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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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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saekhwa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에서 발생한 미술 경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 ‘단색화’, 최근 이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미지를 그리는 대신 단일한 색조로 작업을 반복해 표현하는 이 추상기법은 모노크롬 혹은 회화 자체의 정의와 구분되며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해 왔다. 중간 색조의 배경, 반복적인 무늬, 표면 위의 찢겨진 흔적들은 의도적으로 기존의 해석 방식을 피해가는 작품들을 탄생시켰는데, 사물과 회화 사이를 오가는 단색화의 추상성은 평면적이기 보다는 입체적이고, 회화적이기 보다는 실험적이며, 순수하게 미적이기 보다는 개념적이어서 서구는 물론 아시아 내 다른 나라에서도 ‘아직 보지 못한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 기획·진행 정일주 편집장

국제갤러리 아트바젤2014 설치전경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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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분명한 영역을 확립하고도 ‘옛 것’으로 인식되던 작품과 작가들에 최근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자 “서구 미술계의 입맛에 따른 유행”이라거나 “상업적 붐 업”이라는 비판도 따르는 것이 사실. 모노크롬 회화, 모노톤 회화, 단색평면 회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 ‘단색화’란 고유명을 표기한지 불과 몇 해 만에 예상치 못한 호황과 염려를 한꺼번에 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한국에서 비롯된 가장 국제적인 미술 운동으로 인정받는 단색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행을 뒷받침만할 담론이 없다”는 누군가의 지적엔 뭐라고 정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이때 마침 서울 한복판에 대규모의 단색화 기획전이 열린다. 국제갤러리가 1, 2, 3관을 통틀어 오는 10월 5일까지 <The Art of Dansaekhwa>를 선보이는 것이다. 이에 「퍼블릭아트」는 이 전시를 총괄 기획한 윤진섭을 비롯 알렉산드로 먼로 구겐하임 미술관 아시아 미술부 큐레이터와 사이먼 몰리 미술평론가의 글을 통해 “왜 단색화에 집중하는가?” “단색화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알아본다. 이 특집이 단색화에 대한 담론과 의제를 마련하길 바란다.  



SPECIAL FEATURE Ⅰ

단색화의 세계: 정신·촉각·행위_윤진섭 


SPECIAL FEATURE  Ⅱ

추상의 윤리성, 또는 서양의 관점에서 본 단색화의 발견_알렉산드라 먼로


SPECIAL FEATURE 

시각적 촉감과 단색화_사이먼 몰리 





하종현 <접합 78-4> 1978

 마포천에 유채 160×120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Special Feature Ⅰ

단색화의 세계: 정신·촉각·행위

● 윤진섭 큐레이터·미술평론가



Ⅰ.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1)는 일종의 ‘초혼(招魂)’과도 같다. 그것은 한국의 혼을 오늘 이 자리에 불러내는 일이다. 그 의식(儀式)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되풀이 될 수 있는데,2) 바로 그것이 한국의 단색화가 비단 70년대에 성행한 미술 운동에 그치지 않고 오늘 다시 되살아난 이유일 것이다. 1970년대의 단색화는 훗날 장성하여 미술대학에 진학한 나의 체험과 맞물려 있다. 70년대 중반, 홍대 서양화과 학생이었던 나는 당시 전위그룹으로 명성을 날리던 <S.T>의 멤버로 여러 전시회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등 단색화 작품들이 많은 대형 전시를 보며 학생이자 작가로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제 3공화국의 엄혹한 군부통치 하에서 단색화와 같은 ‘침묵의 언어’가 탄생한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시절, 장발에 수염을 길렀던 나는 어쩌다 시골 고향집에 다녀오기라도 하면 버스가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진입하기 직전, ‘반포’ 검문소에서 마주치는 경찰의 검문이 두려워 가슴을 졸이곤 했다. 그 무렵 장발 단속은 여자들의 미니스커트 단속과 함께 경범죄의 주 메뉴였다.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으로 대변되는 민주화에의 열망은 대학가의 소요를 불러왔고 잇단 계엄령과 위수령의 선포는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70년대 단색화 운동의 중심인물인 박서보는 70년대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미협(한국미술협회의 약칭)의 국제담당 부이사장(1970-77)과 이사장(1977-80)의 직함을 통해, 국제전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협의 막강한 조직력을 등에 업은 그는 1972년에 무심사 전시회인 <앙데팡당>전을, 1975년에는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등 실험미술 계열의 대규모 전시회를 연이어 창설했다. 단색화의 주 무대가 된 이 전시회들은 당시 전위내지는 실험미술 계열의 작가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인도트리엔날레, 방글라데쉬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 세계 유수의 국제전 참가 작가들을 선정하는 중요한 장(場)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작가가 되기 위한 주 등용문인 국전의 위세가 사그라들기 전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초반에 박서보가 미협을 장악하면서부터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급증, 언론도 힘이 쇠약해진 국전보다는 해외 국제전 쪽으로 점차 보도의 방향을 바꿔가고 있었다. 이 무렵의 사정에 대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이우환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나의 입장에서 단색파를 서술하자면, 72년 <앙데팡당>전을 본 야마모토와 그를 내세우는 나카하라, 그들의 통로인 나를 데리고 서울의 대장격인 박서보 선생이 앞장을 섰고, 서울 명동화랑이 거점이 되어 단색화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기 발견의 충동질이었고 그 계기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말이지 다른 뜻은 없다. 간절한 잠재성의 꼬투리에 외부의 충동질로 불이 붙자 폭발적, 집단적 양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국내 쪽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박서보 선생의 존재와 역할 없이 단색파는 거론 될 수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현실과 소외된 비제도의 상황을 무릅쓰고 가냘픈 내외 동풍을 중계삼아 단색계통의 작가들을 부추기며 쏟은 그의 열정과 행적은 실로 눈부시다.”3) 1970년대에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과 같은 대규모 현대미술 전시회는 덕수궁의 석조전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당시의 미술계 사정은 미술 인구에 비해 전시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공공미술관이라야 조계사 건너에 있는 미술회관이 고작이었고, 명동화랑을 비롯하여 현대화랑, 동산방화랑, 문헌화랑, 선화랑, 통인화랑 등 약 10여 개의 상업화랑들이 인사동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1960년대에 <청년작가연립전>4)과 같은 실험적인 전시회가 주로 열렸던 중앙공보관은 소공동에서 덕수궁 근처로 이전하면서 활력을 잃는 가운데 덕수궁 석조전의 국립현대미술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경복궁 시절인 1970년대 초반 <A.G>와 같은 전위단체의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1973년에 덕수궁으로 이전하면서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A.G>, <S.T>, <서울비엔날레> 등등 전위적인 전시회들이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정창섭 <편력22> 1966 캔버스에 유채 

146×111.5cm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Ⅱ. 한국의 단색화는 타자적 시선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는 내가 나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한 상태에서 남이 먼저 나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970년대에 한국의 단색화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한 측은 일본인들이었다. 1975년, 일본의 정상급 화랑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과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가 기획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동경화랑에서 열렸는데, 초대작가는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 등 5인이었다. 전시서문에서 나카하라 유스케는 “색채에 대한 관심의 한 표명으로서 반(反) 색채주의가 아니라 그들의 회화에의 관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미술평론가 이일 역시 서문에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이다...... 백색이기 이전에 백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라고 썼다.5)


나카하라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한국 단색화 작가들은 색채 그 이상의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무엇’을 가리켜 정신이라고 해도 좋고, 이일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우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한국의 단색화가 1970년대 초반에 서구의 모더니즘, 보다 정확히 말해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페인팅이나 미니멀 아트와 같은 해외 사조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것을 발효시켜 독자적인 양식을 창출한 주체는 백색파 작가들이란 사실이다. 야마모토 다카시와 나카하라 유스케와 같은 일본의 미술관계자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한국의 ‘백색’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나카하라는 “한국의 현대회화가 모두 구미와 똑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화가의 작품에는 다른 나라의 현대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봄, 서울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중간색을 사용함과 동시에 화면이 매우 델리키트하게 처리되어 있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6)고 쓴 바 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백색에 대한 주목은 구한말에 한국 땅을 밟은 벽안의 서양인들이 인상 깊게 본 백색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19세기 말, 근대화의 여명기에 이 땅을 밟은 서양인의 눈에 조선은 조용한 ‘은자(隱者)의 나라’로 비쳐졌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고 구한말에 조선을 찾은 한 서양인 기자는 쓰고 있다.”7) 이 서양인 기자의 눈에 비친 흰색 또한 타자적 시선이란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8) 이른바 ‘백의민족’의 표상으로서 한국의 백색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은 장구한 역사를 배경으로 배태된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상징성은 다양한 문화적 자료체를 통해 수렴된다. 가령, 우리의 조상들이 입었던 흰옷을 비롯하여 “달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백자, 백일이나 돌 등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 때 상에 놓이는 백설기, 문방사우에 속하는 화선지와 각종 빛깔의 한지”9) 등등이다. 그러나 한국의 단색화에 반드시 백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기린의 경우에 보듯이 검정색이나 청색, 노랑색, 빨강색, 녹색 등 오방색이 있으며 다갈색의 흙벽을 연상시키는 하종현의 배압법에 의한 단색화도 있다. 




김태호 <내재율> 2011 캔버스에 아크릴릭 

163×260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Ⅲ. 이번에 국제갤러리가 주최하는 <단색화의 예술>전에는 1970년대 단색화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일곱 작가가 초대되었다.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이 그들이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중반 태생인 이들의 연령은 대부분 80대에 이르렀으며, 그중에는 윤형근, 정창섭 등 이미 작고한 작가도 있다. 이들은 화단의 원로로서 40여 년 이상의 세월을 오로지 단색화의 제작에만 매진해 온 작가들이다. 그 결과 이들은 각자 독자적인 화풍을 수립, 거장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전 초대작가 중에서 이들보다 한 세대 위인, 이미 고인이 된 김환기와 곽인식을 제외하고 80대의 원로급 작가들 거의 전원이 초대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70-80년대에 제작된 초기 단색화로 국한, 한국 단색화 운동의 생생한 면모를 보여주고자 힘썼다. 그만큼 작품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고 일부 작가의 경우에는 공립미술관과 사립미술관에서 작품을 대여, 가능한 한 초기 단색화의 풍경을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한국 단색화의 요체는 무엇보다 정신성, 촉각성, 행위성에 두어진다. 이 요체가 일곱 작가의 작품 속에 고르게 스며 있다. 이들은 그러나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 안에서 서로 겹치거나 스며드는 가운데 궁극의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가령, 촉각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마치 선(禪) 수행하듯 종국에는 고도의 정신성을 획득한다. 과정으로서의 단색화의 제작 방식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수행(performance)’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우환의 반복되는 선과 점의 행렬, 박서보의 반복되는 선묘, 정상화의 반복되는 물감의 뜯어내기와 메우기, 윤형근의 반복되는 넓은 색역(色域)의 중첩, 정창섭의 반복되는 한지의 겹칩, 하종현의 반복되는 배압(背壓)의 행위, 김기린의 반복되는 물감의 분무(噴霧) 행위 등 반복적 행위는 이들의 작품 속에 고르게 녹아 있다. 1970년대 초 중반을 점유한 단색화의 초창기에 이들은 백색을 비롯한 흑, 적, 청, 황, 녹 의 오방색, 혹은 갈색과 베이지를 비롯한 중성색을 통해 ‘색의 부정’을 실천해 나갔다. 이들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색 자체가 아니라 ‘색을 넘어선’ 그 무엇이었다. 60-70년대 당시 한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한 이우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와 관련해 볼 때 의미심장하다.


“70년대의 단색은 결코 색채론으로서의 색깔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백색만이 아니었고 검정, 갈색, 노랑, 붉은색, 푸른색, 회색 등등 다양했다. 그런 색이 스스로의 톤만으로 수렴된 단색이었는데 그것들은 현실과 이어지는 색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색 자체를 주장한 색도 아니었다. 다른 색과의 조화나 구체성을 띤 색, 즉 현실로서의 복합적이고 긍정적인 색깔의 발로는 아니었다. 최병소의 작품이 대표하듯이 초창기에는 부정 혹은 거부 혹은 버팀의 추상성이 강한 의지의 물감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군정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색의 부정이었다.”10) 반복되는 행위가 물감을 통해 이루어질 때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두터운 물감과 질료의 층은 시각보다는 촉각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종의 ‘몸성’의 구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촉각성이 서구 모노크롬 회화의 시각 의존적인 방식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연필로 긋거나 색을 칠한 부분에 같은 행위를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는 방식은 결국 무(無)를 지향하는 의식의 발로이다. 


그것은 한국 문화예술의 근간이 되는 유교와 불교, 즉 마음을 비움으로써 인격의 도야를 꾀하는 수신(修身)과 수행의 예술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단색화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 호의적인 타자적 시선은 비서구적 문맥에서 단색화를, 가령 ‘흰색의 우세를 조선시대의 백자나 전통 불화’(Simon Morley), 혹은 ‘조선시대의 문화적 전통과 도교, 유교, 불교가 결합된 동양적 정신주의’(Henry Meyric Hughes)로 파악한 서구 비평가들의 견해를 통해 느낄 수 있다.11) 단색화(Dansaekhwa)의 영어식 표기에 대한 서구 비평가들의 수용은 이제 점차 보편화돼 가는 추세이다.12) 현재 구글에서 ‘Dansaekhwa’란 단어를 검색하면 약 2천개의 항목이 뜬다. 단색화(Dansaekhwa)는 목하 세계를 항해 중이다. 국제갤러리는 작년에 영국의 프리즈 아트페어에 <The Art of Dansaekhwa>란 타이틀로 단색화를 소개해서 호평을 받았는가 하면, 뉴욕에 소재한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는 최근 <근대의 극복, 단색화: 한국의 모노크롬 운동>전13) 을 연 바 있다. L.A 소재의 블럼 앤 포 갤러리 역시 올 하반기에 단색화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해외 유수의 미술관들이 단색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왜 이처럼 세계가 단색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단색화, 그 중에서도 특히 70-80년대의 초기 단색화가 지닌 예술적 우수성 때문이다. 서구의 미니멀 아트와는 다른 한국 고유의 미학적 특성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신성, 물성(촉각성), 수행성(행위성)은 한국 단색화의 미적 특성으로서 시각중심적인 서구 미니멀 회화의 그것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요소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구의 이론가들이 모두 한국 단색화의 미학적 특질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이자 아트 인 아메리카의 수석 편집장인 리차드 바인은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단색화의 미적 특징이 서구인의 눈에는 한낱 장식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한다.14) 하나의 현상을 놓고 나타나는 상반된 견해의 차이는 형태심리학에서 흔히 예로 드는 토끼와 오리의 도형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단색화를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서구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온건한 형태의 미술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전과 부정의 정신으로 점철된 서양의 아방가르드 전통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매우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의 명예회장인 헨리 메이릭 휴즈 역시 글 속에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해 단색화를 보는 서양인의 관점과 기준이 다름을 알 수 있다.15)




박서보 <묘법NO.41-81> 1981 

마포천에 유채, 연필 193.5×259.5cm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Ⅳ. 한국의 단색화 역시 국전이라고 하는 아카데믹한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비롯되었다. 1970년대의 단색화 혹은 백색파는 당시만하더라도 현대미술과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통했다. 19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운동의 주역이었던 단색화 작가들은 1967년의 <청년작가연립전>에서 <A.G>16)와 <S.T>로 이어지는 오브제, 설치, 해프닝, 이벤트 등등의 실험적 내지는 전위적인 운동에서 빗겨나 있다가 70년대 초반에 이르러 다시 현대미술의 고지를 점령한 반동 세력이었다. 70년대의 단색화가 지닌 회화에 대한 부정의 정신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볼 때 평면성이란 서구적 개념에 한국의 정신성을 접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단색화 작가들의 이 같은 서구 모더니티의 수용과 절충은 국제적 보편주의를 향한 행진의 서곡이었다. 이른바 회화에 있어서 현대성의 획득이 이루어지면서 지역적인 한계로부터 벗어나 국제적인 열린 지평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로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40대에 불과했던 단색화의 주역들은 이제 80대의 노경에 접어들었다. 이 전시에 초대받은 작가들 중에서 정창섭과 윤형근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한지(韓紙)는 추운 겨울에 만져야 제 맛이라는 의미에서 ‘한지(寒紙)’라고 불렀던 정창섭과 평소에 인간적 덕목을 강조했던 윤형근은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을 남겨놓은 채 말이 없다. 이우환은 구겐하임미술관의 전시에 이어 최근 베르사이유 궁에서 대규모 설치작업을 선보여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다. 배압법이란 독특한 기법을 창안한 하종현과 격자형의 패턴을 기본으로 뜯어내기와 메우기를 반복하는 정상화는 최근 들어 더욱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의 단색화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거기에는 부정과 긍정의 두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과연 초기의 정신을 견지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내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다가올 미래보다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리차드 바인의 조언처럼 세계의 무대에 뛰어들어 “준비된 자세로 자신의 비평적 관점과 신념에 대해 논박”17) 할 수 있어야 한다. 바인의 다음 글이 인상적이어서 여기에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이 세계무대에는 한국 미술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이 다수일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무대는 상호 교류의 기회가 있어서, 고집 센 반대자로부터 배우고 또 역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유쾌한 기회가 광활하게 펼쳐 있는 곳이다.”  



[참고문헌]


1) 단색화라는 명칭을 영어로 표기하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밤, 당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인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을 기획하던 나는 도록의 교정을 보고 있었다. 이 전시는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의 모노하(物派:Mono-ha)를 한 자리에 모은 것으로써 한일 현대미술 교류사에 남을 역사적인 것이었다. ‘역사적’이라고 한 이유는 양국 현대미술사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두 미술 운동이 한 자리에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걸쳐 두 나라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이 미술 현상을 30여 년이 흐른 시점(時點)에서 다시 돌아본다는 것은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쓴 서문의 한글 원고를 다 읽고 나서 드디어 영문 번역본에 눈길이 가는 순간,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역자는 ‘단색화’라는 용어를 ‘Korean Monochrome Painting’으로 번역을 했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그 앞에 ‘Dansaekhwa’라는 고유명을 써 놓았다. 이 땅에 ‘Dansaekhwa’라는 영어명이 최초로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지만, 스스로 벌인 일에 책임을 지는 문제는 말이 쉽지 녹록치 않았다. 그 후 10여 년간 나는 단색화에 관한 글을 스무 편 가까이 썼고, 그 결실은 2012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으로 맺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 전시의 초빙큐레이터로서 나는 전시와 학술세미나를 통해 단색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윤진섭, <단색화의 세계화를 위한 포석>, 서울문화투데이, 2014. 3. 21


2) 이 초혼의식(招魂儀式)의 매개체가 바로 한(恨)이다. 한이 맺혀야 그 한을 풀기위한 기제로서의 초혼의식이 이루어진다. 이 한에 대한 미학적 암시로는 김지하의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실천문학사)를 참고할 것. 특히 단색화와 관련해서는 “시김새는 안으로 쌓여서 발효해야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그늘이에요. 어렵습니다. 쉽지 않아요.”(앞의 책, p. 65)는 문장이 암시적이다. “어쩌면 이 현상(단색화를 가리킴)이 쉽사리 확산되고 정착될 수 있었던 연유에는 시대의 유행을 넘어 깊은 곳에 맥맥이 흐르는 한국인 특유의 한(恨)이나 생명력의 표현론이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이우환,『한국의 단색화』, 국립현대미술관, 2012, p. 34)


3) 윤진섭, “이우환과의 대화”, 『한국의 단색화』, 국립현대미술관, 2012, p. 34


4) 1967년 12월 11일부터 17일까지 열린 ‘무’, ‘신전’, ‘오리진’ 동인의 연합 전시로서 여기서 한국 최초의 해프닝인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5) 오광수, “단색화와 한국 현대미술”,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p. 21.


6) 나카하라 유스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 서문.


7) 윤진섭, “마음의 풍경”, 『한국의 단색화』, 국립현대미술관, 2012, p.8.


8) 이 ‘흰옷’과 함께 또 하나의 한국적 특질이랄 수 있는 ‘고요’는 모두 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의 인상이란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타자적 시선인 것이다. 타자적 시선이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윤진섭, “마음의 풍경”, 앞의 책.


9) 윤진섭, “마음의 풍경”, (2012), 위의 글, p. 9.


10) 윤진섭, “이우환과의 대화”, (2012), 위의 글, p. 35.


11) Simon Morley, “Tactile Seeing: Some Thoughts on Korean Monochrome Painting”과 Henry Meyric Hughes, “The International Art Scene and the Status of Dansaekhwa” 참조.


12) 2012년 당시 국립현대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전의 부대행사로 열린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한 해외 인사는 두 사람이었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의 명예회장인 헨리 메이릭 휴즈와 아트인아메리카 편집장인 리차드 바인(Richard Vine)이 그들이다. 그 중 헨리 메이릭 휴즈는 발제문에 ‘Dansaekhwa’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리차드 바인은 ‘monochrome painting’이라는 명칭을 썼다. 그러나 그는 그해 말에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이열 교수의 전시 서문에 ‘Dansaekhwa movement’라는 용어를 사용, 관점의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artasiapacific은 2014년 7/8월호에 단색화 특집을 실었다. Robert Liles, <Reading Tansaekhwa Today-Beyond White>, pp. 76-83. 여기서 ‘Tansaekhwa’란 표기는 미시건 대학의 교수인 조앤 기의 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Joan Kee, <Contemporary Korean Art-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 297쪽을 참고할 것. 한편,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전> 국제학술 세미나에 참가한 홍가이 박사는 발표문을 통해 ‘Dansaekhwa’라고 부르는 ‘Korean Monochrome Painting’은 한국의 미술사적 전통에 고유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계보를 지니고 있다는 관점에서 윤진섭의 주장이 매우 합당하다고 여겨지며, 나아가서는 같은 영어명, 즉 ‘Mono chrome Painting’으로 일컬어지는 서구의 용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나아가서는 그것의 한국어 동의어인 영어의 알파벳 표기와 관련하여 볼 때 ‘Tansaekhwa’보다는 ‘Dansaekhwa’로 표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윤진섭의 이 말에 대해 강하게 느끼고 있으며 그런 관점에서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 바 있다. 홍가이(Dr. Kai Hong), <Monochrome Painting>,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국제학술세미나 자료집, (2012), p. 42.


13) 원제는 ‘Overcoming Modern, Dansaekhwa : Korean Monochrome Movement’ Curated by Sam Bardaouil and Till Fellrath. 단색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들의 평가는 경청할 만 하다.

“단색화(Dansaekhwa)는 서구중심적인 미술사의 한계를 넘어 모더니티와의 절충을 이룬 하나의 훌륭한 예이다. 앞에서 이루어진 간단한 설명은 소위 말하는 중심을 넘어서 모더니티를 둘러싼 담론을 종종 혼란에 빠트리는 혁신과 모방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착종(錯綜)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그것은 일선에 선 자에게 독창적인 작가들로 이루어진 그룹이 모더니티의 절충과 영속적인 현대성을 향한 그들의 욕망을 통해 성취한 개념적이며 형식적인 혁신들을 가져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모노크롬 작가들에게 있어 모던하다는 것은 결코 예술적 생산의 서구적 모델과 동일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예술품 제작에 대해 확연히 다른 개념적이며 형식적인 접근의 특성들과 맞먹는 독특한 보편주의에 있어서의 신념도 아니었다.”


14) Richard Vine, “When Korean Monochrome Faces West: A Dilemma of Perception”, <한국의 단색화>전 국제학술세미나 자료집, (2012), p. 32.


15) Henry Meyric Hughes, “The International Art Scene and the Status of Dansaekhwa” 

“서양에서 모더니즘은 다른 발생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계몽주의와 진보, 진화 그리고 팽창주의 사상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다른 누구보다도 독일의 비평가인 페터 뷔르거에 의해 썩 훌륭하게 이론화되었다. 미학적 용어로 볼 때, 그것은 주류 아카데미 미술과 미적 이상주의에 반하는 포괄적인 반항이었다.”


16) 전위를 의미하는 ‘Avant-garde’의 약칭. 1970년대 초반, 김인환, 오광수, 이일 등 미술평론가들이 가세하여 이론적 지지를 받은 이 그룹은 오브제와 설치 중심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경향을 띠었다. 김구림, 곽훈, 김차섭,(이상 ‘회화 68’ 그룹), 이승조, 서승원, 최명영 (이상 ‘오리진’그룹), 김한, 하종현, 박종배, 박석원, 심문섭, 이승택, 신학철, 이강소, 이건용, 김청정, 김동규, 송번수, 조성묵 등이 참여한 이 단체는 1972년까지 모두 세 차례의 테마전을 가졌다. <확산과 환원의 역학>(1970), <현실과 실현>(1971), <탈관념의 세계>(1972)가 그들이다. 이들은 <A.G>라는 동명의 회지를 발간하여 미술잡지가 희귀하던 당시의 미술계에 미술이론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또한 이 그룹은 선언문을 통해 “전위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을 표방하였다. 197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서울비엔날레>는 미술평론가 이일을 선정위원으로 위촉, 국제전을 지향하였으나 단 1회에 그치고 말았다. 이 단체는 이듬해에 정기전을 열었으나 이 전시에 참가한 ‘A.G' 회원은 회장인 하종현을 비롯하여 김한, 신학철, 이건용 등 단 4명뿐이었다. 이듬해인 1975년에 박서보가 주도한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이 창립, ’A.G'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흡수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수의 작가들이 백색 단색화로 전환, ‘단색파’의 획일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pp. 93-101 참조, 윤진섭,「복원(復元) 1960-70년대 전위미술」,『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Ⅱ』,「6,70년대 미술운동의 자료집 Vol. 2」, ICAS, 2001, pp. 489-492 참조.


17) Richard Vine, 위의 글, (2012), p. 40.



윤진섭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에서 미술사와 미술비평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 1, 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인도트리엔날레 커미셔너, 포천아시아미술제 조직위원장 겸 전시총감독, <한국의 단색화>전(국립현대미술관) 초빙 큐레이터, 타이페이 현대미술관(MOCA) 주최 <K-P.O.P/Progress/Otherness/Play>전의 총감독,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겸 AICA KOREA 2014 조직위원장,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있으며,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필자 윤진섭이 국제갤러리 <The Art Of Dansaekhwa>전 서문을 편집, 구성한 것입니다.




하종현 <접합-7> 1982 마포천에 유채 

120×220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Special Feature -Ⅰ

추상의 윤리성, 

또는 서양의 관점에서 본 단색화의 발견

● 알렉산드라 먼로 구겐하임 미술관 아시아 미술부·삼성 시니어 큐레이터



1956년 중국화가 장 다쳰(張大千)은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 리비에로 떠났다. 그는 피카소를 근대미술의 현존하는 최고 작가로 여겼고, 피카소는 장 다쳰을 현존하는 최고의 전통회화 작가로 생각했다. 이 두 거장의 만남은 국제 미술계가 서예적 추상 어법을 통해 회화적 보편성을 추구하던 그 당시 세간의 큰 관심을 이끌었다. 피카소는 중국 수묵화의 뛰어난 예술성에 찬사를 보내며, 장 다쳰에게 직접 ‘중국 붓과 먹물’을 이용한 그의 실험적인 작업을 보여주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장 다쳰은 피카소가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피카소가 사용한 검정색은 단순한 검정색일 뿐이었다. 동양 수묵화에서 진정한 거장은 한 가지 먹물로 만 가지의 색상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는 ‘단색화’로 불린다. 하지만 비평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에서 발생한 미술 경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이 용어 ‘단색화’가 지칭하는 작품들은 모노크롬 혹은 회화 자체의 정의에 속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중간 색조의 배경, 반복적인 무늬, 표면 위의 찢겨진 흔적들은 의도적으로 기존의 해석 방식을 피해가는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사물과 회화 사이를 오가는 단색화의 추상성은 평면적이기 보다는 입체적이고, 회화적이기 보다는 실험적이며, 순수하게 미적이기 보다는 개념적이다. 장 다쳰의 먹물의 사용이 보여주듯이, 단색화의 과감한 단순성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기 위한 수단이다. 




김기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973 캔버스에 유채 130×160cm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단색화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던 작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작가들은 1945년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집권을 거쳐 냉전이 야기한 한반도의 비극적인 전쟁을 몸소 겪어야 했다. 이후 한국의 작가들은 박정희의 독재 정권에 맞서 규합하게 되었다. 이우환의 표현에 따르면 1970년대는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현실과 소외된 비제도의 상황”1) 이었다. 오늘날의 비평가들은 단색화의 작업 과정과 물성에 대한 탐구를 “묘법(描法)”으로 표현했고, 단색화는 현대적 유화와 전통적 수묵화 사이에 위치하는 중요한 경향으로 자리매김하며 전후 한국 미술의 발달에 크나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 박서보는 그의 일련의 작업들에 <묘법>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밝은색의 물감 위에 한 줄 한 줄 손으로 새겨 넣은 선들은 육체적 노동과 시간의 흐름을 강조한다. 박서보 회화의 추상성은 단순히 의미를 배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작업은 의도적으로 ‘회화의 해체’2) 를 야기하는 열린 불확실성의 상태를 추구했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예술적 질서에 도전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단색화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단색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했고 단색화의 주요 작가들은 대학 미술교육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단색화는 또한 한국에서 비롯된 가장 국제적인 미술 운동으로 인정받아왔다. 단색화 작가들의 첫 번째 전시는 1975년 일본 도쿄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이었다. 특히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1970년대부터 파리와 카마쿠라를 오가며 작업하던 이우환을 통해 더 많은 작가들이 일본과 프랑스에 소개되어 주요 갤러리와 파리 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 전시에서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단색화가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11년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북미 최초로 이우환의 회고전이 열렸다. 60여 년에 걸친 그의 작업세계를 아우르는 이 전시는 한국의 단색화뿐만 아니라 일본 모노하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 이우환의 활동을 조명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으로 단색화의 세계를 깊이 있게 다루며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서 도록을 남기기도 한 <한국의 단색화>전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2013년 미시건대학교의 미술사학자 조앤 기는 단색화를 심도 있게 다룬 최초의 영문서 『한국의 현대미술-단색화와 방법의 긴급성(Contemporary Korean Art: Tan 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을 출판하기도 했다.3) 이와 같은 최근의 연구들은 한국 작가들을 보다 넓은 역사적, 지적 맥락에서 다루며 서울, 도쿄와 파리에서 펼쳐진 그들의 활동을 그 당시 국제 현대미술계의 주요 담론과 연결 짓는다. 다양한 표면에 단색조의 물감을 붓고, 흘리고, 스며들게 하거나, 화면을 뚫고, 밀어내고, 찢는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단색화의 미니멀한 이미지는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이행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변화 속에서 다시금 설명되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시스템,’ ‘구조,’ ‘과정’과 같은 용어들은 미술 작품을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관객의 마음속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열린 형태의 역동적 이벤트로 재구성했다. 




윤형근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77 

린넨에 유채 142×175cm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단색화와 모노하의 등장은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 서독의 요셉 보이스를 중심으로 한 작가 그룹, 미국의 과정미술과 대지미술을 비롯한 개념미술과 포스트-미니멀리즘 미술의 등장과 그 시기를 함께 했다. 이와 같은 선구적 작가들은 하나의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 여러 도시들에서 활동하며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예술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일본의 비평가 하리우 이치로는 이러한 1960년대의 현상을 “국제적 동시성”이라 일컬었고, 1970년 하종현 작가 또한 이것을 “동시성”으로 표현했다.4) 아시아적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동시성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뒤쳐진 것으로 격하시켰던 중심과 변방의 시간차에 대한 인식을 지속적으로 국제적 모더니즘을 이끌었던 조형적 혁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인류의 문화와 경험에 대한 다양한 의미, 해석과 표현의 가능성이 보다 중요해진 탈식민주의 시대의 세계 질서 속에서 서구와 타 지역 사이의 오래된 위계는 그 유효성과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구시대 유물과의 갈등 속에서 단색화는 수십 년 동안 명확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작가들의 저항의 대상이었던 정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뚜렷한 한국성(진중함, 흰색의 사용, 윤리성 등)을 지니면서도 국제 현대미술의 성향(추상성, 미니멀리즘, 초월성 등)을 함께 반영하는 ‘한국 모노크롬 회화’를 가장 중요한 한국 현대미술 운동으로 홍보했다. 단색화의 고요함이 반영하는 정치적 맥락을 생략한 이와 같은 지나친 단순화는 1980년대의 보다 대중적인 민중 미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의 군부정치에 반대하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수많은 시민과 함께한 민중미술의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한국 현대사회의 정치적 격변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시각 문화를 제시하고자 했다. 단색화는 한국 근대화의 진정한 정체성을 뒤로 한 채 한국 미술계 안에서 세대와 사상의 구분 - 리얼리즘 또는 추상미술, 지역성 또는 토착성, 민족성 또는 국제성 - 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점차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단색화를 둘러싼 이와 같은 논란이 한국 내에서 수그러들자, 해외의 새로운 비평적 관점이 단색화를 다시금 ‘대안적 모더니즘’ 담론의 맥락 속에 위치시켰다. 근대 미술사의 유럽 중심 내러티브가 확장되고 비서구 지역의 지적, 예술적 움직임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누가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비서구권 작가들이 당면한 문제 - 어떻게 서양과 차별화되는 현대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 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모더니즘 자체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는데, 한국의 경우 작가들은 일본과 차별되는 현대성의 확보를 고민했다. 예를 들어, 단색화 작가들은 일본 식민주의와 국가적 차원의 일본화의 조장이 남긴 유산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통해 실재 또는 조작된 한국 역사 속 미학적 전략과 철학적 논리를 파헤쳤다. 이것은 한편, 당시 한국에 소개되었던 해외 현대미술의 흐름과 연결되지만 그 안에 종속되지는 않는 새로운 형태의 미니멀리즘과 추상미술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1969년 작가와 비평가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아방가르드(A.G.) 그룹이 출간한 A.G. 저널은 제1호에서 도널드 저드와 로버트 모리스의 작업을 다루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분야로 인정받는 동시에 국제미술의 움직임과 교류하고자 하는 단색화의 비전은 ‘범세계적 미술사’의 요구에 부합하는 하나의 강력한 예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일본의 구타이나 이란의 사카카네(Saqqakhaneh)와 같은 다른 비서구권 지역의 미술 사조와 마찬가지로 단색화는 문화이론가 아르준 아파두라이가 말한 “고삐 풀린 현대성(modernity at large)”5) 의 한 예를 제시한다. 범세계적 미술사의 중요한 방법론 중 하나는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간과되어왔던 사조들을 재맥락화 하는 것이다. 전후의 추상미술이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미술의 국제주의적 수사법과 구속적 제스처를 통해 보편주의의 유토피아 프로젝트로 각광을 받았던 반면, 미국과 유럽 이외 지역의 추상미술은 지역적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처 없이 황무지를 떠돌았다. 비서구권 현대미술이 각광을 받는 국제비엔날레와 같은 현장에서는, ‘차이’를 이야기하고 ‘타자’를 명확히 대변하는 작품들이 강조되었다. 




이동엽 <무상-상황> 1972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일본의 하위문화 아니메로부터 영감을 받은 네오-팝 작업을 하는 무라카미 다카시와 같은 작가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기에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장샤오강과 같은 중국의 리얼리즘 화가들은 문화혁명 시기의 삶을 반영함으로써 ‘지역성’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중국 현대미술을 이끌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하종현과 같은 단색화 작가들은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찾기가 어려웠다. 1970년대 제작된 하종현의 <접합> 연작은 거친 캔버스 천의 뒷면에서부터 흰 물감을 밀어내는 작업 과정을 통해 이미지가 배재되고 물성이 강조되는 다층적 표면을 만들어 내었다. 보다 최근의 세계미술은 수묵화의 기법을 이용한 작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수묵을 활용하는 화가들은 동서양 미술의 실천, 원칙, 철학을 비판적으로 융합하는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문인화와 서예의 전통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수묵: 중국 현대미술의 현재로서의 과거(Ink Art: Past as Present in Contemporary China)>는 수묵화를 세계 현대미술의 편재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자리 잡은 문화현상으로 보았다. 


오랫동안 한국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 동아시아 미학의 특수성으로 설명되었던 단색화를 이러한 논의의 확장적 의미 안에서 보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작품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현대성보다 그것의 전통적 배경을 강조하며 그릇된 이분법적, 대립적 시각을 가져올 수 있다는 문제점을 갖는다. 단색화의 역사는 대안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단색화 작가들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시대상에 부합하는 미술을 만들기 위해 풍부한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 속에 반영해 왔다. 권영우와 같은 단색화 작가들은 동양화와 서양화, 수묵화와 유화를 구분하는 한국의 미술교육의 체계를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여기며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물감과 종이와 같은 재료 자체의 물성에 주목하는 매개적 미학에 천착하며 환원적 이미지의 상징성보다 반복적 행위의 과정 자체에 몰두하기도 했다. 1966년 권영우는 나무 패널 위에 한지를 겹쳐 바르고 찢어 형태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붓이나 물감의 흔적이 배제된 기하학적 추상의 누적을 보여준다. 조앤 기에 따르면, “권영우는 붓을 사용하지 않고 철저히 종이만으로 구성한 작업을 통해 수묵화의 예외성에 대한 담론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담론을 매체의 가능성을 무시한 채 유화와 수묵화 사이의 구분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문제들은 현대 수묵화에 대한 예술적 논란보다 적어도 한 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적 담론과 얽혀 있는 것으로, 모든 단색화 작가들의 작업에 반영되어 있다. 현재 국제 미술계의 단색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추상회화로의 복귀일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추상회화는 개념주의적 성향의 설치미술이나 뉴미디어를 선호하는 미술 비평가, 큐레이터, 미술 시장에 의해 국제 모더니즘의 실패와 연결되어 인식되며 간과되어 왔다. 전후시기에 베이루트, 오사카, 멕시코시티 등 세계 곳곳의 작가들은 전체주의의 유산에 저항하는 진정한 주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추상을 작업에 활용했다. 




정상화 <무제 73-11> 1973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111cm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대담하고 자유로운 표현의 대형 추상회화들은 공산주의 냉전의 위협에 맞서는 미국적 자유주의, 개인주의와 국제주의의 승리에 대한 환호로 여겨졌다. 동서양의 경계와 국가 간의 반목을 초월하는 새로운 보편주의는 수묵화와 추상화의 공통분모로 여겨졌다. 자오 우시, 장 다쳰 등 중국 작가들은 동아시아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모리스 그레이브, 마크 토비와 같은 미국 화가들의 잉크 추상회화에 영감을 받아 그들의 수묵화를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6) 1953년 한국의 미술가 남관은 “수묵화는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것이다”7) 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1973년의 석유 파동 등은 이러한 국제주의적 전망을 퇴색시켰다. 선구적인 ‘세계적 스타일’에 대한 서구의 열망은 퇴보적인 제국주의로 치부되었고, 세계 여러 지역의 추상회화를 소개하는 도전적인 미술관 전시들은 전반적인 긴축의 분위기 속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냉전 시기 동안 뉴욕 현대미술관의 국제협의회가 기획한 순회 전시들에 초점을 맞춘 추상표현주의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수정주의적 비평은 한 때 잭슨 폴록을 자유 시대의 영웅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미술을 한층 더 폄하하는 결과를 낳았다. 추상주의는 초월주의와 함께 정치성과 비판적 정신이 결여된다는 이유로 선호를 잃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한국 단색화의 추상성은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추상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적 사회 현실 이면의 무언가를 드러내는 미술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만 한다. 또한 새로운 추상 미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리 앞에 놓인 미술 작품에서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의미를 고려하는 동시에 분리시켜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이우환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연작이 그가 1971년 뉴욕에서 바넷 뉴먼의 추상화를 보고 난 후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우환은 뉴먼의 미니멀리즘적 추상(뉴먼 스스로 “숭고함”이라고 표현하는) 속에서 그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물질적이면서도 초월적이고, 환원적이면서도 확장적인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8)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1970년까지의 제스추어적이자 미니멀리즘적이고 조직적인 추상미술이 남긴 국제적 유산에 주목하는 전시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추상미술, 모노크롬, 물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미술 관객들에게 모순과 비평, 스펙터클과 차용이 난무하는 대중문화에 결여되어 있는 일종의 깊이 있는 질서를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아니쉬 카푸어가 만들어 내는 모노크롬의 환영적 공간, 미국 도시풍경의 무질서한 황폐함의 상징인 광고판들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겹겹이 쌓아올리는 마크 브래드포드의 콜라주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일본의 구타이와 유럽의 제로그룹에 대한 최근의 재주목은 추상을 향한 새로운 전환을 예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단색화는 서구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단색화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와 전시가 이루어지고, 보다 많은 미술관들이 단색화 작품을 소장하게 되면서, 단색화는 한국 유신정권 시기의 격동을 반영하는 역사적 미술로서뿐만 아니라, 저항의 몸짓으로부터 탄생한 반조(反照)적인 현대미술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전시에 포함된 작품들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는 전 세계에 걸쳐서 순수하게 윤리적 행위로서 설명될 수 있는 유일한 현대미술 사조일 것이다.   


[참고문헌]

1) 윤진섭, “이우환과의 대화”, 『한국의 단색화』(국립현대미술관, 2012) p. 42


2) 조앤 기, 『한국의 현대미술-단색화와 방법의 긴급성』(미네아폴리스, 런던: 미네소타대학 출판부, 2013), p. 4. “단색화는 테크닉의 완성도, 의미의 전달이나 재료의 활용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단색화 작가들은 회화의 해체를 위한 특정 재료와 물성의 탐구에 주로 주목했다. 이것은 회화의 또 다른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야기했다…”


3) 다음을 참고할 것. 알렉산드라 먼로 편집, 『이우환: 무한의 제시(Lee Ufan: Marking Infinity)』(뉴욕, 구겐하임미술관, 2001); 윤진섭 편집, 『한국의 단색화』(국립현대미술관, 2012); 조앤 기 『한국의 현대미술-단색화와 방법의 긴급성』(미네아폴리스, 런던: 미네소타대학 출판부, 2013). 단색화는 형식상의 특정 그룹이 아니었으며, 1970년대 이후 수많은 작가들이 단색화와 연관지어 설명되었다. 주요 작가로는 박서보, 이우환, 윤형근, 하종현, 허황, 권영우, 이동엽, 서승원, 정상화, 최명영, 정창섭, 김창열 등이 있다.


4) 레이코 토미이, “1960년대의 ‘국제적 동시성’: 일본 미술과 그 너머에 대한 담론”, <저팬 리뷰> (2009, 21권), pp. 123-147.


5)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에 따르면, 전쟁, 식민주의, 이주, 관광, 글로벌 자본주의와 무역은 문화 정체성의 사회적, 지역적 형성에 급진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참고 문헌: 아르준 아파두라이, 『고삐 풀린 현대성: 세계화의 문화적 단면들(Modernity at Large: Cultural Dimensions of Globalization)』(미네아폴리스: 미네소타대학교 출판부, 1996); 아르준 아파두라이,『세계화(Globalization)』(더램, 런던: 듀크대학교 출판부, 2001); 호미 K. 바바, “문화의 현장들(Locations of Culture),” 산지브 카프람, 페기 레빗 편집, 『초국가적 연구 교재: 접점과 혁신(Transnational Studies Reader: Intersections & Innovations)』(뉴욕, 런던: 루트리지, 2008); 안드레아 후이센 편집, “포스트모더니티 이후의 모더니즘 (Modernism after Postmodernity)” (더램, 런던, 듀크대학교 출판부, 뉴 저먼 크리틱 99, 2006); 안드레아 후이센, “세계화 시대의 모더니즘 지형도 (Geographies of Modernism in a Globalizing World),” (더램, 런던, 듀크대학교 출판부, 뉴 저먼 크리틱 34, 2007).


6)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한 미국 근대미술에 끼친 동양 미학과 철학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알렉산드라 먼로 편집, <제 3의 정신: 미국 작가들의 아시아에 대한 명상(The Third Mind: American Artists Contemplate Asia)>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2009)


7) 남관, 조앤 기의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인용, p. 46.


8) 알렉산드라 먼로, “이우환: 잠시 멈추어 서서(Lee Ufan: Stand Still a Moment),” 『이우환: 무한의 제시』(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2011), p. 28.



알렉산드라 먼로는 구겐하임 미술관 아시아 미술부, 삼성 시니어 큐레이터이다. 근현대 아시아 미술과 초국가적 예술 학문 분야의 권위자인 알렉산드라 먼로는 2006년 구겐하임 미술관에 아시아 미술 부문이 설립된 이래로 미술관의 아시아 예술 전시를 이끌고 있을 뿐 아니라, 아부다비 구겐하임과 구겐하임 UBS MAP 글로벌 아트 프로젝트를 위해 일하고 있다. 또한 먼로는 격년마다 열리는 구겐하임 아시아 미술 위원회를 소집하고 있으며, 로버트 H.N. 호 가문 재단의 중국 현대미술 분야를 책임지고 있다. 먼로가 진행하였던 구겐하임의 주요전시로는 2013년 밍 티암포와 공동 기획했던 <Gutai: Splendid Playground>, 2011년 <Lee Ufan: Marking Infinity>, 2009년 <The Third Mind: American Artists Contemplate Asia, 1860-1989>, 2008년 <Cai Guo-Qiang: I Want to Believe> 등이 있다. 이 외 전시와 출판물로 1989년 <Yayoi Kusama: A Retrospective>, 2002년 <The Art of Mu Xin>, 2000년 <YES YOKO ONO>, 타카시 무라카미와 함께 기획했던 2005년 <Little Boy: The Arts of Japan’s Exploding Subculture> 등이 있으며, 연구 서적인 Japanese Art after 1945: Scream Against the Sky (1994)은 미국 내에서 전후(戰後) 일본 미술사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전시와 학문 서적들은 미국 미술관 협회, 국제 미술 비평 협회, 대학 미술 협회, 미국 미술관 학예사 협회, 북미 미술 도서관 협회, 중국 아트 파워 등에서 수상과 표창을 받았으며, 2008년 서적 The Third Mind는 국립인문재단에서 선정한 대상의 영예를 가졌다.


* 이 글은 2014년 8월 28일부터 10월 19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개최되는 <The Art Of Dansaekhwa>전 카탈로그에 동시 게재됩니다. 알렉산드라 먼로와 국제갤러리의 협조로 글을 싣습니다.




이우환 <점으로부터> 1976 캔버스에 안료 

117×117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Special Feature 

시각적 촉감과 단색화

● 사이먼 몰리 작가·미술평론가



시감각은 육체의 다른감각과 협응하고자 한다. 시각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감각이 촉각의 연장선상, 피부의 분화(分化-speciali sation)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오감이 피부와 환경 사이, 불투명한 육체의 내면성과 바깥세상의 외면성의 접점(interface)를 정의한다. -주하니 팔라스마(Juhani Pallasmaa), 2005, p. 42


창작의 은밀함은 그림을 주시하는 그의 동공이 아닌 손안에 있었다. -미켈뒤프렌(Mikel Dufrenne), 1987, p.148


사회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E. Nis bett)의 저서 「생각의 지도(The Geography of Thought, 2005)」에서 니스벳은 서구와 동아시아 인지양식을 좌우하는 특징적인 세계관이 두 가지며, 인지양식은 문화적 전통 속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주장했다. 두 세계관의 명백한 유익함을 통해 문화적 회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서구의 모델은 감각 중에 시각을 가장 고상하게 다루며 세상을 일정 수의 개별적 객체, 특질을 가져 명백히 범주화할 수 있는 객체로 분해하는 접근을 취하는데, 니스벳은 이를 ‘분석적 사고’를 앞세운다고 표현했다(2003, p.157). 앎의 과정은 개별적인 객체로 분리되었다가 새로운 전체로 재구성됨을 수반한다. 서구적 사고에서는 이산적(離散)이고 명확 뚜렷한 ‘사고의 토막’을 하나의 가치로 평가한다. 그 사고 내에서 진리는 화창하고 빤한 날처럼 또렷하며,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견에 감화되지 않는 사고의 양태를 지향하고, 그 토대 위에 일반적으로 검증 가능한 객관이 마련된다는 통념이다. 


담론적 접근이 지배적이고, 사고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직감 등의 정신 과정보다는 논리, 추론, 객관적인 분석 등의 과정을 통해 진행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생물학적 차원은 지성과 심리와 구분되므로 망막에 비춰진 이미지를 수용하고 처리하는 것은 지성이고 그 외에 촉각 등의 타 감각은 바깥세상에 대한 진실을 유추해내기에 열등한 기능으로 일축하게 된다. 세상을 감지할 수 있는 정보, 색, 미각, 청각, 후각, 촉각과 같은 정보는 한낱 주관적이고 사유적인 경험 전달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에 격하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정보가 경험이 야기하는 감정과 가치관에 대한 밀접한 관계 때문에 감정과 가치관도 더불어 격하된다. 이러한 습관은 지적 활동과 가치관에 집착하게 되는 주지적 태도를 야기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지양식이 앞세우는 경험은 “말에 발이 묶이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적 사고는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이원론으로 이어지고,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감지하고 있는 바깥세상에 의존치 않는 독자적인 존재함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Cogito의 분리, 즉 육체로부터 정신의 분리인데, 형이상학적으로는 초월론을 옹호하는 세계관이라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를 분리시켜버린다.




이강소 <섬에서-07247> 

2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218.2×291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서구의 사고는 이성적 논변과 분석에 주안점을 둔 댓가로 타 인지유형을 소흘히 하게 되었다. 작가를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다루고 예술적 창작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자주적인 행위로, 그리고 예술은 세계에 추가되는 주관적인 객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인식론을 다루는 타 분야에서 배양한 객관성과는 대조적으로, 이 주관적이고 창의적인 요소는 개인이 가진 표현의 자유를 부각하며 예술적 의식의 주요 구성요소로 고무되었다. 또한 시각적, 모방적 기능의 지배적인 양상은 예술의 인위성을 폐색해 서구의 인지유형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는 제 3자의 분리된 태도의 감상을 고무하게 되었다. 실로 서구에서는 시각에 집착하는 협소한 문화적 접근에 영향을 받아 감상이 "미천한"감각적 요소들에 대한 숙고나 상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의식하고 고민할 가망성이 매우 적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예술 작품의 시각적인 면에만 착안하도록 세뇌 당하고 그 시간적인 면과 지적, 언어적 상부 구조와의 관계만을 고민하도록 길들여졌다. 


반면에 니스베트가 말하는 동아시아의 전관적(全觀的 holistic) 사고방식은 인지 과정에 시공간 속에서 신체의 방위에 대한 이해와 그로부터 유추한 정보를 통합한다. 신체의 비중이 비교적 높은 것이다. 서구보다는 정동(情動)을 유념하며 감성(pathos)과 이성(logos)이 지식의 유효한 요소로 인정되어 비언어적 이해도에 대한 가치 인정으로까지 이어진다. ‘전관적 사고방식이란’ 이원성이 아닌 일원론적인 이해방식으로 자신이 바깥으로부터 구별된 외부 객체가 아닌 더불어 있는 존재로 보는 사고방식이다. 니스베트는 “동아시아인들은 훨씬 폭넓은 객체들과의 관계에 응하며 속성이나 범주에 대한 뚜렷한 구분을 아낀다. 지성의 요소로 정동, 그리고 감성(pathos)에 대한 비중이 비교적 높아 비언어적 이해도에 대한 가치 인정으로 점철된다. 그 결과, 동아시아인이 경험하는 현실은 언어적인 표현으로 부족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2003, p.211). 근본적으로 개념적이지 않고 구상적인 실천적 사고를 고무하고, 전관적 사고를 통해 특정 재료 또는 물리적 형태와 관련하여 존재하는 것을 고려한다. 


앎의 여러 과정이 개별적인 객체로 분리되었다가 새로운 전체로 재구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안에 내재된 중요한 지식이 그래서 서구인의 눈에 비전(秘傳)적이거나 어슴푸레한 얼버무림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인식론적으로는 비-이원론적, 즉, 일원론적 사고의 근거가 되는 세계관이다. 살아있는 형이하학적, 참여적 콘텍스트 속에 있는 작가는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는데 의의가 적다. 친밀한 유대감은 개인의 독립이나 자율 이상의 가치로 평가된다. 형이상학적으로, 이러한 세계관은 지금 지금 당장, 현시점에서 존재하는 내재 영성의 개념을 지지한다. 동아시아 세계관은 진수의, 고정된, 유한한 형태의 추구보다는 과정에 대한 모색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양식은 이종성 보다는 보완성의 모색을 지향하게 되어있다. 물리적인 신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초자아적 전체와의 연대의식을 더욱 강하게 실감하며 주체인 자기는 살아 숨쉬는, 실체적인, 참여적인 콘텍스트에 몰입되었음을 체감하게 한다. 중국학자이자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Fran–ois Jullien)은 이른바 중국 사상과 그리스 사상 사이의 이견을 이해하는 대에 “호흡”과 “지각”이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시각을 통해 바깥과의 연결됨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회화는 에너지, 역동적인 기의 망으로 진입하는 문으로 이해되었다. 동양 작가의 행동은 서양인이 보기에 제작 과정을 부각시키기 위한 매우 의도적인 기술사용과 주동적인 제어에 대한 포기로 점철되는 듯했다. 이는 도교(Taoism 道敎)에서 “인위성 없는 예술,” “요령을 부리지 않는 기술”로 통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작품을 감상하는 시선을 작가의 상상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당기기 위해 종종 암시적인 축약과 비어있는 공간을 선택하였고 이형적이고 대조적이며 불완전한 요소를 나란히 병치해 감상하는 사람이 작품을 완성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의 학자이자 화가였던 당지기(唐之奇 Tang Zhiqi c.1620)는 “그릴 때에는 화폭에 전부 담아낼 필요가 없다. 붓을 놀려 전부 그려낸다면 평범한 그림이 되고 만다”고 충고했다(Jullien, 2009, p.72 발췌). 예로, 비백(飛白 Fei Bai) 화법은 낡은 붓으로 화면을 훑고 지나가 공백을 남겼고, 발묵(潑墨) 화법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한 통제를 일부로 포기함으로써 고정된 양식과 정해진 의미의 경직된 틀을 느슨하게 풀어보려는 의도가 있다.




권영우 <P80-103> 

1980 합판 위에 한지 162×130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Blum & Poe, 

Los Angeles  




서구적인 눈에는 마무리의 개략에 그친듯한 구체성과 고상함의 부재로 비추어질 수 있는 부분이 동양에서는 오히려 높게 평가되었는데, 이는 기(氣)가 자연스러움의 표현과 밀접했기 때문이었다. 동양의 예술은 서양의 전근대적 예술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오브제(예: 풍경화) 에 대한 묘사에 더불어 작가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붓놀림을 통해 물리적 도막(鍍膜 substrate) 위에 존재를 남긴다.  회화의 도막은 고양된 시공간적 의식을 매개하고 감상하는 이에게 공감각적(共感覺 synesthesic) 경험에 끌어들임으로써 작가의 창작활동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이러한 회화는 미술사 학자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 (1983, p.94-95)이 보여줌을 뜻하는 직증적(直證的 deictic) 모드를 선택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회화는 문맥에 의존하기 때문 이미지를 한눈에, 동시(tota simul)에 볼 수 없고 그 이유는 회화 그 자체가 과정(durée)의 지속함 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감상하는 사람은 작가가 화폭의 도막 위에 남긴 흔적을 통해 시간의 경과를 시각적으로 추적-하며 마치 마치 그 작품의 제작 과정을 바라보거나 참여한 것만 같은 감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작품과 작가의 관계가 행위적이고 지시적임을 함의한 “형체를 가진 육체와 그 몸짓, 물리적 존재감”의 긍정이다(Bryson, 1983, p.95).


동아시아의 회화는 바깥 세상을 시각의 대상으로 이해하기보다 몰입의 개념을 묘사해왔다. 동양의 작가는 손과 눈의 협력적인 역할에 역점을 두었으며 시각 뿐만이 아닌 신체 전반의 감각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인지하였다. 동아시아의 회화는 작가의 내면과 바깥 세상의 고유한 중첩에 대한 표현으로 인식되었으며, 명암과 분위기에 사로잡히는 공감각적 경험을 유발하거나 바깥 세상과의 사사로운 촉각(tactile, haptic)을 환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창의성은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육체는 자신과 바깥 세계를 매개하는 그 중심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경험양식은 예술 작품을 주시할 때에 개별 부분의 집합이나 분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을 아우르는 전체를 본다.  동아시아 예술은 눈으로 보는 것 보다는 간접적인 관찰을 지향, 즉 육체를 통해 보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금껏 설명한 개괄적 문화 맥락을 통해 단색화를 본다면 서양의 모더니즘과 동아시아, 특히 한국의 전통적 요소가 혼성된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인의 눈에는 도막의 이설적인 활용을 통해 동아시아의 전통과 서양의 근대 미술을 염두에 둔 진보적 의도가 보일 것이다. 근대 미술의 세계화라는 맥락 내에서 두드러지게 소재적이고 촉각적인 오브제, 그리고 행위적인 창작 요소는 전통적 동아시아적 통념을 회생시키고 서양의 세계관을 해체시키기 위한 저항 기점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익숙한 다감각은 바깥 세상을 촉감하는 경험을 통해 전달되는데, 여기서 바깥이란 체화된 정신에 대한 고취된 깨달음이 있는 세상이다. 단색화 작가들은 바로 그 세상, 전통적인 동아시아 사상의 심부에서 영감을 끌어냈다. 그들은 공감각적 육체와 인지과정의 관계 사이에 긍정적인 균형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단색화의 표면은 촉감에 대한 인지를 기초로 하여 비교적 주관적이고 어둡고 순간적인 인지과정을 소통하기 위한 장이 된다. 한국의 전통 문화, 더 크게는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은 전관적 변증법주의로부터 유추한 특성이다. 결과적으로 단색화 작가들은 서구에서는 전례 없는 재료 조작과 화면 활용을 시도하고, 그러한 실험적 활동은 그 당시 세계 예술 무대의 패권을 장악해나가던 서구의 예술과 만나 교차하게 된다.


사고가 물질계의 ‘피부’에 체화된 것으로 보는 전관적 의식은 촉각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3차원적인 세계에서 촉각은 시각보다 더욱 강력하고 정확한 의식을 지닐 수 있게 해준다.  건축이론가 유하니 팔라스마(Juhani Pallasmaa, 2005, p.10, 11)는 “시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은 촉각의 연장선이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감각은 피부 조직에서 분화된 것으로 모든 감각적 경험은 촉각의 형태이며 촉각과 관련되어 있다. 촉각은 세상에서 비롯되는 경험과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는 경험을 결합시키는 감각적 형태이다. 시각 또한 촉각의 연속체로 융합 및 결합되며 이에 따라 나의 신체는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촉각이 ‘어둠’ 가운데 생겨남을 일컬으며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해 이는 “명료하고 분명한 지식”에 기반한 cogito에 치중되어 있는 서양의 세계관에 의구심을 품게 한다고 말한다(1992, p.155). 하지만 실제로 어떠한 물체와 물리적인 접촉을 하는 것은 명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다. 




윤형근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78 린넨에 유채 66.7×82cm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촉각을 통해 확신을 얻고 불분명함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촉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시각보다 더디겠지만 시각보다 거짓된 정보를 제공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시각은 인식되는 물체로부터의 공간적 분리를 통해 일반적인 개념 지식을 전달하지만, 촉각은 밀접한 접촉을 통해 특정한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신뢰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촉각의 반응은 근접한 거리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와 연관되지만 시각적 반응은 일정한 거리에서만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촉각 모드는 정면 또는 근접 감상이 필수적이며 이에 따라 눈과 손이 밀접한 결합을 이루게 된다. 들뢰즈는 이를 두고 “작품과 배경이 표면의 같은 위치에 놓여 있고 둘 사이의 거리와 우리와의 거리가 일치”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2003, p.123). 따라서 시각적 ‘촉각’은 신체의 움직임, 즉 신체의 위치, 자세, 그리고 균형과 관련된 자극으로 더욱 높은 체감적 수준에서 비롯되는 자기수용적 감각과 지각의 공감각적 본성에 대한 더 높은 의식을 받아들인다.


1970년대 한국에서 등장한 단색화는 한국의 예술가들이 서양의 자유로운 모더니즘을 접하면서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깨뜨리고 서양의 모더니즘 스타일을 모방하면서 이에 동화되고자 하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의 단색화는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시기와 다양한 국가에서 일어난 현상 중의 하나로, 조화로운 발전을 통해 이어져온 전통적 예술과 문화, 즉 반복과 모방, 그리고 표준에서 점점 벗어나는 모습과 전관적 체화 감각을 종결한다는 신호이다. 단색화 예술가들은 ‘분석적’인 서양 전통, 즉 예술적 자율성의 관점에서 예술을 극히 주관적인 것으로 보고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나타내야 한다는 관점을 받아들이기 위한 절차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던 ‘전관적’인 한국 문화의 전통적 주요 특징은 고수하고자 했다. 따라서 단색화는 급속하게 진행되었던 서구적 근대화의 딜레마라는 넓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은 군사정권과 미국의 감시하에서 경제적 ‘기적’을 이뤄내고 있었으며 이러한 근대화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가 중요한 ‘분석적’ 목표를 합리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형태의 기술주도형 성장을 빠르게 받아들여가는 사회 속에서 단색화 예술가들이 전통적인 재료와 과정, 그리고 기술을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 할지라도 변증적인 개입을 지속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아티스트 백남준은 이러한 문제를 미리 자각하고 자신이 발명한 비디오 아트를 작업하는 과정에서 기술을 통한 표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서양의 인지 양식을 지배하고 있는 데카르트 사상은 자아, 즉 코기토(cogito)가 즉각적인 지성적 직관을 통해 실제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시각 외의 감각을 배제하고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객관적인 본유관념(本有觀念 innate idea)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서양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이어지고 있는 시각 중심적 데카르트 세계관은 공간을 등방적이고 직선적이며 추상적이면서 균일하게 본다. 


마틴 제이(Martin Jay, 1988, p.11)는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가 모든 시각을 동일하고 보편적이며 초월적인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그 어떠한 차이라도 오류 또는 결함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는 사고의 일부분으로서의 개념들이 신체에서 비롯되어 경시를 받는 감각 및 감정과 대립하게 된다. 철학자 마크 존슨(Mark Johnson, 2007, p.216)은 이에 따라 지배적인 서양 패러다임이 “인지와 의미가 상통하며 그렇기 때문에 속성, 기분, 그리고 감정을 무의미한 것으로 일축해버린다”(원문은 이탤릭 체로 되어있음)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사실은 조형미술의 해석과 관련해서 약화되고 있으며 존슨은 “의미를 전달하는 원리는 이미지, 패턴, 품질, 색상, 그리고 영구히 계속되는 리듬이다.”(2007, p.216)라고 말하고 있다.   



사이먼 몰리는 영국 작가이며 평론가이다. 그는 2003년 『Writing on the Wall: Word and image in Modern Art』를 썼으며, 2014년 「Winchester Guide to Keywords and Concepts for International Students in Art, Media and Design」를 공저했으며 2010년 「The Sublime: Documents in Contemporary Art」를 편집한 바 있다. 그의 개인전 <Albert Camus : Oeuvres>이 9월 5일부터 27일까지 프랑스 파리 Galerie Scrawitch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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