어놓았다. 이 설치물 사이를 걷는 관람객은 가상과 실재가 맞닿고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기묘한 뒤틀림을 경험한다. 영화 속 사물의 3D 모델을 프린트한 투명막은 물리적 실재지만 동시에 실존하지 않는 대상이기에 가상이다. 이들은 과거의 영화에서 왔지만 동시에 미래를 이야기한다. 유령처럼 흔들리는 이미지들은 부유하는 동시대 대중문화의 표면이지만, 도열된 이미지를 통과하는 관람객은 SF 영화사의 궤적이나 진보사관의 허망함을 떠올린다. 우리는 표면을 떠돌면서도 그 밑을 바라본다.    




다리아 세메노바(Darya Semenova) 

<Colorful Animal> Courtesy of BIS ART GALLERY




Ⅳ. 베르뮬렌이 표면의 개념을 동시대 대중문화, 상업문화, 산업, 가상 등 포스트모더니즘이 상정한 반모던적인 거의 모든 것에 적용하고 있기에, 이 글에서 깊이감의 개념은 가용성이 크지만 동시에 불분명하기도 하다. 모든 작업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은 이론적 설득력이 떨어지니, 명료성을 위해 시험 삼아 표면의 개념을 순환하는 동시대 이미지로 좁혀서 깊이감 개념을 적용해보자. 베르뮬렌과 반 덴 아커가 이미 진술했듯, 모두가 공유하는 동시대 문화의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는 네트워크와 디지털 기술의 전면화다.11) 이미지와 데이터의 끝없는 합성 및 지속적 순환은 네트워크 시대의 미술 및 시각문화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속성이다.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조류는 포스트인터넷 아트로 불리는 일련의 경향들이다. 제한 없는 서핑과 다운로딩을 통한 이미지 생산과 교환은 전통적인 오브제와 온라인상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상호 참조되며 순환하는 아티 비어칸트(Artie Vierkant)의 ‘이미지 오브제(Image Objects)’(2011-) 연작에서 즉물적으로 체현된다. 출처가 다른 이미지들이 층층이 겹쳐진 포토샵 레이어 같은 표피 밑에는 미술 오브제의 고정성과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전시 방식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저항이 깔려 있다.




아나벨 다우(Annabel Daou) 

<A Crop is Destroyed by Locusts (May)> 

(detail) 2021 Ink, repair tape on microfiber paper

 182.8×76.2cm  Installation views of <A Year Like No Other> 

at Galerie Tanja Wagner, 2021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Tanja Wagner, Berlin




텍스트, 3D 합성 이미지, 실사 촬영이 복수의 창에서 정신없이 전환되는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유동성 주식회사(Liquidity Inc.)>(2014) 역시 표면을 미끄러지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시대 금융, 이미지, 데이터, 자본의 흐름을 바라본다. 국내 미술계에도 표면과 관련한 포스트인터넷적 감각을 담지한 작가들이 존재한다. 일례로 가변적인 복수의 캔버스의 레이아웃으로 구성된 정희민의 <UTC-7:00 JUN 오후 3시의 테이블>(2018)은 여러 개의 프레임을 넘나들며 빠르게 이미지를 포착해 가볍게 안착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런 작업에서 감지되는 화면 중첩, 복수의 프레임, 배치의 감각은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며 체득된 장치 매개적 감각이다. 스크린을 닮은 회화의 표면 뒤에는 이미지를 배치해 피드를 구성하고, 여러 개의 창 사이를 왕래하며 이미지를 빠르게 훑어보며, 그중 필요한 것을 캡처하는 동시대적 느낌의 구조가 자리한다.




예카테리나 아포니나(Ekaterina Afonina) 

<The Metaphysics of the Imposed Images Repression>

 Courtesy of BIS ART GALLERY




한편 QR 코드로 구현되는 최하늘의 비물질 조각 역시 흥미로운 깊이감의 사례다. QR 코드로 접속해 가상의 조각을 즐기는 관람객에게는 실물 조각의 유무가 별로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느끼는 생생함의 감각이다. 사물과 세상을 스크린 속 이미지를 통해 이해하는 동시대 지각 방식은 최하늘이 작업을 만들고 보여주는 방식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이들을 네트워크 시대의 느낌의 구조를 표면 위에서 바라보는 동시대의 또 다른 스노클러 혹은 깊이감이 투사된 버블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디지털 이미지와 네트워크의 표면을 유영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깊이를 상상하며 지향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궤적은 거창한 미래를 꿈꾸지 않지만 지금 여기에 충실함으로써 깊이를 수행적으로 실천해 동시대의 시간성을 한 땀 한 땀 직조한다.PA




보 바틀렛(Bo Bartlett) <The Samaritans> 

2014 Oil on Linen 88×120cm Courtesy of the artist




[각주]
1) Hal Foster et al., “Questionnaire on ‘The Contemporary’,” October 130 (Fall 2009), pp. 3-124; Hal Foster (ed.), “Contemporary Extracts,” e-flux Journal Issue #12 (January 2010). (e-flux.com/journal/12/61333/contemporary-extracts). 후자의 요약본에 대한 한국어 번역은 다음 잡지 및 사이트 참조. 핼 포스터 편 (문혜진 역), 「동시대 미술에 대한 발췌된 답변들」, 『아트인컬처』(2013년 1월); tigersprung.org/?p=2647
2)Timotheus Vermeulen and Robin van den Akker, “Notes on metamoder-nism,” Journal of Aesthetics & Culture Vol.2 in 2010, pp. 1-14
3) Nicolas Bourriaud, “Altermodern,” Altermodern: Tate Triennial. (London: Tate Britain, 2009), pp. 11-24
4) Robin van den Akker and Timotheus Vermeulen, “Periodising the 2000s, or, the Emergence of Metamodernism,” Metamodernism: Historicity, Affect and Depth After Postmodernism, Robin van den Akker, Alison Gibbons and Timotheus Vermeulen (eds.) (London: Rowman & Littlefield International Ltd., 2017), p. 8
5) Raymond Williams, “Film and the Deramatic Traditon”(1954). In The Raymond Williams Reader, John Higgins (ed.) (Oxford; Malden, MA: Blackwell Publishers, 2001), pp. 33-40; Raymond Williams, Marxism and Literatur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p. 131
6) Robin van den Akker and Timotheus Vermeulen, pp. 8-12
7) 프레드릭 제임슨 (황정아 역). 『단일한 근대성』 (파주: 창비, 2020), p. 20; Revisiting Postmodernism: An Interview with Fredric Jameson (2016). Social Text 127, 34(2). (June 2016), p. 144 [박진철 (역)  「다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프레드릭 제임슨 인터뷰」, 『문학과 사회』, 35권 2호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22), p. 330]    
8)깊이감(depthiness)이라는 조어는 코미디언 스테판 콜버트의 진실감(truthiness)이라는 조어를 응용해 베르뮬렌이 만든 개념이다. 진실감이 실증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 진실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면, 깊이감은 인식론적 특성과 반대되는 수행적 행위로 깊이를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9)Timotheus Vermeulen “The New “Depthiness””, e-flux journal #61 (January, 2015). https://www.e-flux.com/journal/61/61000/the-new-depthiness
10) 위의 글. 도마노비치에 대한 설명은 베르뮬렌의 표현이 불명료하여 필자의 언어로 개념을 재적용하여 작업을 재해석했다.
11) Robin van den Akker and Timotheus Vermeulen, p. 15
 


글쓴이 문혜진은 미술비평가이자 미술이론 및 시각문화연구자다. 주요 연구 분야는 기술 매체와 시각성, 동시대 미술 및 시각문화로 주로 매체와 제도, 구조에 관심이 있다. 쓴 책으로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현실문화, 2015), 옮긴 책으로 『면세미술』(공역: 워크룸, 2021), 『사진이론』(공역: 두성북스, 2016), 『테마현대미술노트』(두성북스, 201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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