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현재 위치
  1. Features
  2. Special Feature

Special Feature

다양성의 예술

a

Diversity in Art

● 기획 · 진행 편집부

로버트 콜스콧(Robert Colescott) 'George Washington Carver Crossing the Delaware: Page from an American History Textbook' 1975 Acrylic on canvas 199.4×249.6cm Lucas Museum of Narrative Art, Los Angeles, 2021.45.1. © 2022 The Robert H. Colescott Separate Property Trust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SHOPPING GUIDE

배송 안내

배송은 입금 확인 후 주말 공휴일 제외, 3~5 일 정도 소요됩니다. 제주도나 산간 벽지, 도서 지방은 별도 추가금액을 지불하셔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배송비는 6만원 이상 무료배송, 6만원 이하일 경우 3,000원입니다.


교환 및 반품이 가능한 경우

- 주문된 상품 불량/파손 및 주문 내역과 다른 상품이 오배송 되었을 경우 교환 및 반품 비용은 당사 부담입니다.

- 시판이나 전화를 통한 교환 & 반품 승인 후 하자 부분에 대한 간단한 메모를 작성하여 택배를 이용하여 착불로 보내주세요.


교환 및 반품이 불가능한 경우

- 반품 기간(7일 이내) 경과 이후 단순 변심에 한 교환 및 반품은 불가합니다.

- 고객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멸실 또는 훼손된 경우, 포장을 개봉 하였거나 포장이 훼손되어 상품 가치가 상실된 경우,

  고객님 사용 또는 일부 소비에 하여 상품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 포장을 훼손한 경우 교환 및 반품 불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화 상담 혹은 게시판을 이용해 주세요.)


※ 교환/반품 배송비 유사항 ※
- 동봉이나 입금 확인이 안될 시 교환/반품이 지연됩니다. 반드시 주문하신 분 성함으로 입금해주시기 바랍니다.

- 반품 경우 배송비 미처리 시 예고 없이 차감 환불 될 수 있으며, 교환 경우 발송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 상품 반입 후 영업일 기준 3~4일 검수기간이 소요되며 검수가 종료된 상품은 순차적으로 환불이 진행 됩니다.

- 초기 결제된 방법으로만 환불이 가능하며, 본인 계좌가 아니면 환불은 불가합니다.(다른 명 계좌로 환불 불가)
- 포장 훼손, 사용 흔적이 있을 경우 기타 추가 비용 발생 및 재반송될 수 있습니다.


환 및 반품 주소

04554 서울시 중구 충무로 9 미르내빌딩 6 02-2274-9597 (내선1)

상품 정보
Maker Art in Post
Origin Made in Korea
Buy NowRESERVE
상품 옵션
배송
Special Feature
down up
상품 목록
TOTAL 0
Buy NowRESERVE
“세계는 큰 곤경에 처했다. 분열이 깊어지고, 불평등은 커지고 있다. 생활비가 치솟고, 신뢰가 허물어지며, 불평등이 폭발해 사람들이 다치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기능 고장 속에 꽉 막혀있는 상태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 이하 UN)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는 지난달 20일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열린 제77차 UN총회 일반토의 첫날 연설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혐오와 갈등의 시대다.

팬데믹에 이어 장기화되는 러시아발 전쟁은 식량 부족, 인플레이션 등 경제적이고 가시적인 문제를 야기했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위기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오랜 기간 다양성이라는 기치 하에 실존을 탐구해온 예술은 이러한 현실을 얼마나 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양성을 키워드로 동시대 예술을 고찰하는 특집을 기획했다. 먼저 최근 대두되는 장애 예술의 개념과 다양성의 연결점을 톺고, 동시대 한국예술 속에서 여러 논의점을 살피며 사고를 확장한다. 또 포스트모더니즘을 중심으로 한 소수자 미술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개괄하며 다양성의 확장을 고민한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The Courtauld, London (Samuel Courtauld Trust)

© The Courtauld





SPECIAL FEATURE No.1
예술과 장애: 정체성의 프리즘_김미혜

SPECIAL FEATURE No.2
‘다양성’이라는 곤란함에 대하여_남웅

SPECIAL FEATURE No.3
‘다양성 예술’과 ‘나쁜 예시’들:
카라 워커, 사라 루카스, 니콜 아이젠만_이연숙(리타)




페데리코 콰틀라쿠아틀(Federico Cuatlacuatl)

<Tiemperos Del Antropoceno> 2020

Photo: David Morales





Special Feature No. 1

예술과 장애: 정체성의 프리즘
● 김미혜 기자



경험해보지 않은 이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그렇기에 함부로 그 의미를 왜곡해서도, 남용해서도 안 되는 영역. ‘장애’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하고, 지속적인 논의에도 명확하게 개념을 규정하기 어려우며, 낮은 인식 제고를 위한 노력 역시 아직 충분치 않은 상황이다. 특히 완벽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정제시킨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될 경우 장애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약점에 지나지 않았고 그 어떤 존재보다 억제되고 가려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장애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국제연합(United Nations, 이하 UN)이 장애인의 보편적인 인권 목록을 정리한 ‘장애인 권리선언’을 채택하면서부터다. 이때 UN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신체나 정신 능력의 불완전으로 인해 일상의 개인이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을 확보함에 자기 자신으로서는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는 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했던 기존의 관점을 포함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개인의 ‘불완전함’, ‘결함’으로 본 것과 다름없었다.




부케 사브지(Buket Savci) <Passengers>

2018 Oil on canvas 116.84×121.92cm




이후 차별반대 장애인연맹(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과 같은 단체가 전문가가 주도하는 정의에 반대해 독자적 개념을 제시하며 장애 발생 원인을 개인의 결함이나 불완전이 아닌 사회의 차별로 봤고, 이것이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이하 WHO) 국제 장애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Impairments, Disabilities, and Handicaps, ICIDH)에 영향을 주면서 1980년 WHO는 장애를 보는 관점에 따라 신체장애(physical impairment), 능력상실(disability) 그리고 사회적 불리(handicap)로 분류했다.




무대 위 세 명의 댄서가 마주 보고 있다.

제론 허먼(Jerron Herman)은 철조망에 에워싸인 채 

담대하게 다른 사람들을 향해 서 있다.

앨리스 셰퍼드(Alice Sheppard)와 로렐 로슨(Laurel Lawson)은

휠체어에 기대어 있는데,로슨은 휠체어 한쪽 바퀴를 바닥에

댄 채 셰퍼드의 밑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Three dancers face each other onstage. Jerron Herman stands

boldlyfacing the others, his fist in the air as barbed

wire encircles him.Alice Sheppard and Laurel Lawson

lean in their wheelchairs;Laurel balances beneath Alice,

titling on one wheel).

Photo: Robbie Sweeny/Kinetic Light




하지만 1982년 국제장애인연맹(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이 장애를 환경적, 사회적 장벽으로 인한 기회 상실이나 제약으로 해석해 사회와 환경의 변화를 요구했고, 2001년에 이르러서야 WHO는 ICIDH를 의료에 사회와 환경을 함께 고려한 기능, 장애, 건강의 국제 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Functioning, Disability and Health)로 변경했다. 2006년부턴 UN 장애인 권리협약이 장기적 손상(신체적, 정신적, 지적 또는 감각적)과 여러 장벽과의 상호작용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수준에서 완전하고 효과적인 사회 참여가 제한된 사람까지로 범위를 확장해, 의료 장애는 물론 노동 또는 경제장애(장벽과 상호작용), 사회장애(사회참여제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변화되고 있는 장애의 개념과 범위만큼 예술의 수용력도 확대됐을까?

“글쎄, 나는 내 일에 목숨을 걸었고 그것으로 내 이성은 반쯤 무너져 내렸어. (…)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건(…)(Ah well, I risk my life for my own work and my reason has half foundered in it. (…) But what can you do(…).” 끝내 미완성으로 종결된 동생 테오를 향한 마지막 서신을 뒤로 하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1890년 7월 자신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리고 사경을 헤매다 이틀 뒤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꿈은 프랑스 아를 옐로 하우스(Yellow House)에서 자신만의 예술가 공동체를 갖는 것이었다. 1888년 10월, 친구 폴 고갱(Paul Gauguin)이 아를로 왔을 때 그의 꿈은 실현되는 듯했으나 두 사람의 그림 스타일만큼 의견차는 점차 심해졌다. 그리고 성탄절을 목전에 둔 1888년 12월 23일, 극에 달한 논쟁 끝에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도려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렇게 생긴 신체적 장애는 심각한 신경장애를 동반했는데, 후대 수많은 의학 문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와 의료 기록이 정신장애 원인을 분석하는 근거가 됐다.




아베나 모타볼리(Abena Motaboli)

<The Pieces that hang far up above -

in you, in me, in I, in We, in Us>

2019 Plastic Tarp Dimensions variable




그중 하나로 2020년 네덜란드 그로닝언 의료센터(University Medical Centre Groningen) 연구진은 정신분석 감정을 통해 고흐가 생전 뇌전증(epilepsy)을 앓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그가 전형적 발작이 아닌 뇌의 더 깊은 곳에서 간질 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행동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불안, 망상, 환각 등의 증상을 겪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연구진은 “환자를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고 당시 뇌 스캔 등의 의료 영상 촬영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했으나, 연구를 총괄한 정신의학과 교수 빌렘 놀렌(Willem Nolen)은 고흐가 편지에서 “특정 사항을 축소하거나 미화했을 수 있다”면서 “비록 편지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지만, 그가 이것을 의료진에게 쓴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가족이나 다른 친척들에게 그저 소식을 알리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등의 조치를 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고 후 병원에서 퇴원하자 친구와 가족들은 고흐를 걱정했으나 이웃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가 병원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탄원서에서 그들은 고흐에 대해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며, 모든 이웃의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적었다. 이러한 점에 비춰 그가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예술계는 물론 일상에서조차 장애는 이해받지 못하는 영역에 가까웠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이자 화려한 색채, 특유의 터치로 오늘날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고흐가 생전 단 한 점의 그림만 팔았던 불운의 화가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정신 분석 연구는 장애의 기본적인 개념과 인식조차 확립되지 않았을 당시 그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실존의 비극을 느꼈을지 새삼 체감케 한다.




곽영준 <천천히 불사르기>

2015 HD 비디오 8분 20초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간이 흐르면서 장애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 수면 위로 떠 올랐고, 이에 맞춰 예술의 영역에서도 장애를 가진 이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6살에 소아마비를 앓고 16살에 철제 막대가 허리를 관통하는 교통사고로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나 불안장애, 강박장애 등을 예술로 승화한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18살이 되던 해에 희귀병에 걸려 신체적 장애를 얻은 잉카 쇼니바레(Yinka Shonibare) 등이다. 더 이상 장애는 무조건적으로 감춰야만 하는 요소가 아니었고, 예술가들의 시각도 점차 분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중 미국의 현대무용가 앨리스 셰퍼드(Alice Sheppard)는 장애를 강력한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는 예술가다. 보조 기구 없이 휠체어에 오롯이 몸을 맡긴 채 아름다운 동작을 선보이는 그는 “무용을 알기 전의 나는 그저 나무 막대기에 머리가 놓인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 몸이라는 것을 느낄 수 해준 것은 바로 무용이다. 휠체어는 나에게 이동 수단도, 보조 장비나 테크놀로지의 결과물도 아니다. 그저 몸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한다. 셰퍼드는 장애, 인종, 성별 등의 교차점에서 연결고리를 만들고 미술, 기술, 디자인, 춤으로 구현하는 예술앙상블 키네틱 라이트(Kinetic Light)를 2016년부터 운영해오고 있다. 키네틱 라이트는 장애를 가진 예술가들로만 구성된 조직으로, 이들의 작품은 장애 미학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그 안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셰퍼드는 장애를 다양성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에 분명한 경계를 드러낸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양하다는 것이 동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양하다고 해서 억압의 기본 체계가 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샤론 록하르트(Sharon Lockhart) <Untitled>

2010 Chromogenic print 94×124.5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ift of Helen Kornblum

in honor of Roxana Marcoci © 2021 Sharon Lockhart




단순히 다른 사람을 포함시키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동등함이란 애초에 우리를 배제했던 제도 전체를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는 예술이 때때로 창의성에 대한 정의를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성공적인 예술은 장애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장애를 가진 이들은 항상 예술을 만들어왔다. 우리의 예술은 풍부하고, 솔직하고, 때로는 거칠고, 정교하고, 미묘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들이 항상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장애인의 시각이 예술을 해석하는 것의 유일한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올해 초 스페이스K 서울에서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를 통해 병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업을 선보인 작가 이근민은 경계성 인격장애를 겪으며 느꼈던 환각을 소재로 파편화된 신체와 장기, 쉽게 파악되지 않는 은유적인 형상을 캔버스에 담아낸다. 트리거(trigger)가 된 것은 섭식, 소화 장애였다. 비슷한 증상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도 있었지만 당시 시골에선 그저 배탈로 치부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을 통한 공포와 고통이 다시금 그를 찾아왔다. 이전부터 사회의 상대적 정의와 카테고라이징(categorizing), 가령 이방인, 외계인, 병자, 저능아, 장애인, 오리엔탈리즘 등 주로 미디어나 출판에서 주인공을 위해 희생당하는 존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여러 검사와 분석 끝에 진단받은 분열성·경계성 인격장애 병명 코드가 한 사람을 분류하고 정의(define)하는 모습의 직관적 예시로 느껴졌다.




이근민 <방(Room)>

2021 캔버스에 유채 227.3×181.8cm




그리고 작가에게 이 경험은 큰 압력과 폭력으로 다가오는 동시에 이에 대한 저항을 예술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샘솟게 만들었다. 그가 재현하는 환각의 이미지는 결국 음식과 소화에 기인한 인간의 해체된 모습, 장기, 소화기, 순환계를 은유하는 도상들이다. 그러나 그는 환각을 소재로 활용하되 자신의 작업이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정신증을 1차원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님을 피력했다. 이근민은 “나의 작업은 계획이나 구상, 스케치도 없고 구글링을 통한 이미지 레퍼런스도 없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과거 환각에 대한 기억의 잔상들에 의존해 그림으로 이를 재현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원본(당시의 환각)은 점점 흐릿해지지만, 그 때의 냄새와 남겨진 자국, 뉘앙스만큼은 최대한 극대화시키려 노력한다. 그래서 다소 직설적인 장치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기, 내장이나 인체 어딘가에 있을법한 요소, 피 등 유기적인 상징들은 실제 의학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나 그 이미지가 지닌 일반적 인상이 한때 생물체 어딘가를 구성했던 무언가로 느껴질 수 있다. 부분적으로 크리처(creature)를 설계하는 디자이너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지만 붓질 대부분은 즉흥적으로 진행되며 결국 시작과 완성의 모습이 매우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마냥 구상화에 가까운 듯 보이지만 형태보다 느낌을 보존하는 게 더 중요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그는 다양성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엔 공감하지만 그것을 사유하는 방식이 강압적이어선 안 된다고 전했다.




로라 스플랜(Laura Splan) <Doilies - Herpes>

2004 Freestanding computerized machine

embroidered lace mounted on velvet

16.75×16.75cm




자연스러운 발현을 통해서가 아닌 상대방의 교육 수준이 적절치 못함을 지적하거나 문명적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로 간주함으로써 다양성을 강요하는 것은 그저 또 다른 차원의 카테고라이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궁극적으로 중요한건 대립이 아닌 인간 본연에 바탕을 둔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는 작품이라는 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다. 그만큼 소통을 통해 열린 개념과 사고를 공유, 수용해야 하며 대중에게 자신이 미치는 영향을 자각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야기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예술은 인류의 스펙트럼을 탐색하고 확장하기 위해 마련된 장이다. 주류 사회 임계점에서 출발해 대중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곳을 조명하기 위해 고안된 활동의 현장이다. 오랜 기간 세상은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회를 이끄는 정치가나 과학자,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위대한 성취와 장애를 동일 선상에 놓지도, 이들의 창의성과 장애의 영향력을 분석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의 장애는 잘 숨겨져 있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전면에서 이를 이야기하고 다루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며 그 과정에서 다양성의 논의를 확장하고 분석하는 것은 예술 그 스스로에게 지워진 의무이자 책임일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그렇기에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장애를 이야기하고 또 이해하려는 노력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진행형의 형태여야만 한다.




타티아나 파르셀로(Tatiana Parcero)

<Interior Cartography #35> 1996

Chromogenic print and acetate 23.8×15.7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ift

of Helen Kornblum in honor of Roxana Marcoci

© 2021 Tatiana Parcero




빛을 굴절해 파장을 확인케 하는 프리즘은 백색광에도 여러 색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프리즘을 거쳐 세상을 바라본다면 서로를 존중하고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장애가 더 이상 장애가 아니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진정한 장애를 만드는 요소는 그저 남의 일로만 여기고 무관심했던 우리 자신 아닐까. 지난해 세상을 떠난 근육긴장이상 무용수이자 예술가, 시인 닐 마커스(Neil Marcus)는 말했다. “장애는 역경에 맞서는 용감한 투쟁이나 용기가 아니다. 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독창적인 삶의 방식이다(Disability is not a brave struggle or courage in the face of adversity. Disability is an art. It’s an ingenious way to live).”PA



톰 존스(Tom Jones) <Peyton Grace Rapp>

2017 Inkjet print with glass beads

Amon Carter Museum of American Art,

Fort Worth, Texas P2021.49 © Tom Jones




[참고자료]
- 「장애평가기준과 활용」, 대한의학회, 2016
-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Functioning, Disability and Health”,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int/standards/classifications/international-classification-of-functioning-disability-and-health, 2022년 9월 23일 접속
- “Vincent's Illness and the Healing Power of Art”, Van Gogh Museum, vangoghmuseum.nl/en/art-and-stories/stories/van-goghs-illness, 2022년 9월 23일 접속
- “Van Gogh: Artist experienced ‘delirium from alcohol withdrawal’”, bbc.com/news/world-europe-54780434, 2022년 9월 23일 접속




정연두 <사진 신부> 2022 설탕조각,

목재 유리장, 사탕수수 종이에 잉크

220×273×246cm






Special Feature No. 2

‘다양성’이라는 곤란함에 대하여
● 남웅 미술비평가


지역자치와 다양성 사업에 대한 고충들

근래 필자는 지역 비평가 매칭을 위해 수도권 이남 중점도시의 외곽 지역들을 방문하고 있다. 비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청년 비평가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 서울에서 활동하는 필자를 섭외했다고 한다. 그 덕에 몇 차례 지역을 방문해 작가를 만나고 실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역 미술 동향이 서울을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담론과 어떻게 변별되고 연결되는지 가늠해보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작가 스튜디오를 이동하는 중에 지원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활동 중인 작가들을 서울의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 소개할 방안이 없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해도 외부에 알려지기 쉽지 않다는 언급이 뒤따랐다. 이는 지역 미술 환경이 척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해당 지원 프로그램의 주최는 예술가 지원기금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책정되어 있고, 지역의 주요 언론과도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또한 행정적 편의에 비중이 실린 감이 있지만 SNS 계정이 있고 웹진도 운영 중이다. 작가들 역시 같은 지역 작가들과 네트워크가 있으며, 기관은 거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도권과 지역 사이 유리 장벽은 일련의 인프라를 내부적으로만 소모한다는 평가를 충분하게 만든다.




곽영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폭로 II> 

2017 화이버글래스 직물, 레진, 

에폭시 점토, 은박, 페인트 99×61×18cm




물론 지역에서 문화사업을 운용하는 방식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성의 기치 아래 지역마다 기금을 조성하지만 예술 분야의 사업들은 전통문화와 공예, 주민 대상의 문화사업들과 혼재되어 운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담론을 양성하기보다는 전시성 정책에 의존하는 피상적 사업의 면모가 부각되기도 한다. 지역은 지역대로 주민들의 문화사업 너머 작가를 양성하고 이들이 터전을 기반 삼아 다른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지원제도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인적·문화적 자원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상황에서 지역은 의도치 않게 게토(ghetto)처럼 사업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갇히기 쉽다.


지역 상황에 과문한 필자가 대안이랍시고 다양성을 입에 올리는 태도는 위계에 바탕하는 지역 예술가의 소외와 이를 둘러싼 정념을 무시하고 나이브한 이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무지함을 무릅쓰고 면구한 답을 이어갔다. 지역 웹진의 경우 전시와 공연, 대중문화행사 소식지 외에 식자와 작가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전문적인 예술 담론을 만들 수 있는 전문지의 성격을 강화하면 좋겠고 그에 맞는 기획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남겼다. 또는 메일링리스트를 확보해 수도권 갤러리와 기관 미술관도 넣어 노출 빈도를 높여보자는 의견을, 월간지에도 꼬박꼬박 메일링을 해보자는 제언을 넣기도 했다. 지역 작가 리서치 기반의 전시를 기획해서 지역적 조형성을 탐구해보는 것은 어떤가 하는 생각을 전하기도 했다. 근본적인 답은 아니었다. 다양성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지역 기관들이 중앙 기관보다 더 참신한 아이디어를 만들고 머리로 발로 뛰어야 하는 현실을 상기시킬 뿐이라면 모를까.




아나미카 학사르(Anamika Haksar) 

<Taking the Horse to Eat Jalebis> 

2018 Courtesy the artist




다양성은 중앙의 문법 아래 레토릭(rhetoric)으로 동원되고 명분으로 발화되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정작 그 노력은 지역의 몫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지 한동안 생각했다. 지역의 수요를 맞추면서 주류 담론과도 호응할 수 있는 비평적 기획과 작업이 필요하다는 제언을 하지만, 의견을 던지는 행위는 결국 무지를 안고 의견을 냈던 나를 해당 문제에 연루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답을 하면서도 비평을 부업처럼 하는 ‘투잡러’ 미술인의 액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지역의 조형 언어를 지역 미술사와 사회문화적 맥락에 결부시켜 지역과 지역, 예술과 지역문화 사이 상이한 문법과 경험, 여건과 영향력, 자원의 낙차를 소통하고 연결할 수 있는 이들의 입지와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하는 요즘이다.




두토 하르도노(Duto Hardono) 

<‘인 하모니아 프로그레시오

(In Harmonia Progressio)’를 위한 변주와 즉흥연주>

 2016-2017 제시된 악보에 따른 퍼포먼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누산타라 현대미술관 퍼포먼스 

전경 이미지 제공: 작가 사진: 두토 하르도노




장애인을 시민으로 인정하는 것과

시민의 기준에 장애를 개입하는 것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관용의 선언은 그만큼의 책임을, 다양성 너머 평등하게 자원과 기회를 분배할 수 있는 제도와 장치들을 전제해야 한다. 이를 고려하지 않는 한 다양성은 정치적 선전과 전시에 동원되는 도구로 남아 위계는 그대로 재생산되고 형식적인 다양성은 가치와 도덕적 올바름으로만 머무른다. 가령 국가의 다문화사업은 이주외국인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이들이 사회에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기치가 미명뿐이라면, 더불어 그 방향이 민족과 국가정체성 아래 편입되는 것을 따른다면, 국가가 표명하는 다양성은 그저 도구가 되고 지지체 없이 허울만 남기 쉽다. ‘다문화’가 학교와 사회에서 멸칭이 되어 소모되는 상황은, 한국이 다인종 국가라는 인식전환과 함께 다양성의 가치를 지지할 제도와 자원 분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혐오와 차별의 반동은 다문화를 압도할 수밖에 없다.


다양성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다양성 사업의 대상들일까. 이들은 오히려 주류문화가 제공한 이등 시민의 자리를 부여받는 것은 아닌가. 하여 역차별이라는 공격을 받고 세금 도둑이라는 비난의 구실을 주지 않는가. 한시적으로 부여받은 자리는 지속성을 갖기 어려울뿐더러, 사회적 소수자의 언어와 이미지가 취사적으로 유통되는 상황을 반복할 뿐이다. 그렇다면 다양성 가치의 수혜자는 관용의 태도를 선전하고 다양성을 언급하며 자기 주체성의 윤리적 책무를 확보하는 주류 시민, 주류 정치인은 아닌가.




한부열 <안아줘요>



청와대에서 복합문화예술공간 프로젝트의 시작으로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8.31-9.19)를 진행했다. 장애 예술인의 전시공간을 확보하고 전시 기회를 늘리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한 행사는 장애인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청와대에서 전시한다는 특수성을 빼면 기존의 관 주도 장애 예술 전시와 비교해 새로운 것은 없었다. 언론은 조화와 공존을 말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작업들을 상찬하며 하나같이 ‘순수한 아름다움’을 운운한다. ‘장애 예술인’으로 한정하는 전시는 다양성의 우산에 장애인의 자리를 내어주고 순수함의 레토릭에 그들을 가두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흥미로운 사건은 따로 있었다. 전시가 열린 8월 31일, 청와대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반짝 점거를 시도했다. 전장연 활동가들은 이동권과 장애권리예산을 요구하며 출근길 지하철역을 점거하는 ‘지하철을 타자’ 시위를 하면서 매일같이 삭발을 했다. 이들은 134명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삭발함을 들고 청와대를 찾았다. 점거는 일종의 관람객 개입이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의 퍼포먼스를 두고 ‘진짜 장애인의 삶’을 알리는 전시라고 설명한다. 이 또한 예술이라고 밝히는 박경석 대표는 철창 안에 자신을 가두고 전시장에 들어갔다. 문화재청과 실랑이가 있었지만, 관람 규정에 철창 금지는 없었기에 입장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정해진 자리에 초대한 ‘장애인 예술가’의 자리, 또는 그에 부응하는 착한 관람객이 아니라 전시를 관람하고 향유할 권리를 요구하는 장애인으로서 접근한 것이다.


전시장을 점거한 이들은 나치 독일의 장애인 안락사 정책인 T4를 기획재정부에 빗대어 비판한다. 장애인들에게 예산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30만 명을 학살했던 독일 나치처럼, 기획재정부 또한 경제적 운영을 이유로 예산을 늘리지 않는데, 이 와중에 장애인의 예술을 전시성 사업으로 기획하는 상황은 얼마나 기만이고 위선인가를 폭로한다.




Installation view of

 <Jeannette Ehlers: Black Bullets>

 2022.5.10-2022.8.14 The Saastamoinen

 Foundation Art Collection / EMMA – 

Espoo Museum of Modern Art Courtesy of the artist




현장을 자세히 보도한 언론 『비마이너』는 같은 날 게시한 기사 “청와대 춘추관에 전시된 장애인의 역사적 살인, T4”에서 ‘선택받은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우리들의 블루스> 등 콘텐츠에 등장하는 가공된 장애인 캐릭터와 같이 다른 시민들이 지장을 받지 않고, 극과 재현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안전하게 의미를 내어줄 수 있는 이들을 환기한다. 일반 시민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장애인에 특화된 예술창작기관을 통해 예술을 실천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장애 운동이 제 권리를 주장하며 ‘출현’한 것과 달리 장애라는 대상을 예술적 재현과 표현의 공정을 거쳐 온전한 형식으로 ‘동원’해가며 지배언어를 장식한다는 비판이기도 하다.


그들의 투쟁과 개입을 지지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질문이 맴돌았다. ‘선택받은 장애인’은 장애인 관람객뿐 아니라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까지도 탈맥락화하는 판단은 아닐까. 장애인을 선별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두기에 앞서, 장애인으로서 예술을 한다는 것에 대한 비평은 충분히 이뤄졌는가. ‘선택받은 장애인’들은 제 작업에 대한 비평의 기회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을까.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비장애인들의 부채감을 탕감할 수 있는 재현물을 제공하는 자리를 원했을까. 이들에게 필요한 건 사람들에게 친근한 장애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들과 함께 비평의 언어를 다듬고 비평적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속적인 프로그램과 작가로서 이들을 인정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기관 주도 다양성의 수혜는 이들이 원한 답이었을까.




솔란지 페소아(Solange Pessoa) <Sonhíferas> 

2020-2021 Courtesy the artist and Mendes 

Wood DM Sao Paulo, Brussels and New York
Photo: Daniel Mansur




장애인 작가라는 타이틀에서 ‘장애인’과 ‘작가’는 각각의 독립적 위상을 가지며 주체를 명명하는 정체성이자 직능의 단어다. 하지만 둘을 병기할 때, 작가라는 보편적 주체성에 장애가 개입하면서 특수한 영역을 부여받은 작가는 노동을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인의 불완전한 위상과 겹치며 예의 불완전성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담론들은 작가의 ‘보편적 주체’를 전제하는 데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것이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작가라는 호칭이 붙으면 주변적 범주로 밀려난 이들의 영역인 양 인식된다. 이는 다양성과 관용의 태도가 위계에 흠집을 내고 변화를 추동하는지, 애초에 변화를 원치 않는 위계가 시혜와 동정의 태도로 다양성을 소비하며 대상화한 것은 아닌지, 그것은 소수자를 순수함과 무해함의 기호로 수탈하고 있지 않은지를 재차 묻도록 한다.




<테라코타 프렌드십-우정에 관하여> 

2022 메타 파빌리온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토큰의 자리와 일반시민의 위계

주변부의 몸과 언어는 저마다의 맥락을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과제를 안지만, 무리 없이 소화 가능한 소재 또는 형식으로 취급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마주한다. 주변부와 예술이 서로를 동원하며 선전용 소재로 소비하는 프로세스는 위계적 피라미드 아래 작동하며 쳇바퀴를 굴리는 것은 아닐까.


예술을 표현하고 향유할 자유는 모두에게 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술의 위계는 지역과 계층, 성별과 성적 지향, 인종과 국적, 장애와 질병 여부 등을 피상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치며 선언과 주장을 장식의 속성으로, 작가의 직함으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특정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한시적으로 언급하고 호출하며 시혜와 흥행의 소재로 소환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사회적 소수자라는 속성, 지역 작가라는 호칭은 명예시민처럼 전시의 범주 안에 한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가. 그렇게 내부 구성원의 다양성이 부상하는 동시대 예술은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가.




케냐타 A. C. 힝클(Kenyatta A. C. Hinkle) 

<The Meeting> 2021 Yupo paper,
cotton paper, and acrylic Courtesy of KACH Studio




이 글은 단지 다양성의 예술이 피식민지 게토의 정조와 방언으로, 희생자와 피해자의 언어로 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또한 식민주의적 위계의 피라미드 혹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의존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무해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할지라도 작가 개인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리는 것 역시 비평의 범주 너머 공적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닌가를 비판적으로 살필 것을 요청한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계와 재현의 체계를 바라보는 훈련이, 다양성 너머 동등한 기회와 자원 분배가 이뤄질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프로그램들이 아닐까.


비평은 어떤 교육이 제공되는지, 전시공간의 접근권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지, 다양성의 함정을 딛고 어떤 평등의 실천들이 시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이는 소재와 형식으로서 다양성뿐 아니라 작업을 하고 전시에 참여하며 관람하고 향유하는 주체는 어떤 기준 위에 올라서 있는지, 전시공간은 어떤 접근성을 가지는지 너머 지금의 고민을 누구와 나누고 있는가까지도 포괄한다. 특정 집단에 할당된 예술 너머 불안정하고 취약한 삶의 조건들이 미적 체제에 교차하고 개입하며, 시각예술의 자율적 형상들이 현장의 박동과 호흡하며 세계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변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PA




Installation view of <Black Melancholia> 

at CCS Bard’s Museum of Art
Courtesy of CCS Bard
Photo: Olympia Shannon




글쓴이 남웅은 인권운동과 더불어 시각문화 및 미술평론을 한다. 2011년 ‘제4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미술비평 부문에 「동성애자 에이즈 재현에 관련된 논의-에이즈 위기부터 오늘의 한국사회까지」로 당선된 바 있으며, 「오늘의 예술 콜렉티브-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보지만, 얼마동안 빛이 있는 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로 2017년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공저로는 『감염병과 인문학』(2014), 『메타유니버스-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2015), 『한국의 논점 2017』(2016)이 있다. 현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상임활동가이다.





로버트 콜스콧(Robert Colescott)

 <Dr. Ehrlich's Magic Bullet> 1968 

Acrylic on Canvas 199.4×149.9cm
Courtesy of The Robert H.

Colescott Separate Property Trust

 and Blum & Poe, Los Angeles/New York/Tokyo 

© 2022 The Robert H. Colescott Separate 

Property Trust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Photo: Heather Rasmussen





Special Feature No. 3

다양성 예술과 ‘나쁜 예시’들:

카라 워커, 사라 루카스, 니콜 아이젠만
이연숙(리타) 시각문화비평



미술사적 맥락에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허구적) 중심에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가 시작된 것으로 지목되는 시기는 대략 1980년대로, 이견의 여지는 있겠지만 소위 ‘당대적’이라 할만한 비평들이 출현한 것이 이때다. 요컨대 할 포스터(Hal Foster)가 편집한 선집 『반미학(The Anti-Aesthetic)』(1983)에 수록된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의 「타자들의 담론: 페미니스트들과 포스트모더니즘(The Discourse of Others: Feminists and Postmodernism)」(1983)과 같은 비평을 보자. 동성애 활동가이자 미술 비평가인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곤란한 ‘상황’ 속에서 발견되는 ‘타자’, 특히 여성들의 ‘미적 감수성’을 의미화하는 작업이야말로 동시대 비평이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본다.


그에게 있어 포스트모더니즘은 곧 “차이와 비교 불가능성을 고집하는 여성(타자)들의 주장”1)과 같은 것으로, 모더니즘의 남근-이성-시각중심주의가 지향하는 총체성의 기획을 내파(implosion)할 수 있게 만드는 대항적 지식이다. 따라서 ‘거대서사(Grand Récit)’(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 또는 ‘권력서사’에 의해 은폐된 ‘미시서사’인 타자들의 ‘주장(‘목소리’)’2)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포착하고 진단하는 것은, ‘결을 거슬러 읽’거나 ‘해체’하는 비판적 읽기-쓰기의 관점에서도 또한 예술계를 보다 ‘민주주의’적으로 재편성하기를 원하는 정치적 실천의 관점에서도 유효한 것이 된다.




카라 워커(Kara Walker)

 <Slaughter of the Innocents

 (They Might be Guilty of Something)> 

2016 Cut paper and acrylic on linen

200.7×558.8cm Courtesy of Sikkema

Jenkins & Co. and Sprüth Magers

© Kara Walker




1990년대 들어 이러한 비평을 첨단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으로 수입하고 변용해온 국내 예술계의 지극히 포스트식민주의적인 맥락에서, 최근 대두되는 ‘다양성 예술’을 단순히 한 시절 유행했던 것들의 변주이자 반복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미학이라는 분과 내에서 이미 그 중요성을 승인받은 서지 목록을 통해 ‘미술사’라는 대상을 이해해온 아마추어 연구자로서, 나 역시 동시대의 다양성 예술이 결코 완전히 새로운 것일 수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국내 예술계에서 종종 발견되는 다양성 예술의 용법은, 반복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특수한 난국(impasse)을 예증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최소한 국내 예술계에서 다양성 예술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사날 쿠마르 사시다란

(Sanal Kumar Sasidharan) 

<Sexy Durga> 2017 Courtesy the artist




1)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예술을 가리키는 특수한 범주. 이러한 범주가 고안된 까닭은 지금까지 기존 예술계에서 적극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배제되어온 이들을 ‘힘돋우기(empowering)’ 위함이다. 보편성의 폭력 아래 침묵해온 사회적 소수자들이 가진 ‘차이’는 곧 이들의 예술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각각의 예술이 드러내는 형식/내용상의 변별 가능한 특성은 ‘존재 그 자체로’ 수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권력 투쟁의 축소판으로서 예술계는 재현의 질서를 재조정하기 위해 ‘소수자 할당제’를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양성 예술이 미술관으로 진입하는 것은 곧 소수자들의 평등하게 ‘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연장선으로 여겨진다. 다양성 예술과 거의 비슷한 맥락에서, ‘다원주의 예술’, ‘포용적 예술’ 등의 용어가 사용된다.

2) 지금까지 우리가 ‘예술적인 것’이라고 합의해온 역사적/문화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 ‘여집합’. 한 마디로 널리 동의된 해석의 프레임만 가지고는 유의미한 의미를 도출해낼 수 없는 처치 곤란한 ‘나머지’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당사자’의 예술(과 유사한 무엇)이 속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비(非)미술로 간주되어온 민속적/장식적 수공예미술과 하위문화적 생산물들이 포함된다. 1)의 정의에서 다양성 예술이 모든 인간의 ‘천부 인권’과 동치 관계를 이룸으로써 몰인정한 비평가들의 비판과 평가로부터 면책된다면, 2)의 정의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기존 예술/미술비평이 ‘작품’이라고 승인해온 대상들의 유의미한 질적 특성들과 견주어 보았을 때, 그것에 미달하거나 아예 그러한 특징들이 부재하는 것들이 바로 다양성 예술이라는 임시 번호표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양성 예술은 ‘미완성의’, ‘소박한’, ‘조잡한’과 같은 경멸적인 형용사들과 그 지위를 나란히 한다.




제이슨 위(Jason Wee) 

<의결을 위한 토론장 예행연습>

 2019- 리브레토 퍼포먼스, 의상, 폴리에스터

패널에 프린트, 스트링 가변설치 Ed. 1 + 1 AP 

파라 사이트 <커튼> 설치 전경 2021 

이미지 제공: 작가, 파라 사이트




둘 중 어떤 의미로 다양성 예술을 사용하든 간에, 일견 ‘대안’적인 이 범주가 의존하는 한계는 명백한 것이다. 다양성 예술이라는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한편으로는 “우리는 모두 다르고, 우리는 모두 아름답고,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같다”는 자유주의적인 정체성 정치의 자아도취에 저항하기 어려워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대체 그게 뭔지 여전히 모르겠고 앞으로도 알기 싫은 대상에 대한 비평적 방임을 정당화하는 권위에 부역하게 된다. 이 같은 부수적 효과는 물론, 다양성 예술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예술’, ‘흑인 예술’, ‘장애인 예술’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예술을 호명하고 범주화하기 위해 마련된 특정한 이름표들이 갖는 태생적 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


각각의 소수자 정치에 있어 이름이란, 해방과 예속이라는 양극단의 운동성이 동시에 포착될 수 있는 유일한 추상적 장소다. 만약 이름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것인가? 이처럼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스펙트럼을 포괄할 수 있는 우산 개념(umberella term)으로서 다양성 예술이라는 이름은 임시적이나마 필요한 것 같다. 또한 오웬스가 해당 비평을 쓴 1983년으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페미니즘 예술을 비롯한 사회/정치적 주제의 예술이 여전히 엘리트주의적인 주류 예술의 ‘특집’ 또는 ‘부록’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자. 이 같은 사실은 ‘할당제’와 같은 수량적 몫(‘파이’)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모델을 굳이 고집하지 않더라도, 다양성 예술이라는 ‘문제’를 사회적 소수자-예술가들의 ‘기회’로 이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

 <고독한 단어들> 2016 발포 고무, 에폭시 수지, 

패브릭 가변 크기 포도뮤지엄 소장




이제부터 간략히 소개할 세 명의 작가는 인종과 섹슈얼리티, 섹스와 폭력과 같은 자극적인 만큼이나 소외된 정치적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분명 다양성 예술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다양성 예술과 같은 유순한 이름의 내부로 쉽게 포섭되지 않을 불온함과 공격성을 유출한다.


이들의 작업을 단지 ‘흑인 노예제의 비극을 재현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미술’이라거나, ‘젠더 역할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페미니스트의 도발적인 작업’이라거나, ‘레즈비언-퀴어 공동체의 삶과 사랑을 다룬 기이한 회화’라고 일축하는 것은 (물론 대중적인 차원에서 이처럼 단순화된 이해는 피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이들의 작업을 가장 비생산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차라리 이들의 작업은 사회적 소수자의 고정되고 단일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배신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그들 자신이 속해 있다고 여겨지는 소수자 공동체 내에서의 합의된 규칙을 위반하는 골치 아픈 ‘스캔들’에 가깝다.


이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진지전(war of position)’ 개념에 영향을 받아 정치적 갈등과 적대를 전략적 기회로 간주하는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경합(agonistics)’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서 합의가 아닌 불일치를 강조하는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불화(La Mésentente)’와 같은 개념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찌 되었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재 방식을 대표/재현(represent)한다고 정의되는 다양성 예술의 예시로 등장하기에, 이들은 결코 적합한 예시가 못될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다양성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의 테두리를 침범하고 훼손하고 농담거리로 만들면서, 앞선 논증을 뒷받침해 줄 만한 어떤 쓸모도 상실한 ‘나쁜 예시’가 된다. 다른 모든 다양성 예술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아디나 핀틸리에(Adina Pintilie)

 <You Are Another Me - A Cathedral of the Body> 

59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 

La Biennale di Venezia <The Milk of Dreams> 

Courtesy the artist and La Biennale di Venezia




1. 카라 워커(Kara Walker)

인종주의적 맥락을 읽어내는데 익숙지 못한 국내 대중들에게 워커의 검은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 크기의 실루엣 파노라마는 어쩌면 페이퍼 아트(paper art)와 같은 수공예적 기법을 현대 미술에 이식한 재치 있는 시도 중 하나로 여겨지기 쉬울 것 같다. 멀리서 볼 때 그의 작업은 19세기 서유럽에서 유행한 연인들을 위한 그림자 초상이나 어린아이들을 위한 종이 연극의 초창기 형태에서 감지되는 서정적인 향수(melancholy)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러한 착시는 그가 허구적으로 재창조하는 흑인 노예제의 역사적 장면들 속에서 재현되는 난잡한 섹슈얼리티, 명랑한 폭력과 가학/피학의 역학과 같은 ‘어두운’ 주제들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에서 가능한 것이다.


‘오리기(cutting)’라는 단순하고도 유아적인 기법은 동시대적 미술의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도들에 비해 일견 친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워커의 실루엣들이 펼치는 경악할만한 “플랜테이션 가족 로망스”3)는 ‘오리기’의 섬뜩한 중의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오리기’는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는 행위인 동시에 무엇과 다른 무엇을 분리하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절단과 해체의 작업이기도 하다. 이 경우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분리되고 또 새롭게 창조된 것은 무엇인가? 거칠게 요약하자면 워커의 ‘오리기’는, 마땅히 ‘적합하게’ 재현되어야 할 흑인 노예제의 비극적인 역사라는 단일한 기원으로부터 흑인성이라는 정체성을 분리하는 경쾌한 가위질을 의미한다.


그의 검은 그림자들은 노예제의 결백한 피해자들이라기보다 오히려 발랄한 몸짓으로 “온갖 종류의 더러운 놈들이 분만, 비역, 식인, 똥먹기와 같은 난폭하고 음탕한 행위”들을 벌이는 “성적인 흑인 원주민들”4)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재현은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성적 환상에 복무하는 심각한 역사적 왜곡이자, 무엇보다 지난 세대의 흑인들이 겪은 억압과 고통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이런 이유로 워커의 작업은 흑인 공동체에서 여전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미끼’들은 분명 특정한 역사적 대상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고 세부가 생략된 검은 종이 그림자를 통해 작가는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하다. “노예제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흑인성의 토대로부터 분리한다면 흑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은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사라 루카스(Sarah Lucas)

 <Eating a Banana> 

1990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 the artist




2. 사라 루카스(Sarah Lucas)

YBA(Young British Artists) 세대 일원인 루카스는, 그의 말에 따르면 “야망 없는 노동자 계급”이었던 부모로부터 독립해 골드스미스 대학교(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 입학한 후, 1988년 그룹전 <Freeze>를 통해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다. 주로 일상적 사물을 성적인 농담처럼 배치하는 그의 작업에는 문학적인 은유나 우화적인 구조 대신 오직 보이는 그대로의 가슴(같은 것)과 성기(같은 것)가 놓여져 있을 뿐이다. 같은 시기에 유명해진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과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같은 작가들이 일견 ‘쿨’해 보이는 태도로 미술계 내부에서 ‘악동(punk)’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루카스는 단지 ‘다형도착적(多型倒錯的)’인 열정을 통제할 줄 모르는 유머러스한 ‘조각가’로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올해 60세인 그는 여전히 (초기 몇몇 작업과 마찬가지로) 의자에 놓인 하이힐을 신은 긴 다리에 풍성한 가슴들을 달아 놓은 일련의 조각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다. 2018년에 제작한 한 조각의 제목은 <젖보지아빠(TITTIPUSSIDAD)>인데, 1990년 그의 초상화 작업인 <바나나 먹기(Eating a Banana)>가 암시하는 노골적인 블로우 잡(Blow Job)과 마찬가지로, 거의 유아적인 수준의 성적인 농담을 뻔뻔스레 공중에 전시하기를 고집하는 그의 ‘노출증적’ 경향을 페미니즘 예술로 분류하기란 곤혹스러울 것 같다. 스스로도 밝힌 바 있듯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5) 그는, 비록 피억압자로서 ‘여성 계급’의 고통을 증언하는 페미니즘 예술에 속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관람객에게 “여성 조각가가 성적인 농담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난제를 던지는 데는 성공한다.


이는 (앞서 소개한 워커와 마찬가지로) 합의된 ‘여성성’의 외연에 생산적인 ‘어그로(도발)’를 투척하는 ‘못된’ 페미니스트의 실천일 수 있다. 다른 한편 루카스가 조각을 통해 가지고 놀기를 고집하는 대상인 ‘성적인 농담’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이론/실천에 있어 대단히 논쟁적인 주제가 된다. 먼저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지적한 바 있듯 가부장제 아래서 ‘보는 자(남성)’ 대 ‘보여지는 자(여성)’라는 구도는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시각적(또는 성적) 쾌락의 발생 과정에 개입한다. 이러한 대전제에 동의하는 한에서, 어떻게 여성이 성적 쾌락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타파하려는 성차별적 편견과 동전의 양면처럼 접붙어 있을 때, 어떻게 여성이 그러한 언어를 가지고 농담할 수 있겠는가? 루카스의 작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아닐지 몰라도 하나의 유용한 예시를 제공해준다. 요컨대 결코 성적인 것으로 농담하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니콜 아이젠만(Nicole Eisenman)

 <The Triumph of Poverty> 2009

 Oil on canvas 165.1×208.3cm Collection of 

Bobbi and Stephen Rosenthal, New York 

© the artist and Leo Keonig Inc




3. 니콜 아이젠만(Nicole Eisenman)

한때는 ‘퀴어’로 자신을 설명했으나 이제는 “보다 급진적인” 개념이 된 ‘레즈비언’으로 자신을 설명하기를 택했다고 말하는 아이젠만은 생략과 과장이 두드러지는 만화적 표현 방식을 통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애감이 느껴지는 기이한(queer) 장면을 묘사한다. 그의 2009년 작품인 <빈곤의 승리(The Triumph of Poverty)>는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성서적 우화를 다룬 회화인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The Blind Leading the Blind)>(1568)을 참조하고 있는데, 애당초 어디가 ‘승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구렁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한 무리의 이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리 쾌적한 상태 같지는 않다.


‘소경을 이끄는 소경들’은 물론이고 들쥐 떼와 개, 엉덩이가 앞에 달린 연미복 차림의 남자, 구걸하는 소녀와 빼빼 마른 흑인 아이, 주머니로 옷깃이 빠져나온 남자와 각양각색의 얼굴색을 가진 침울한 표정의 사람들 사이의 중심에 알몸의 코가 큰 운전사가 너덜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전진한다(또는 멈추어 있다). 외모로 짐작건대 어쩌면 ‘생물학적으로 희귀한’ 이들을 연기자로 내세운 유희적 볼거리였던 서구의 프릭쇼(Freak Show)의 단원들일 수도 있겠다. 오늘날 프릭쇼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철폐되어야 마땅한 백인들의 ‘부끄러운’ 악행으로 취급받지만, 동시에 프릭쇼의 기록으로부터 ‘불구자’의 자긍심을 발견하는 일라이 클레어(Eli Clare)와 같은 장애학 연구자의 관점 역시 존재한다.




Installation view of Sheree Hovsepian’s works

 59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 

La Biennale di Venezia <The Milk of Dreams> 

Courtesy the artist and La Biennale di Venezia




이러한 관점은 ‘불구 이론(crip theory)’이라 불리는데, ‘퀴어 이론(queer theory)’이 애당초 동성애자를 모욕하기 위해 사용되던 용어인 ‘괴짜(queer)’를 전유하고 (백인-남성-이성애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이론(theory)’과 결합함으로써 이성애 규범적인 학계를 향한 일종의 ‘반달리즘(vandalism)’을 개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구 이론’ 역시 같은 방식으로 모욕의 낙인 위에 자긍심의 훈장을 겹쳐 보기를 시도한다. <빈곤의 승리>가 재현하는 한 무리의 괴상한 인물들로부터 ‘자긍심’까지 읽어 내기는 무리겠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 작품의 경쾌한 색감과 단순화된 표현 방식으로부터 극화된 유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들은 퀴어이고, 불구이고, 빈곤하겠지만 그렇다고 매사에 진지해질 필요는 없으리라. 사실 이런 ‘비참한’ 존재들이야말로 생존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웃고 웃기는 법을 배운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그가 방탕하고 지저분한 퀴어-레즈비언 예술가 친구들을 자주 작품에 끌어들인다고 말했을 때,6) 그가 밝히려 했던 것은 바로 이처럼 ‘퀴어한’, 남들이 보기엔 틀림없이 ‘꼬인’ 유머 감각의 출처일 것이다.PA




니콜 아이젠만(Nicole Eisenman)

 <Long Distance> 2015 Oil on canvas 

165.1×208.3cm




[각주]
1) Hal Foster, The Anti-Aesthetic: 윤호병 외 옮김, 『반미학』, 현대미학사, 2002, p. 107
2) 위의 책, p. 106
3) Joan Copjec, Imagine There’s No Woman: 정혁현, 김소연, 박제철 옮김,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 도서출판b, 2015, p. 148
4) Joan Copjec, 위의 책, p. 148
5) “Tracey Emin, Sarah Lucas & Rachael Whiteread: Did feminism feature as a part of Young British Art?”, Chalk, chalkjournal.wordpress.com/2012/04/19/emin-lucas-whiteread, 2022년 9월 23일 접속
6)  towardcommoncause.org/artists/nicole-eisenman, 2022년 9월 23일 접속



글쓴이 이연숙(닉네임 리타)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으며, 블로그(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2021년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게시물이 없습니다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