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r | Art in P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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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 Made in Korea |
예술가를 위한 위대한 지침서에 부치는 글
최근 한국 미술 현장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미술 ‘판’을 둘러싼 예술가들의 즉물적 욕망을 전시하려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이미 2018년에 이 전시의 선행 과정 격으로 <부재중 전시>를 한 차례 치른 전력이 있었고, 당시 기획에서는 ‘전시 공간’을 전시하는 모양새를 갖췄던 것 같다. 이 두 전시 모두 ‘전시’라는 제도와 관행에 물음표를 던지고 참여 작가들 각자의 방법과 태도로서 그 물음에 관한 답을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시를 통해 드러냈다는 점에서 일종의 시리즈로 보일 법하다.
서문에 따르면 앞선 전시는 “오늘날의 전시들이 출판, 상연, 강연 등 다양하게 확장된 형태를 포함하면서 전시장의 범주화는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전시 제도를 비판하면서 전시장을 탈출한 미술의 행태는 이미 수많은 선례를 남겼으며, 새로운 시도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며 (언술했다시피) 그리 새롭지 않은 최근 전시 경향에 대한 소회를 밝히며, 오히려 텅 빈 공간을 전시함으로써 전시 공간의 ‘비어있음’ 그 자체를 드러내는 기획으로 연결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제목 또한 “부재중”인, “비어있는” 전시가 된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번 후속 전시에서도 이 선행 과정의 “빈” 전시 결과까지도 끌어안았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상상을 했다. “위대한 지침서”에 포함된 “빈” 공간으로서의 “앞선” 전시인 셈이니 패기 있는 말장난에 구멍을 하나 더 내는 것 같고 말이다.
이 전시가 가리키는 것은 예술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관행과 정치에 있다. 그래서 (갤러리 관계자의 말마따나) ‘위대함’은 예술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를 위한 ‘지침서’에 있는 것이다. 이 전시에는 이렇게 사뭇 엄숙하면서도 자조적인 냉소가 공존하는데 그런데도 참여 작가들의 모든 작품에는 마냥 웃어넘기기 힘든 진지와 패기도 있다. 저항과 냉소로 이 전시의 태도를 읽어내기엔 성실함을 장착한 고민과 완성도가 눈에 밟히는 것이다.
그래서 리뷰를 작성하면서도 이 전시를 하나의 태도나 감수성으로 단정하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이 전시와, 작가들과, 작품과, 미술판과, 한국 미술, 그리하여 K-예술 등을 곱씹게 되는데, 아마도 이런 나 자신 또한 그저 그런
미술-미술한 큐레이터-큐레이터 중 하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머쓱하고 민망하지만 내심 마음 한편에는 남민오 작가의 작품 <미술판>에서 어떻게
주사위를 굴려야 이 판에서 아예 벗어날 수 있는지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전시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여전히 아리송하기도 한데, 예술에 한목숨 건 그야말로 순도
100% 예술인의 예술-예술한 에고-트립 같다가도, 아 예술 그까짓 거 뭔데! 로 귀결되는 헛발악 같기도 하니 말이다. 적어 놓고 보니 전자의 경우건, 후자의 경우건, 너무나도 흔한 한국의 “미술인”임은
부정할 수 없겠다.
추신. 이 전시의 서문 격으로 쓰인 글 「영국의 왕은 로마의 황제가 되는 꿈을 꿀 수 없다」는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불안의 책』 일부를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했더랬다. “영국의 왕은 이미 왕이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것은 꿈꿀 수 없”고, 더욱이 “로마의 황제와 영국의 왕이라는 두 자리를 놓고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인용을 예술가에 빗대어 어떤 흥미로운 비유를 만들어보”겠다고 밝혔는데, 과문한 탓인지 어떤 지점에서 이 비유가 흥미로운지 따라가기가 힘들다. 성실하게 쓰인, 더욱이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장문의 전시 서문에서 영국 왕과 로마 황제의 거창한 비유는 이 전시에게도, 페르난두 페소아에게도 그다지 도움이 되어 보이진 않는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꽤 기발하고 패기 있는 전시를 스스로 기획해 낸 작가들이 ‘서문’이나 ‘비평’에 일갈하는 세 번째로 이어질 후속 전시를 기획한다면 어떤 전시가 펼쳐질까.
*남민오 <Likely Shining Telescope> 2020 아크릴판, 알루미늄 프로파일, 스틸 구성품, 삼각대 160×215×85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