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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의 여백─홍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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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28 – 2014.8.28 미메시스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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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소비자를 유혹하는 여행사 광고문구 중에서 흔한 것이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곳은 지상천국까지는 아닐지라도 볼거리가 많은 멋진 곳이라는 의미이리라. 지금 여기의 지루함과 진부함을 떨쳐버리는 영원한 휴일의 무대 이미지는 관광 엽서에도 등장한다. 판화로 시작했지만, 주로 설치미술가로 활동했던 홍순명이 40대 중반이 돼서야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려봐야겠다고 마음먹은 10여전에 처음 생각한 것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풍경을 위해 자연으로 떠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풍경’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았고, 그 때 여행사에서 제공했을 법한 멋진 풍경들을 접한다. 신비롭고도 강렬한 현존의 체험을 낳는 자연과의 직접 조우가 아닌, 매스 미디어에 의해 걸러진, 보여 질만한 가치가 있는 장면으로부터 화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화가로서의 진정성에 의심을 품게 한다. 조작과 허구들이 판치는 이미지와 스펙터클의 미혹을 넘어서 세계의 본질과 핵심, 그리고 진리를 견인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화가 본연의 자세와 모습 아닌가.


그러나 홍순명의 ‘풍경’은 선택된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사진가가 겨냥한 의도를 피해간다. 그는 중심이 아닌 주변, 정보가 아닌 잡음에 주목한다. 이런한 선택은 풍경 같지 않은 풍경을 만든다. 핵심으로부터 슬쩍 비켜나가기는 자연 풍경 뿐 아니라, 사회적 사건사고들이 담긴 보도사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sidescape>라 붙여진 작품들에 대해 작가는 “이런 풍경들은 화면 안에 있지만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 단지 그 안에 있기만 한 풍경이다....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역할 혹은 사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 등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관념이 부여한 유용성이나 기능성마저 파기시켜 어떠한 목적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순수한 풍경화”라고 밝힌다. 이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어떻게 충만한 전체처럼 세울 수 있을까, 여기에 작가의 도전이 있다. 이러한 주변적 부분은 자연에서 온 것이 아니므로 야생적일 것까지는 없지만, 쉽게 잡히지 않고 길들일 수 없으며 도구화, 합리화 될 수 없다. 그것은 동질성을 교란하는 이질성이 된다.




<메모리스케이프-서울> 2014 

혼합재료에 유채 78×83×135cm




눈에 잘 안 띄는 주변에 관심을 두는 태도에 더하여, 그림을 그림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색도 약해서 자연광으로만 은은하게 조명된 미술관 속 그림들은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벽에서 잠시 돌출된 듯, 또는 벽으로 스며들 듯한 크고 작은 면들이 야기하는 환경과의 묘한 어울림은 벽에 그림을 걸었다기 보다는 그림으로 설치작업을 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이러한 벽과 그림의 관계는 그림 바탕 면(배경)과 형태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관철된다. 작품 <서울 2007. 12.14>을 보면, 뿌연 풍경을 배경으로 난데없이 조명 장치가 떠있다. 제목을 통해서만 그 곳이 어디인지 추측할 수 있는 풍경에서 임시 조명 장치들이 조명할 실제의 주인공은 부재한다. 기념비적인 것으로 격상된 사소한 것들에서, 대상 보다 바라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작품 <washington. feb.10.2009>에도 조명기구가 나온다. 신문에 날 정도의 사진이라면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키는 어떤 급박한 사건의 현장일 터인데, 전구가 많이 달린 샹들리에만이 무심하게 무언가를 목격한다.


그것은 보도 사진가가 또는 신문 편집인이 선택했던, 명확하게 코드화된 장면의 일부이다. 제국의 수도에서 벌어진 어떤 중요한 사건에 대한 정보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롤랑 바르트가 ‘푼크툼’이라 이름 붙였던 작가의 눈길을 끌었던 어떤 부차적 세부만이 있다. 피라미드로 추정되는 희미한 사각뿔 형상이 있는 작품 <kandahar.april.2.2009> 역시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분쟁지역이기도 한 그곳에서의 사건 장면에는 아무런 단서도 정보도 없다. 이 모호한 형태는 모든 비밀(의미)을 푹 덮고 있다. 날짜와 장소가 포함된, 기계적으로 붙여진 제목만이 추리적 상상력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예시할 따름이다. 대형구축함이 바다에 비춰진 작품 <st. petesburg.feb.8.2010>처럼, 쉽게 알아 볼만한 광경도 흐릿한 반영 상에 주목한다. 이미지에서 어떤 정보와 의미를 파악하려는 이에게는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대상과 의미에 괄호를 치고 이런 저런 부분들을 음미하는 심미주의자에게는 매력적일 수 있다.


빙하가 죽죽 녹아내리는 듯한 이미지가 있는 작품 <seoul-131112>처럼, 홍순명의 작품에서 분명하고 견고한 덩어리는 액체나 기체로 사라져 간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물과 구름, 안개와 연기 같은 막에 휩싸이거나, 강렬한 햇빛이나 자연적, 인공적 폭발 등으로 형태가 사라지는 장면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건 현장을 담은 보도사진에서 선택된 장면에는 대개 인간이 사라져 있거나 나와도 익명적으로 처리된다. 무대가 있으면 주인공이 나와야 이야기가 성립되는데,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서사가 배제되어 있다. 명확한 의미로 귀결되는 서사는 과학이나 철학, 역사와 종교에 더 적합할 수 있다. 예술의 경우에도 소설이나 영화 같은 시간예술이 더 경쟁력이 있다. 매체를 중심에 두는 다소간 모더니즘적인 기준에 의한다면, 이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은 어쩌면 가장 그림 같은 그림이다. 미술이 자신의 형식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방식에만 몰두하다 보면 현실을 괄호 치고 형식에만 매몰될 수도 있지만,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림에는 소질이 없어서, 그럴 염려는 없을 것 같다.




<메모리스케이프-서울> 

2014 혼합재료에 유채




그림에 소질이 있든 없든 또 다른 방식의 말하기 방식은 열려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들은 감지된다. 홍순명의 작품에서 조형적인 방식을 통해 읽혀지는 것들은 미미한 것들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중요한 것을 깍아 내리는 등의 선택이 있으며, 그 결과는 시적이면서도 정치적이다. 선택은 확대하고 자르기라는 방법론을 통하며, 이 선택에 따른 의미는 우회적이고 간접적이다. 작품 <seoul.nov. 10.2010>의 뒷모습의 남자는 어떤 정치적 거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와 팔다리가 싹뚝 생략된 뒷모습에서 피사체에 대한 공격적 태도가 느껴진다. 군인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seoul-131122>에서 커피 속 프림 처럼 녹아드는 색채와 형태로 표현된 군인에게는 전사로서의 거친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긴 의상에 총을 든 몸통만 나온 작품 <washington.march.2.2009>은 한 장면을 같은 크기의 캔버스 두 개의 화면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그것은 무고한 목숨이 희생되는 끝없는 분쟁에 대해 단호한 단절의 염원을 표현한 듯하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러한 해석의 여지는 풍부하게 존재한다. 지나치게 열려있어 무의미할 것 같은 풍경이지만, 작가가 모호한 것에 탐닉하는 악취미에 빠져있거나, 그렇게 함으로서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계속 정의롭지 못하게 방치하는 정치적 보수주의에 기울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극히 예외적으로 지시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난 두 작품의 예를 들고 싶다. 화면 가득 동성 연인이 키스하는 장면이 있는 작품 <montpellier.may,29.2013>과 우리에 갇힌 동물이 냉소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듯한 작품 <seoul.aug.13.2007>에서 주류와 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소수와 타자에 대한 작가의 은근한 지지가 드러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은 피상적인 스펙터클의 범람에 역주행하려는 어떤 강한 정치적, 미적 선택의 발로는 아니다. 그에게는 표면의 심층으로 파고들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보도 사진이 하루에도 수 천 장 씩 생산되는 현실은 선택을 무색케 한다. 출처가 표기 된 사진 원본에 대한 커다란 왜곡은 없다. 새로 무엇을 덧붙이거나 과장하는 것도 없다.


어떤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잘려진 하나의 박편이라 할 수 있는 사진자체가 모호한 것이다. 작가는 그 모호함을 한 술 더 뜨기 전략을 통해 더 모호하게 할 뿐이다. 확대할수록 그 거친 망점으로 더 흐릿해지는 사진은 결코 그 자체로 자족적일 수 없고 어떤 맥락 속에서만 정보와 의미가 된다. 작가가 개입하는 것은 맥락의 변조이다. 원래의 맥락은 여기에 의미가 분명한 어떤 볼거리가 있다는 것이지만, 작가가 확대와 재 선택을 통해 만든 맥락은 상식이나 도그마, 이데올로기로 나타나는 지배적 관념과의 거리두기이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본 장면이나 찍은 사진이 아닌 보도사진을 출발점으로 하여 또 다른 (무)의미를 생성한다. 참조대상은 단지 회화적 실험을 위한 알리바이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재구성 되어가는 현실은 냉철한 거리두기를 거부하기에, 이러한 역행은 정치적이다. 홍순명에게 거리두기는 부분의 확대를 통해 전체와의 유기적 관계를 해체하는 것에 있다.




<아쿠아리움-1402> 2014 

캔버스에 유채 60×50cm 캔버스 91개




지난 10년간 틈틈이 그려왔던 옆서 크기의 그림들 1,700여개가 직선이거나 곡선인 전시장 벽면을 따라서 4줄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작품 <sidescape>는 걸리지 못했던 더 많은 작품들 속에서 선택 된 것이긴 하지만, 그 수와 규모를 본다면 선택이나 구성이란 것이 무색하다. 그에게 풍경이라는 것을 처음 떠올리게 한 엽서 크기의 일률적 존재들은 따로 또 같이 그곳에 모여 있다. 선택되고 행해진 것들에 대한 동등한 관심의 산물은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공간에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그렇게 서로를 맞대고 서 있다. 밑그림도 없이 쓱쓱 그려나간 작은 그림들은 일기처럼 꾸준히 그림을 연습해왔다는 반증이며, 개중에는 크게 확대되어도 멋진 것들도 있다. 부분과 전체의 모호한 관계는 수십 개의 같은 크기의 화면이 모여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수족관이나 숲을 그린 대형 작품은 작가도 전체 장면을 미술관에 와서야 보았다. 작은 부분이 모여 큰 것이 되지만, 그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는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조망은 없다. 사진 속 부차적인 일부를 화면 가득히 주인공으로 세웠듯이, 전체 속 부분은 그자체로 자족적이다.


전체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포함하는 부분이라는 단자(monad)적 사고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예술의 위상에 대한 작가의 견해이기도 하다. 예술은 세계를 거울이나 창처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것이다. 구축은 동시에 해체이다. 구축함에 있어 작가는 중심(동일자)과 주변(타자)의 위계적 관계를 해체한다. 이때 “해체는 정의다”(데리다)이다. 최근에 시작한 <memoriscape> 시리즈에서 작가는 더 이상 보도사진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건의 현장으로 달려간다. 송전탑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밀양, 기름 유출 사건이 일어난 여수, 폭발사고가 있었던 포천 포격 연습장, 서울과 그 인근의 재개발지 등이 그곳이다. 벽에 붙은 캔버스는 현장에서 수집한 사물과 더불어 현실 속에 서 있다. 실루엣만으로 드러난 사물들과 울퉁불퉁한 표면 위의 부분 이미지들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덩어리의 복잡한 굴곡 면은 그림보다 중심을 더욱 흩뿌린다. 조각도 회화도 오브제도 아닌 이 이상한 구조물은 중심을 제치고 주변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고양시킨 회화의 또 다른 버전이다. 그것은 평평한 표면에 얌전히 머물기에는 너무도 괴물같이 변해가는 우리의 현실에 맞춰 진화한 그림이다.                           




* <사이드스케이프> 2014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설치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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