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통역자’라는 예술의 광맥
‘우향 박래현’이 아니다. ‘박래현’이다. ‘우향’은 남편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운보 김기창이 선사한 ‘호’다. 우향 박래현하면, 곧장 김기창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큼 박래현은 ‘김기창의 부인’으로 주목을 받았지, 작가로서는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 우향 박래현이 아닌 박래현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3·1운동 이듬해에 태어난 그의 작업은 실험적인 도전의 연속이었다. 초기에는 일본 유학파답게 일본의 채색화로 화업을 시작했으나 해방 후에는 일본 화풍의 극복과 한국적인 회화의 길 찾기에 매진했다.
작가는 우리의 전통회화가 현대미술의 흐름과 만나면서 겪어야 했던 신산한 과정에 적극 뛰어들어 동양화의 한계에 도전했다. 6·25전쟁 기간에 비구상(반추상)의 조형양식을 창출하여, 1956년 37세에 ‘국전’과 ‘대한미협전’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1960년대 들어서는 완전 추상으로 나아갔고, 뉴욕에서 7년 여간 판화 수업을 받으며 예술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했다.
박래현은 ‘삼중의 삶’을 꾸렸다. 작가이면서 아내이자 네 자녀를 거느린 어머니로서 가정의 삶과 예술가의 삶을 나누어 살았다. 그럼에도 가정을 건사하듯이 동양화의 혁신적인 면모를 이끌면서 서양미술의 시각과 기법을 적극 수용하고, 동양화의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며 국제성과 시대성을 껴안았다. 왜 ‘삼중통역자’일까? 그는 청각장애인 김기창을 위해 영어와 한국어, 구화(구어)를 넘나드는 통역자로서, 자신을 ‘삼중통역자’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작품세계에서는 무엇이 ‘삼중통역’일까? 박래현은 스스로 성장하는 작가였다.
동양화가로는 드물게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이었던 그는 국제성과 시대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선구적인 조형세계를 일궜다. 도약은 뚜렷했고, 과감했다.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입체파 양식으로 보수적인 화단을 쇄신했다. 이는 국내 동양화단에서 처음 시도한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적극적인 수용이었다. 또 서양미술을 접목하여 추상화로 양식적 변화를 시도하며 동양화의 체질을 바꿨다. 해외여행을 통한 폭넓은 경험은 태피스트리와 판화에 도전해 동양화에 판화기법을 접붙이며 작품세계를 확장했다. 빛나는 성취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삼중통역의 실체는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장르는 다르지만 동일한 조형적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었다. 박래현 회화의 도상과 주제는 한결같이 태피스트리와 판화를 관통한다. 그에게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동양화와 태피스트리·판화의 구별은 무의미했다. 서양을 참조하되, 동양인이자 동양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것들을 숙성시켰다. 전시를 구성하는 ‘한국화와 ‘현대’’, ‘여성과 ‘생활’’, ‘세계여행과 ‘추상’’, ‘판화와 ‘기술’’의 각 섹션은 구상에서 비구상, 추상으로, 다시 판화까지 이르는 박래현의 진취적인 작품세계를 따라간다. 그중 흥미로웠던 섹션은 ‘여성과 ‘생활’’. 현모양처의 고된 삶을 살면서도 생활 속에서 주제와 재료, 기법을 찾는 등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 대신 잇몸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또 다른 소득은 판화가 박래현의 발견이었다.
작가는 동양화를 현대화하기 위해서는 재료와 기법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 가능성을 판화에서 찾았다. 동양화와 판화를 결합한 연작은 그래서 더 값지다. 박래현은 평생 도전과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많은 우리나라의 사정을 고려하면 그의 예술적 의지와 성과는 놀랍기만 하다. 채색화로 일관한 작가는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부나비였고, 타성과 관습을 거부한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박래현의 작가적 위상을 재고하게 만든 이번 전시는 자서전이자 평전이다. 자서전이라 함은 작품으로 삶의 여정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평전이라 함은 작가로서 그의 예술적 성취를 편집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끊임없는 자기갱신으로 ‘예술의 전당’에 오른 박래현은 여전히 채굴을 기다리는 광맥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비로소 그 광맥의 입구에 섰다.
*<기억(Recollection)> 1970-1973 에칭, 애쿼틴트 60.8×44cm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