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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의 에티카

a

Ethica of Decadence

‘타락하겠다’고 화끈한 결심을 하는 이는 많지 않지만 누구나 ‘타락’에 대한 막연한 로망은 갖고 있다. 굳이 성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야릇하고 미묘한 정황을 포괄하는 타락은, 그래서 영화와 문학,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그런가하면 “타락은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타락은 안정적인 질서, 정신분석에서는 쾌락원칙이라는 아이러니한 용어로 불리는 자아 방어적 시스템을 초과하는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위험한 행위이다.
● 기획·진행 편집부

폴 매카시(Paul McCarthy) 'WS' 2013 Image courtesy the artist Hauser&Wirth Installation view at Park Avenue Armory Photo: James E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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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아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보다 지속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 오히려 쾌락을 포기하는 현명함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타락을 거부하는 속성을 가지는 동물인데, 이것은 다른 모든 생물들이 자신들의 종의 보존을 위해 스스로 질서에 종속되는 현상과 동일하다. 흔히 말하는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이란 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인간의 자아는 사회의 인위적 실정법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자아의 현실원칙이라는 심리-방어적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타락은 ‘비인간적인’ 것이며, 아주 드문 경우에만 주체는 타락의 여정을 끝까지 추구하게 되는데, 특히 예술가들에게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왜일까?” 미학·철학자 백상현의 물음으로부터 이 기획은 시작됐다. 우선 미술과 타락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왜 작가들은 타락한 것에 이끌리는지, 작품에서 타락은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비롯해 ‘타락’이 미술로 재현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한 백상현의 글에 이어 타락을 모티브로 한 현대미술을 소개한다. 개념 혹은 미학적인 형식으로 나타나거나 대상, 사건이 되기도 하는 ‘타락’, 그 처연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빠져보자.



SPECIAL FEATURE Ⅰ

타락의 에티카_백상현 


SPECIAL FEATURE Ⅱ

타락, 그 처연한 아름다움_백상현 


SPECIAL FEATURE Ⅲ

매혹과 잔혹의 타락_정일주





지오반니 발리오네(Giovanni Baglione) 

<The Divine Eros Defeats the Earthly Eros> 

1602 Oil on canvas 183.4×121.4cm





Special Feature Ⅰ

타락의 에티카

● 백상현 미학·미술비평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 연구 이후로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도덕의 개념이 더 이상 고매한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문명이 다양한 관습과 법의 장치들 속에서 추구하는 윤리는 결국 문명 자체를 보존하려는 욕망, 즉 자아 보존의 쾌락원칙과 관련된 문제였다. 윤리란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면 평온함의 쾌락이 보장되는 문제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명의 윤리는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또한 보수적(방어적)이며 부조리하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한 삶을 깊게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환영적인 것이다. 


한편 같은 문제가 미술의 영역에서도 발생한다. 예술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제 아무리 고매한 수준의 쾌락이라 해도, 쾌락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껏해야 유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고전주의적 예술가들은 미술의 이미지가 진리를 겨냥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미술이 겨냥하는 진리는 전통적 윤리학자들이 겨냥하는 진리와 동일한 것이다. 양쪽 모두 쾌락에 봉사하는 환영적 진리를 겨냥할 뿐이다. 전통적 윤리학자와 예술가들은 결국 우리의 세계가 조화 속에서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가짜 진리와 그 이미지들을 생산할 뿐이었다. 그리고 주체는 이러한 이미지들의 그림자 아래서 필연적으로 소외된다. 


타락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은 윤리와 예술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검토로부터 요청되었다. 만일 고매한 도덕적 이상이 더 이상 윤리의 진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만일 조화로운 세계의 질서잡힌 이미지에 대한 예술적 묘사가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반대편의 일들 즉 타락한 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타락한 이미지들이 그려내는 세계의 뒤틀린 모습을 윤리의 차원에서 옹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시도가 윤리라는 개념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전회시킬 수 있지는 않을까? 나아가서 타락한 예술의 창조성이 가진 실천 윤리적 힘을 밝히도록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타락의 개념을 새롭게 다루고자 하는 필자의 연구는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라캉이라는 20세기 인문학의 한 흐름을 역시 20세기 미술의 아방가르드적 사건들과 연결지으면서, 예술의 실천과 윤리의 실천을 동시에 사유하려는 시도. 이것을 위해 필자는 라캉의 세미나 7권과 『에크리(Ecrits)』의 『사드와 함께 칸트를(Kant with Sade)』에 대한 세밀한 독해를 배경에 두었음을 밝힌다. 이것은 정신분석과 현대미술의 유사성을 텍스트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입장정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곳으로부터, 타락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불손한 모험을 이제 시작해 보도록 하자.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Ella> 

2007 Oil on canvas 40×31cm Private collection 

ⓒ Gerhard Richter 2014




타락에 대한 비난


1. 예술의 타락에 대한 최초의 비난: 플라톤 


예술의 타락을 비난했던 가장 오래된 글은 플라톤의 『국가(Politeia)』다. 플라톤은 신들의 세계를 타락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시인들에게 -소크라테스(Socrates)의 목소리를 빌어-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이와 같은 설화들을 중지시켜야만 되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사악함에 대한 심한 무신경을 생기게 하지 않을까 해서 일세.”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타당한 듯 보인다. 그가 비난하는 호메로스(Home ros)와 같은 시인들은 헬라스인들에게는 진리의 세계이기도 했던 ‘신들의 세계’를 욕정이 넘쳐나는 공간, 음모와 복수의 사악함이 넘쳐나는 욕망의 극장으로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포클레스(Sophocles)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타락, 근친상간의 드라마를 그려내고 있지 않았던가.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예술가들은 숭고의 미에 의존하여 악의 영역을 탐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의 타락은 주어진 선과 질서를 유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조롱하게 만든다. 



2. 예술의 타락은 나라를 망친다


플라톤은 예술가들이 생산하는 타락의 이미지들이 결국 국가의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국법 가운데 중요한 것들이 바뀌는 일이 없이 시가의 양식들만 바뀌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에다 위병소를 지어야만 할 것 같네”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을 언급했던 문명 최초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플라톤의 진정한 통찰은 시가의 내용들이 말하는 타락 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형식의 타락이라고 인식하는 데 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쏠리는 노래는 어떤 노래건 가인한테서 가장 새로이 흘러나오는 것이죠.”라고 말하는 『오디세이아(Odysseia)』의 한 구절을 언급한 뒤에,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예술 형식, 즉 “새로운 형식의 시가로 바꾸는 것을 나라 전반에 걸쳐 위험을 초래하는 것으로 여기고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플라톤이 간파한 것은 예술의 타락이 예술 자체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의 “성격과 관행에 조금씩 슬그머니 조용히 잠입해 들어올” 것이며, “이게 커져서 계약들 속으로 들어가고, 법률과 정체를 향해 옮겨가 모든 것을 뒤집어 엎기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플라톤 Politeia: 박종현 역 『국가』 서광사 2005 개정판). 



3. 우상금지


과연 예술의 타락은 플라톤이 말하듯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며, 인간의 개인적 존재 뿐만 아니라 국가 체제를 전복시킬 위력을 갖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타락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 속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교훈을 따르는 사회 시스템들을 수도 없이 발견한다. 회화를 비롯한 다양한 미술 제작 활동을 엄격히 통제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유로운 이미지의 생산이 신과 세계에 대한 관념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다(우상금지). 같은 이유로 이슬람교는 오늘날까지도 회화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는 미술대학이 없다). 한편, 르네상스 이후로 기독교적 통제로부터 이성의 통제로 그 권력이 이양되는 양상 속에서 등장했던 고전주의 미술은 수학적이며 합리적인 틀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것을 타락한 이미지로 비난했다. 19세기에 등장했던 마네의 회화에 가해졌던 온갖 모욕 역시 갖은 맥락이다. 과거 나치 독일이 <퇴폐미술>전을 열고 타락한 이미지를 제작했던 화가들을 조롱하고 억압했던 일, 한국의 군사 독재정권이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 보여주었던 광적인 검열의 역사 역시 타락한 이미지에 대한 체제의 알러지 반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스기모토 히로시(Sugimoto Hiroshi) 

<Hyena-Jackal-Vulture> 

1976 Gelatin silver print 119.3×149.2cm Edition 1/5 

Private collection Courtesy of the artist




4. 타락은 체제의 균열로 주체를 인도한다


이 모든 현상들의 이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아주 흥미로운 두 가지 사실이다. 먼저, 세계를 하나의 지배적 패러다임 안으로 가두려는 모든 총체화의 권력은 예술가들이 만들어 내는 (내용, 형식 모두에서의) 타락한 이미지들을 두려워하고 억압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타락한 이미지는 질서를 퇴락시키며, 그곳에 균열을 만들기 때문이다. 타락은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하여, 현재의 세계를 보존하는 질서 말고 다른 무언가를 욕망하게 만든다(위반). 타락의 오만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우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배적 시스템이 의존하는 전체성의 개념 또한 보다 근본적인 우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되려 폭로하려 든다(허무주의). 그리하여 타락은 주체를 체제의 중핵에 도사린 텅 빈 공허의 자리로 이끌어 간다. 증상으로서의 타락한 이미지는 우리를 실체로서의 진리가 아닌 공백의 간극-함정으로 유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배권력의 입장에서는 아주 위험한 일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다음의 것이다. 어째서 예술가들은 자신들에게 약속된 사회적 인정과 영광의 화려함을 포기하고 타락의 길로 나서는 것일까? 어째서 예술가들 중 몇몇은 금지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가? 정신분석적 용어로 말하자면, 어째서 예술가들은 그토록 쉽게 ‘죽음충동’에 노출되는가? 



5. 타락은 죽음충동이다


타락은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타락은 안정적인 질서, 정신분석에서는 쾌락원칙이라는 아이러니한 용어로 불리우는 자아 방어적 시스템을 초과하는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위험한 행위이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보다 지속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 오히려 쾌락을 포기하는 현명함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타락을 거부하는 속성을 가지는 동물인데, 이것은 다른 모든 생물들이 자신들의 종의 보존을 위해 스스로 질서에 종속되는 현상과 동일하다. 흔히 말하는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이란 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인간의 자아는 사회의 인위적 실정법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자아의 현실원칙이라는 심리-방어적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타락은 '비인간적인' 것이며, 아주 드문 경우에만 주체는 타락의 여정을 끝까지 추구하게 되는데, 특히 예술가들에게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왜 일까? 



6. 마취하는 아름다움과 자아 소멸의 공포


예술가들이 타락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들이 국가의 수호자들이나 -플라톤과 같은- 엄격한 철학자들 만큼이나 깊은 진리를 욕망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것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세미나 11권에서 아주 간단히 지나치는 표현으로 언급했던 내용에 주목함으로써 촉발되었던 연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라캉은 플라톤이 예술가들의 타락을 비난하고 그들을 국가에서 추방하고자 했던 이유가 예술가들을 진리에 대한 위협적인 경쟁자들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진리의 탐사에 있어서 국가의 수호자나 철학자보다 더 멀리 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름다움에 매혹당한 자들, 마취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세미나    7권에서 “아름다움(The beauty)이 선(The good) 보다 멀리간다”고 언급하면서, ‘선’의 개념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아름다움은 주체를 이끌고 간다고 암시한다. 그런데, 선이란 문명이 만들어낸 최종적인 한계-개념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를 세계의 허무로부터 보호해 주는 마지막 울타리이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한계의 지점, 즉 금지의 테두리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자신의 자아를 엄습하는 공포를 감당해야 한다. 위반하는 자는 자신의 자아를 지탱하던 의미-체계의 붕괴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락한 이미지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러한 자아의 소멸까지도 감당하게 만드는 탈-자아적 마취제의 역할을 한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매혹당한 타락한 이미지에 의해 세계의 한계 바깥으로 내던져지는 고난을 아름다움에 의지해 감당한다. 이 같은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성립시킨다. 즉, “예술가들의 타락한 아름다움은 상식적인 의미에서 타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어떤 가치 있는 장소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것. 그렇다면 ‘a. 타락한 이미지가 우리를 데려가는 그곳은 정확히 어디인가?’ 또는, ‘b. 어째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순수형식적 범주처럼 보이는 대상이 윤리라고 하는 ‘선’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는가?’ 혹은, ‘c. 예술가는 이러한 타락을 위해 어떠한 절차를 따르는가?’의 3가지 질문들이 앞서 제시된 명제로부터 흘러나온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해보도록 하자.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Installation view at Spruth Magers 




a. 예술의 타락한 이미지가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명백히 문명의 외부이다. 그러나 19세기의 서구 낭만주의자들이 원했던 그러한 상상적 외부, 또는 동방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내재적 외부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엄밀한 의미에서 클라인의 병과 같은 내부-외부의 역설적 폐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세계 관념은 우리의 고정관념이라 부를 수 있을 구조 속에 닫혀 있으며, 외부 역시 그러한 닫힌 구조 속에서 상상되는 외부일 뿐이다-엄밀한 의미에서 외부란 없다. 따라서 예술의 타락한 이미지는 이러한 폐쇄적 세계 질서가 균열을 일으키는 장소, 즉 기능장애의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것이 바로 내재적 외부의 장소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하는 역할이 바로 이것이었다. 현재의 세계 이미지의 조화로운 질서를 뒤틀어 균열을 생산하는 이미지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서 세계의 이미지-질서를 다시 창조해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타락’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성적 일탈이나 관습에 대한 도전 정도의 의미를 훌쩍 넘어선다. ‘타락’은 세계의 구조를 붕괴시키는 거대한 몰락과 폐허, 그리고 이어지게 될 또 다른 창조를 암시하는 개념으로 추구된다. 


b. 어째서 ‘미’의 순수 형식적 범주가 윤리라고 하는 ‘선’의 영역을 침범하는가?


앞선 a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연스레 두 번째 질문의 답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아름다움은 결코 순수형식적인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플라톤이 주장하듯이 ‘올바른 것’과 연결되어 있는 감각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조화로운 질서는 총체성이라는 상상적 이미지를 생산하고, 이러한 이미지는 질서의 궁극적인 이데아의 외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일관된 질서(플라톤이 일자라고 말하는 그것)에 의해서 지탱되는 세계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화’의 개념에 토대를 둔 ‘미’의 -고전적-개념이다. 그러나 라캉은 바로 이러한 올바른 것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뒤집으면서 미학에서의 전회를 시도했다. 7번째 세미나에서 라캉은 전통적 의미의 예술가들이 텅 빈 공백의 자리를 은폐하기 위해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공백의 가장자리에 정교하게 둘러싼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것’의 궁극적 진리가 부재하는 텅 빈 이데아의 자리를 은폐하기 위해서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제시한다는 것. 라캉이 보기에 ‘보수적인’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미’는 세계의 공허를 가리는 은폐의 이미지였다. 그것은 세계의 텅빈 심연으로부터 공포스런 ‘허무의 응시’가 출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가리는 스크린, 장막과 같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조화미를 추구했던 이유는 미학적 욕구가 아닌 쾌락-윤리적 욕구, 즉 공리주의적 욕구 때문이었다. 그들은 허무의 공포를 가리기 위해 선을 암시하는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했다면, 현대 미술가들이 보여주는 타락의 이미지, 일그러지고 퇴락한 듯 보이는 이미지들의 기능은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이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공백을 가리는 대신 오히려 공백을 가리는 세계 이미지의 표면에 균열을 생산해 내고 우리를 공백의 장소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조화미의 추구보다 한층 근본적인 윤리적 실천에 맞닿아 있다. 왜냐하면 텅빈 심연의 장소는 바로 우리 문명이 ‘올바른 것’ 또는 ‘선’이라는 인위적 관념으로 채우고 은폐하려 했던 윤리의 0점, 모든 윤리가 시작되는 사유의 바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윤리적 실천이란 바로 윤리 자체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의심, 즉 신경증적 미덕의 극단적 실천이어야 한다. 


따라서 a의 답과 b의 답을 조합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진다. 타락한 이미지가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문명의 한계점인 선 또는 올바름이라고 하는 테두리의 외부이다. 그곳은 문명의 껍데기가 뒤틀리면서 출현하는 균열의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곳에 도달하면서 주체는 자신의 자아를 지배하던 도덕관념의 허구적 완결성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하여 주체는 주어진 윤리적 개념들을 채우고 있던 의미들을 비워내는 윤리적 실천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절차들을 지배하는 불안과 공포의 심리적 압박을 타락한 아름다움의 매혹이 마취시킬 것이다. 이미지의 매혹은 문명으로부터의 파문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갖기 때문이다. 한편, 마지막 질문 ‘c. 예술가는 이러한 타락을 위해 어떠한 절차를 따르는가?’에 대한 답을 위해서 우리는 타락의 개념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글쓴이 백상현은 파리 8대학에서 2010년 라캉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한국의 다수 대학에서 ‘유령’이라는 테마와 함께 미학과 미술비평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라캉미술관의 유령들』(책세상, 2014)이 있다. 




앨런 존스(Allen Jones) <의자(Chair)> 

1969 Mixed media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 Allen Jones





Special Feature 

타락, 그 처연한 아름다움

● 백상현 미학·미술비평가



타락의 개념과 사례

모호성, 결정불가능성, 공(空)의 매혹, 환멸


1. 고전주의의 선명성


타락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적인 의미에서의 타락’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과도한 성적 일탈이 타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여자가 여러 남자와 성적 관계를 갖는 애정편력을 타락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그러는 것이 타락으로 비추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합법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애정편력이 타락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귀족 남자가 배우자 이외의 첩을 들이는 것을 타락이라 보지 않았으며, 왕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수컷이 후계를 생산한다는 적법한 목적이 성적인 행위의 초과를 적법한 것으로, 즉 타락이 아닌 것으로 보장해 준다. 신들의 세계를 성적인 일탈의 장소로 묘사했던 시인들을 비난했던 플라톤조차 강한 종자들을 키워내기 위한 성적 일탈을 오히려 건강한 행위로 간주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그의 ‘우성종자 국가론’에서 확인된다. 


플라톤은 『국가』의 5장에서 ‘처자의 공유’라는 개념을 가정한다. 이것은 한 나라에서 가장 건강하고 머리가 좋은 ‘빼어난 남녀’를 격리시키고 이들에게 자유로운 성관계를 (배우자에 상관 없이) 가능한 자주 갖도록 장려하여 순수한 종자들을 많이 낳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자유로운 성관계 속에서 아이들이 태어났으므로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 특히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없게 되지만, 바로 그런 무지가 아이들을 개인의 소유가 아닌 국가의 소유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즉, 빼어난 남자들이 빼어난 여자들을 성적으로 ‘공유’하면, 이들로부터 태어난 ‘빼어난 자식들’은 자신들의 가족이라는 사사로운 집단이 아닌 국가 공동체를 위해 빼어난 능력을 사용하게 되며, 그리하여 국가는 번영한다. 반대로, 건강하지 못한 남자와 여자들은 성적인 접촉을 제한해야 하며, 근친간의 성관계도 금지하여 ‘열성의 종자인 사생아가 태어나는 것을 통제한다.” 만일 이러한 열등한 관계 속에서 아이들이 태어날 경우 격리시키는데, 이러한 격리는 ‘영아 살해’를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생각하는 타락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즉, 열등한 존재를 파생시키는 모든 행위가 타락이며, 이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반대로, 우월한 종자, 모든 면에서 명확한 효율성을 보이는 종자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허용될 수 있다. 일견 엽기적으로만 보이는 이와 같은 우성교배론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합법적 목적을 위한 성적 일탈은 결코 일탈이 아니며, 오히려 아무리 사소한 일탈이라 해도 그것의 목적이 불분명할 경우 그러한 행위는 타락으로 간주된다는 것. 여기서의 ‘합법성’은 해당 사회의 지배적 패러다임, 즉 지배적 고정관념이 규정할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Night hawks> 

1942 Oil on canvas 84.1×152.4cm 

Art Institute of Chicago




2. 모호성: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따라서 진정한 타락이란 사회적 질서의 선명한 틀을 위협하는 것으로서의 불명확성 즉 모호성이다. 어떤 행위의 결과가 명백히 ‘좋은’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그것은 장려될 것이다. 반대로 어떤 행위의 결과가 명백히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것 역시 (장려되지는 않을 지라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명백한 악은 그것을 포획하여 길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갖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호한 것들이다. 둘 사이에 걸쳐진 어떤 (비)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매춘은 타락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춘부의 존재는 명백히 타락에 근접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것은 남성들의 성적 일탈을 사전에 막아주는 필요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위는 사회적 질서의 관점에서 명백히 그 정체성이 확인된다. 


진정한 타락은 그보다는 유부녀의 탈선과 같은 것, 혹은 근친상간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타락은 한 사회의 의식적 언어들이 명명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위험한 곡예를 벌이는 일탈들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진정으로 위험한 타락은 타락하고 있는 존재들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협소한 언어로 한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 예를 들어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정부와 같이 사회-정치적 설득력이 협소한 권력이 사회를 지배할 때에 보다 많은 존재들을 타락한 것으로 과잉반응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반대로 포괄적 정당성을 확보한 민주 정체가 일탈에 관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같은 사실들에 근거해서 우리는 타락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된다. ‘타락’이란 선명한 의미의 지배에 저항하는 모호함, 불투명성의 투쟁이라는 것. 자신의 정체성이 이미 주어지고 강제된 지배적 언어로 포착되는 것에 대한 모든 저항은 체제의 선명한 질서를 위협하는데, 타락은 바로 이러한 저항에 부여되는 부정적 보통명사이다. 



3. 결정불가능성: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따라서 진정한 타락은 현재의 지배적 권력이 판가름할 수 없는 것,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용어를 쓰자면 ‘결정불가능한’ 이미지들 속에서 출현한다. 진정한 타락은 현재의 고정관념이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이미지 속에서 등장한다. 물론 지배적 관념은 이러한 애매함을 즉각적으로 나쁜 이미지, 불법적 이미지로 판결하는 순발력을 보여줄 것이다. 바디우는 이것을 ‘동음이의어 속에서의 고난’이라고 부른다. 타락의 대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찰되고 가치부여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타락한 것으로, 구조의 입장에서 보여지는 부정적인 것으로, 즉 악으로 판단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같은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박탈당하는 고난 속에 있다.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L’etre et evene ment)』: 성찰 20 참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타락은 언제나 여성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아버지의 법-질서의 유한한 한계 영역이 아닌 무한의 영역, 공백의 영역으로 개방된 장소가 발산하는 부정적 이미지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결정불가능한 이미지에 대한 충동은 진리에 대한 거식증으로부터 발생한다. 너무 많은 진리를 보려고 하는 자는 결국 주어진 세계의 가상적 진리-이미지들을 모두 먹어치우는 (이미지의) 폭식증 뒤에도 여전히 진리를 욕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충동은 존재하지 않는 진리, 즉 공백의 영역에서만 확인되는 진리(부재)를 먹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거식증이다. 폭식증에서 거식증으로의 이행은 과도하게 진리를 욕망하는 죽음충동의 발전단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은유한다. 이미지에 대한 거식증의 사례를 보여주는 현대미술로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들이 있다. 


리히터는 이미지를 흐리게 만들면서 고전주의적 선명함을 거부한다. 우리가 하나의 사물이 가진 본질적 의미를 집중하여 보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응시 속에서 초점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지 외관만을 보려고 할 때 이미지는 선명함 속에서 출현하지만, 그러한 외관을 넘어서려고 하는 순간 이미지는 초점을 상실한다. 리히터는 바로 이러한 순간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주어진 세계의 선명함을 거부하고 대상의 세계 속 좌표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는 포커스 속에서 이미지를 그려낼 때 그것은 불투명성, 즉 결정불가능함 속에서 그려진다. 리히터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결정불가능함의 매혹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여기서 관객은 세계의 선명한 질서 말고도 다른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어느새 죽음충동의 위험한 영역으로, 타락한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반면에, 스기모토 히로시(Sugimoto Hiroshi)의 사진 작품들은 이미지의 폭식증을 보여준다. 셔터의 속도를 극단적으로 느리게 하여 장시간의 노출로 이미지를 과다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세계의 풍경을 모두 먹어치우려는 욕망, 그리하여 진리 자체를 삼켜버리려는 욕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와 같은 욕망의 결과는 역설적이다. 작품이 보여주는 최종적 이미지는 텅빈 공허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이미지를 먹어버린 사진기는 텅빈 공백이 이미지들의 최종적 보편성이라는 사실, 즉 진리에 대한 폭식증은 필연적으로 공백만을 먹게되는 거식증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스기모토 히로시, 이 두 작가의 작품들은 그런 식으로 대화한다. 


이들은 플라톤적 고전주의 미학이 뒤집히는 지점, 즉 타락한 이미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인 공백을 출현시키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이미지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타락한 지점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타락한 자들, 즉 탕아들이 도달하는 마지막 삶의 단계와 너무도 흡사하다. 그곳은 텅 빈 공허, 환멸의 지점이다. 그곳에서 탕아는 세계의 질서에 의존하지 않는 자신만의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받는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결정불가능해진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결정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다름 아니다.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Painting of the Group Members> 

1926 Oil on canvas 




4. 공(空, void)의 매혹


결국 예술에 있어서의 타락이라는 위험한 여정은 매혹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죽음충동에의 동경이다. 타락은, 바디우가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를 찬미하며 언급했던 것처럼, 공백의 ‘심연 위를 떠도는 깃털’에 유혹당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토대 없는 아름다움, 모든 것을 앗아갈 수도 있을 위반의 매혹에 자신을 맡기고 그것을 ‘저 높은 곳에 있을 별처럼’ 사유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매혹을 다루는 예술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타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술가를 매혹시키는 것은, 그리하여 다시 관객들을 매혹시키게 될 그것은 타락이 겪게 될 비난의 고통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매혹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공(void)의 매혹이다. 공의 매혹이란 세상을 결정가능한 것들의 장소로 지탱해 주던 질서를 파괴하는 죽음충동의 광포함이 도달하게 되는 폐허의 장소, 텅빈 공백의 연안가인 그곳이 간직한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째서 매혹적인가? 텅빈 것은 어째서 아름다운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매혹 중에서 최고의 매혹이 공백으로부터의 그것인 이유는 텅빈 장소가 질서에 대한 주체의 원한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타자의 것인 법과 질서가 주체를 소외시켰던 것에 대한 원한이 공백의 파괴적 매혹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혹의 악마적 속성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공의 매혹을 이해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모든 매혹은 악마적인 것이며, 최고의 매혹은 가장 그러하다.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는 순간의 본질적 의미는 그러한 아름다움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토대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의 차원, 아름다움의 기능들은 그렇게 파괴적 속성으로 가득 차 있다. 올바른 것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플라톤은 절반만 정확했던 것이다. 올바른 것이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선을 초월한다. 그것은 선의 한계를 너머서 그것이 시작된 악마적 장소, 문명의 폐허, 공백의 연안가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단계를 갖는 위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우리를 법과 질서의 단계에 머물게 할 수도 있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초과로 이끌 수도 있다. 법과 질서의 단계에 머물렀을 때, 아름다움은 세계의 조화에 감탄한다. 그러나 이것을 초과하면서부터 아름다움은 텅빈 것의 투명함에 감탄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악마적 아름다움으로 무엇을 하면 좋은가? 이에 대한 대답을 현대미술, 특히 아방가르드 미술은 이미 제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름다움을 매개로 환멸의 장소에 도달해야 하며, 그런 뒤에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미학의 정언명령이다.  




 에밀 놀데(Emil Nolde) <Emil Mask Still Life III> 

1911 Oil on canvas 74×78cm

 Nelson Gallery of Art Atkins-Museum Kansas City  




타락의 절차 


1. 매혹에서 환멸로: 사드와 미니멀리즘


앞에서 제시된 미학의 정언명령은 타락이 절차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의 처음은 매혹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환멸이다. 타락한 주체가 매혹 속에서 도달하는 장소는 그의 세계를 지탱하던 모든 환상이 무너진 폐허의 공간, 공백의 연안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폐허의 원인은 타락한 주체 자신에게 있다. 그 또는 그녀의 욕망이 세계-질서의 파괴를 원하지 않았던가? 타락의 주체가 탐닉하던 죽음충동의 매혹은 타락한 주체의 자아-몰락의 원인이다. 주체는 그렇게 해서 자아의 몰락과 대면한다. 자기 자신이기도 했던 세계의 이미지가 폐허 속에서 텅빈 공허의 자리를 드러내는 것을 대면해야 한다. 이제 주체는 어느 누구도 아닌 자, 그리하여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자가 된다. 


라캉이 『에크리』의 「사드와 함께 칸트를」에서 -프로이트적 그것이 아닌- ‘진정한 승화’라고 이름붙였던 윤리의 궁극적 단계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가짜 질서의 파괴를 수행하면서 추구되었던 도착적 성욕의 끝에 도달한 사드 후작의 환멸. 사드가 감옥에서 써내려간 유언장에서 언급된 소멸의 개념. 자신의 묘비명 조차 덤불에 가려 사라지도록 하라는 최후의 명령은 결국 라캉-사드적 윤리의 정언명령을 정립한다. 그것은 “자아의 소멸을 욕망하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멸의 윤리학을 가장 충실히 수행했던 예술이 바로 미니멀리즘이었다. 


미니멀리즘의 핵심은 모든 조형적 요소들의 수를 최대한 축소시켜 간결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은 최대한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축소시켜서 그것의 수렴점인 공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은 그리하여 미술 자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단계에 까지 도달하는 (비)예술이다. 예술의 모든 장치들을 소멸시키고 작가의 주체성(천재성) 마저 폐허로 만든 뒤에 작가와 관객의 영역을 뒤섞어 버리는 극소화의 절차는 예술의 소멸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출발을 정립하는 타락의 윤리학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미지에 매혹당하고, 퇴락하고, 그리하여 자아 소멸의 자리에 도달한 관객은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는 가능성의 형상, 즉 공백의 형상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오토 딕스(Otto Dix)

 <Self-Portrait as a prisoner of war> 

1947 Oil and tempera on panel 49.5×73.6cm 

Courtesy of Detroit Institute of 




2. 일상생활의 타락 윤리 


타락이라는 개념에 대한 논증은 우리의 삶을 토대짓는 지배적 관념틀, 즉 고정관념의 절대적 권력을 의문시하고, 그것의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세계 이미지들의 합법적인 연결 속에서 보장되는 관념의 틀-구조는 그것이 아무리 올바른 것이라 해도 결코 초월적인 진리 일 수 없는 문명의 산물에 불과하며, 이러한 산물로서의 속성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따르는 주체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주체성을 상실한 채로는 윤리적일 수 없으며, 반면 구조는 필연적으로 주체성의 출현을 견딜 수 없어 한다는 사실이다. 윤리는 주체의 자율성을 조건으로 해서만 실현되는 것인 반면에 구조는 주체의 자율을 억압함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안정성이기 때문이다. 


구조와 주체는 이처럼 대립적이지만 또한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출현조차 할 수 없는 역설적 관계 속에 있다. 따라서 만일 구조의 지배 기능이 정지되는 지점을 타락의 순간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결정적으로 우리는 타락이 주체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해서, 타락이란 구조의 지배가 억압하던 주체성이 증상처럼 출현하는 순간에 대해서 우리의 초자아가 부여하는 부정적 명명이다. 구조의 지배 속에서 우리의 자아는 이러한 타락의 이미지를 거부하기 마련이다. 오직 예술의 아름다움 속에서, 또는 사랑의 욕망 속에서, 혹은 정치적 반항의 죽음충동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타락에 기꺼이 자신을 던진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논의는 타락의 바로 그러한 차원, 즉 창조성의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차원에 대한 변론이었다.  



글쓴이 백상현은 파리 8대학에서 2010년 라캉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한국의 다수 대학에서 ‘유령’이라는 테마와 함께 미학과 미술비평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라캉미술관의 유령들』(책세상, 2014)이 있다. 




윌 코튼(Will Cotton) <Consuming Folly> 

2006 Oil on Linen 182.88×243.8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Mary Boon Gallery





Special Feature 

매혹과 잔혹의 타락

● 정일주 편집장



“나는 여성의 육체만을 구속할 뿐이다. 왜냐하면 여성의 마음은 구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과 일본 전통의 에로티시즘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가 아라키 노부요시(Araki Nobuyoshi)는 언젠가 이 같은 말을 내뱉었다. 원초적이지만 그 어떤 군더더기도 붙지 않은 그의 표현이 어쩌면 타락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 정확한 이유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 사랑과 분노만큼, 질펀하게 흐트러진 타락은 미술이 사랑하는 주요 소재 중 하나이다. 작가들은 각자의 형식에 맞춰 그것을 있는 힘껏 은유하거나 그 무엇보다 사실적이며 천박하게 구현해 낸다. 피와 살, 끈적한 액체가 뒤엉켜 있어도 타락을 소재로 한 작품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듯’ 극도로 타락한 것엔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가보지 못한 곳을 동경하듯,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은 매혹적이다. 타락이란 감히 체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쯤은 느껴보고 싶은 열망을 자극한다. 나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평가 따윈 아랑곳 않은 채 함부로 망가지고 싶은 찰나는 수시로 존재하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타락을 작품의 주제로 다루는 작가가 수없이 많은 이유이다. 이리나 이오네스코(Irina Ionesco)는 친딸의 누드를 다뤘다는 점에서 극도의 지탄을 형성한 인물이다. 루마니아 사진가 이리나는 아주 어린 딸 에바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서너 살 정도의 에바는 맑고 천진한 모습이 아닌 신비스럽되 퇴폐적인 분위기로 화면에 등장했다. 망사로 된 옷을 걸치고 붉은 입술을 칠한 채, 다리를 벌린 여자 아이. 그물 스타킹을 신고 여성을 노출한 에바.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전에 어머니의 렌즈 안에 그녀는 섹슈얼한 피사체로 인식됐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엄청난 논란을 낳았다. 1970년대의 일이다. 지금보다 훨씬 성 산업에 대한 경계가 약했고 반면 어린 아이를 성적대상을 삼는 사실엔 무지했던 때였다. 심지어 소아성애자 조직망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릭 토르 샌드버그

(Erik Thor Sandberg) <House> 

2009 Oil on panel 60×60inches 

ⓒ Erik Thor Sandberg courtesy CONNERSMITH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성장기는 송두리째 도둑맞은 셈이었다. 어린 딸을 대상으로 극도의 타락을 선보인 작가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많은 부를 얻었다. 반면 에바는? 그녀는 어머니의 작품 덕에 최연소 『플레이보이』지 모델로 한때 관심을 끌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는 자신의 삶과 어머니를 원망하기 이르렀다. 급기야 지난 2012년 어머니를 상대로 법정 공방을 벌였던 에바는 자신의 실화를 장편영화 <리틀 프린세스(Little Princess)>로 고스란히 담아낸 바 있다. 타락, 퇴폐미의 정수를 선보이는 아라키 노부요시는 성, 누드, 노예, 죽음 등 금기시된 주제에 집중하는 작가다. 그의 사진 속 여인들은 때로 반 누드의 차림으로 줄에 묶이거나 천장에 매달리고, 성기를 드러내고 자위를 하는 모습이며, 때로는 유혹하듯 실크 기모노로 몸을 감싸고 있다. 에도시대의 춘화, 이 전통적 성애 미술을 기원으로 삼아 현대적으로 업데이트 시킨 그의 작품엔 포르노그래피, 여성혐오증 같은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다. 파격적인 작업이기에 그는 수많은 일화를 생성했다. 




고트프리드 헬름바인

(Gottfried Helnwein) <Epiphanie III> 1998 

Oil and Acrylic on Leinwand Collection 

Barry Friedman New York ⓒ VBK Wien 2013




1988년 경찰은 아라키의 사진 작품을 실었다는 이유로 잡지 『사진시대』의 판매를 금지했고, 1992년에 열린 전시로 인해 너무 외설스럽다는 비난이 아라키에게 집중 투하됐다. 또 1993년에는 누드 사진 작품을 전시했다는 이유로 화랑의 큐레이터가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게이, 레즈비언, 에이즈환자 등을 주인공으로 삼은 낸 골딘(Nan Goldin) 또한 타락의 정수를 작품으로 선보인 작가다. 동성애라는 주제만으로 타락의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보편적이지 않을 뿐, 그 자체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졌다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허나 낸 골딘은 극단적인 인간상을 파격적으로 등장시킨다. 1953년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나 보스턴에서 성장한 그녀는 11세 때 언니가 자살한 후 14세에 집을 떠나 그 이듬해부터 여장 게이들과 생활하며 이들의 삶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 속 등장인물은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극단적인 삶을 살아가는 1980년대 언더 문화의 상징적 존재들이었다. 대표작 <성적 종속물에 관한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1986) 등 마약을 들이키거나 섹스에 빠져있는 따위의 축축한 화면들은, 현재 시대를 증언하는 뛰어난 기록이자 한 개인의 증거이며 시각적인 일기로 평가받고 있다. 




헤르난 바스(Hernan Bas) 

<Downhill at Dusk(the Runaway)> 

2013 Graphite and watercolor on paper 

18×24inches




동성애를 다루는 작가는 또 있다. 퇴폐적 관능미를 아련하게 묘사하는 헤르난 바스(Hernan Bas)가 그 주인공이다. 미술 뿐 아니라 문학과 영화 등에서 인용한 풍부한 이야기를 특유의 장식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구현하는 그의 작품에는 가녀린 ‘소년’, 혹은 ‘소년들’이 등장한다. 화면 속 인물들은 지극히 온순하지만 곧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를 뉘앙스를 풍기며 긴장감을 선사한다. 어린 소년들은 진짜인 것 같은 세계에서 각자의 일을 도모하고 있다. 허나 이 풍경들은 인공의 공간이다. 헤르난 바스는 이들이 놓인 곳이 가짜임을 눈치 채도록 막대기로 된 지지대를 눈에 띠게 배치한다. 그가 구사하는 이야기는 어떤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몰두한다. 일례로 작품 <다윗과 골리얏-드 쿠닝의 스튜디오, 뉴욕 이스트 햄튼(David & Goliath-de Kooning‘s studio, East Hampton NY)>은 추상표현주의 거장 윌렘 드 쿠닝에 대한 작가의 오마주로 만들어졌는데, 그는 드 쿠닝의 작업실 이미지로 화면을 구성한 후 그에 대한 찬미와 동시에 미묘한 질투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한 소년이 드 쿠닝 작업실의 창문을 새총으로 깨는 상상을 덧붙였다. 


그의 그림은 타락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진 않지만 언제든 타락의 저 끝으로 빠져들 것 같은, 일탈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1975년 생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작가 에릭 토르 샌드버그(Erik Thor Sandberg) 또한 신초현실주의 회화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타락을 경험케 한다. 그의 각 작품은 마치 관람객과 작가 사이의 대화를 시도하듯 접근한다.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이러한 대화들은 다양한 질문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 내리려는 시도다. 이미 관념화되어 존재하는 상징이나, 개인적인 상징성을 사용해 샌드버그는 규정된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데, 그 표현이 자극적이다. 벌거벗은 여성이 안고 있는 동물들은 과격한 상상을 야기하고 시간으로부터 고립된 순간들은 잔혹할 만큼 무섭다. 그는 집행 유예된 시간을 창출한 채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자제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재난과 고통의 이미지 속에서 주인공의 동작과 형체만을 더 강조한다. 이런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한 모습 표현을 통해, 작가는 인간내면과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AES+F <Allegoria sacra 1ch> 

Video still #1-33




러시아 아티스트 콜렉티브 AES+F는 어떤가. 국적을 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이 미술그룹은, 1987년 타티아나 아르자마소바(Tatia na Arzamasova), 레브 에브조비치(Lev Evzovit ch), 에브게니 스뱌츠키(Evegeny Svya tsky)가 의기투합해 모인 후 1995년 블라디미르 프리드케스(Vladimir Fridkes)가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합류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사진과 영상 등 디지털 작업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는 그들은 전쟁과 아름다움을 읊고 폭력을 명시적으로 탐구하는데, ‘현대사회에서 폭력은 공포이며 동시에 욕구의 만족’임을 피력한다. 이러한 그들의 화법은 종종 ‘컬트’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AES+F는 대중적 인지도 또한 획득했다. 그들은 매끈한 미소년, 소녀들이 폭력적인 행위를 일삼는 영상을 바그너의 웅장한 음악과 매치시킴으로써 묘한 미적 쾌감을 선사했고, 대단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앞서 나열한 두 작가가 타락, 즉 욕망과 쾌락을 은유적으로 다뤘다면 작가 윌 코튼(Will Cotton)은 전혀 다르다. 그는 호화롭고 달콤한 세계, 푹신한 분홍빛 구름과 과자로 지은 집, 캔디 나무, 초콜릿과 마시멜로우가 가득하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이데아의 숲에 육감적인 비너스들을 풀어놓음으로써 직설적이며 원초적으로 감각을 과시한다. 이상과 환상의 집합체로 그림을 완성하는 그는 모든 욕망을 극대화시켜 타락의 최고조를 재현한다. 


욕망에 의례 수반되는 대가는 아랑곳 않고 그저 탐닉하는 것에만 열중하는 것이다. 그의 낙원에 존재하는 모든 이상들은 솔직하고 거침없는데, 이렇듯 우리 내면에 자리한 음습한 욕망을 들춰내는 까닭에 대중들은 윌 코튼의 그림에 열광한다. “문명이 다양한 관습과 법의 장치들 속에서 추구하는 윤리는 결국 문명 자체를 보존하려는 욕망, 즉 자아 보존의 쾌락원칙과 관련된 문제였다. 윤리란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면 평온함의 쾌락이 보장되는 문제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명의 윤리는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또한 보수적(방어적)이며 부조리하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한 삶을 깊게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환영적인 것이다.”는 백상현의 말처럼, 윤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타락은 결코 추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술과 타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필연적 타락을 이야기하는 작가들, 그것을 전혀 색다르게 표현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끝나지 않는, 네버 엔딩 스토리다.   




이리나 이오네스코

(Irina Ionesco) <Eva Ionesco>

 Photograph ⓒ Irina Ion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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