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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98, Mar 2023

예술가 주도 공간 성장하는 창의적 공동체

Artist-Led Spaces
Growing Creative Communities

● 기획 · 진행 · 글 김미혜 기자

View of Y Gallery, Iceland Photo: Leifur Wil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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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준과 가치에 따라 시대의 관습과 사상, 풍경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것. 화가가 되는 것뿐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살아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목표다.” 프랑스 사실주의 선구자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는 1855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에서 작품 전시를 거부당하자 그 앞에 사실주의 파빌리온(Pavillon du Réalisme)을 설치하곤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곤 카탈로그 서문에 위같이 썼다.

제도와 상업 사이, 그 틈에서 예술가들은 주류 예술 기관의 요구나 시장의 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왔고, 그렇게 확산된 예술가 주도 공간은 오늘날 더는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허나 공공자금 감소와 시장 압력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려는 징후가 최근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고, 기금이 대폭 삭감되거나 지원이 감소한 지역을 중심으로 그 수 역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하여 독일과 이탈리아, 케냐에 이르기까지 확고한 정체성으로 단단히 뿌리내린 예술가 주도 공간의 디렉터, 큐레이터와 직접 인터뷰를 나눴다. 뿌리가 상하면 꽃과 열매가 온전히 피어날 수 없듯, 예술가 주도 공간을 살피는 것은 예술 생태계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근본적 출발점이 될 것이다.



Ernie Wang
 <Where Dreams Come True… But You Got Away> 
2022 Installation View of <BPA// Exhibition>
 2022 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Berlin 
2022 Courtesy the artist Photo: Frank Sperling



예술가를 위한 베를린 프로그램
(Berlin Program for Artists)

안젤라 블록(Angela Bulloch), 사이먼 데니(Simon Denny), 빌렘 드 루이(Willem de Rooij), 세 명의 현대 예술가들은 신진 예술가와 경험이 풍부한 기성 예술가들의 상호 스튜디오 방문을 중심으로 하는 예술가를 위한 베를린 프로그램(이하 BPA//)을 2016년부터 운영해오고 있다. 모두 독일 예술학교 교수들인 이들은 정규 교육을 마친 신진 예술가들이 어떻게 일하고 생활하는지 가장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고, 초보 변호사나 의사가 첫 직장에서 직업에 대해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듯 예술가들에게도 이러한 종류의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렇게 설립한 BPA//는 매년 베를린 기반의 신진 예술가 약 10-20명을 모집하고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등과 연결해 스튜디오 방문 조직 및 교류를 촉진한다. 신진작가들은 2년 동안 멘토들의 집중적인 일대일 방문을 통한 작품 발표, 그룹 토론 등을 진행하게 되며 작업 제작을 위한 보조금, 연례 전시 등도 제공받는다.

특히 BPA//의 핵심은 예술가들의 삶과 생계를 규정하는 매개변수들에 관한 에이전시 역할을 담당한다는 데 있다. 예술적·작업적 측면뿐 아니라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정책과 지원 등에 관해 결정하는 법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루이는 이에 관해 “예술가들은 종종 무언가를 실행함으로써 배운다. BPA//는 그렇게 운영된다. 국공립기관처럼 사전에 수립한 5개년 계획을 수행하는 형태가 아닌, 매일의 경험에 반응하고 핵심 역량을 성장시키기 위한 여러 방법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계속해서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평적인 세대 간 교류는 매우 생산적인 것으로 입증됐으며, 우리가 개발한 이 형식은 여타 대학원 수준의 멘토링과는 다르게 특징적”이라고 설명했다.



‘Videoart at Midnight: BPA// 
Summer Special’ 2019 Babylon Cinema, 
Berlin Photo: Willem de Rooij



다양한 예술 세계가 연결된 도시 베를린에서 BPA// 역시 가치를 공유하고 연대를 형성한다. 가령 핵심 멘토 중 한 명인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는 자신이 설립한 비영리 전시 공간 비트윈 브릿지(Between Bridges)에 일찍이 BPA// 참가자들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했고, 그로피우스 바우(Gropius Bau)는 2020년 전시 공간 중 일부를 개방해 참가자들의 스튜디오로 사용케 했다. 현재 BPA//는 베를린 미테 호프만 컬렉션(Hoffmann Collection)에 전시 공간이자 예술 교류를 위한 플랫폼 BPA// Raum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년 참가자들의 작품 전시뿐 아니라 역대 참여자들이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BPA//가 조직하는 모든 요소의 최우선적 가치는 유익함이며, 참가자와 멘토는 물론 기관과 대중 모두가 함께 배우고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한편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루이는 “지금까지 참가자들에게 스튜디오가 제공되지 않아 베를린 곳곳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그리고 이 과정은 예술가들이 도시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주었다. 이제 우리는 신진 예술가들의 스튜디오가 도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또 이들이 지속 가능한 형태로 자리를 잡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등에 주목하고 있다. 베를린의 임대료는 계속해서 오르고 있고 젊은 예술가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는 참가자들을 위한 물리적인 공간, 다시 말해 BPA//의 방식을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스튜디오 프로그램으로 확장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예술가 운영 조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보다 넓은 범위의 파트너 조직, 동료들과 관계를 맺고 경험과 자원을 공유하라. 혼자서만 작업하는 예술가는 없다!”



BPA// directors Willem de Rooij, 
Angela Bulloch and Simon Denny 
Photo: Piero Chiussi



누메로 크로마티코
(Numero Cromatico)

누메로 크로마티코의 예술적 수행은 신경 미학, 미적 심리학, 문학, 디지털 인문학, 시각 커뮤니케이션에 초점을 둔 과학적 접근에 기반한다. 예술과 과학의 관계, 동시대 아방가르드한 주제, 예술 작품이 감상의 대상을 넘어 대중과의 상호작용에 기반한다는 문화적 맥락 등은 2011년 이탈리아 미술계에선 중요시 다뤄지는 주제가 아니었고, 당시 미술계의 역동성을 롤모델로 삼을 수 없던 디오니지 가리아르디(Dionigi Mattia Gagliardi)는 시각예술과 신경과학 분야 모두에서 배경을 가진 연구원들을 모았다. 대중이나 컬렉터의 만족이 아닌 미적 논제를 다루고 범주를 정의하는 콜렉티브, 누메로 크로마티코는 그렇게 탄생했다.



Portrait of Numero Cromatico 
Photo: Serena Eller Vainicher, 2021



이들은 스스로 ‘예술의 일시적 경향이 아닌 역사와 직면하는 그룹’이라 정의한다. ‘역사와 직면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오늘날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서 예술가 주도 공간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앞선 예술가들이 살고 지나간 공간이자 여전히 놀라운 고고학적 역사를 지닌 도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로마는 예술가 주도 공간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항상 예술가들의 스튜디오, 실험적이고 공유적인 공간들이 집합된 곳이었다. 지난 세기 이탈리아 예술계를 견인했던 미래파(Futurism), 아르테 프로그라마타(Arte Programmata), 아르테 콘크레타(Arte Concreta),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등 주요 운동 흐름은 현재에 큰 유산을 남겼고, 우리는 이를 이어받고 연결한다. 예술은 결코 무에서 싹을 틔우는 법이 없다.”



Installation view of 
<Tre Scenari sulla Percezione del Tempo - Atto II La Visione> 
Numero Cromatico’s Project Space
 in via dei Volsci 165, Rome 2022 
Photo: Numero Cromatico



그렇게 ‘예술가 운영 공간’이 아닌 ‘대중에 공간을 개방한 예술가들의 모임’을 표방하는 누메로 크로마티코는 예술 콜렉티브, 과학 연구 센터, 전시 공간,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교육 프로젝트, 미적분에 기초한 미적 접근법으로 예술과 신경과학의 관계를 저술하는 예술 저널 『노드(Nodes)』까지 다차원적으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리고 올해로 설립 12년을 맞은 이들은, 이제 보다 먼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그간 내부 공간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해 선보였던 것에서 나아가 다양한 국제 예술 기관에서 공개할 새로운 예술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누메로 크로마티코는 무엇보다 예술 콜렉티브이고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위상은 많이 달라졌다. 전시 공간의 한계를 넘어 이전보다 더 많은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대중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Installation view of 
<Tre Scenari sulla Percezione del Tempo - Atto I La Memoria> 
Numero Cromatico’s Project Space
 in via dei Volsci 165, Rome 2021 
Photo: Numero Cromatico



끝으로 이들에게 예술가 주도 공간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 물었다. 누메로 크로마티코는 이렇게 답했다. “아티스트가 운영하는 물리적인 공간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모이고 토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뿐, 본질적으로는 ‘예술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만약 당신이 이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상과 연구,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구를 공유할 수 있는 동료를 찾으라고 제안하고 싶다. 예술가 운영 공간은 그저 일시적인 도구일 뿐, 최종 목표는 아니니 말이다.”



Numero Cromatico’s Studio 
in via Tiburtina 213, Rome 2022



나이로비 컨템포러리 아트 인스티튜트
(Nairobi Contemporary Art Institute)


지난 몇 년간 국제 미술계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예술가들이 나타났고, 이는 국가나 민간의 지원이 거의 없는 고국 예술계의 성장을 돕기 위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케냐 태생 아티스트 마이클 아미티지(Michael Armitage) 역시 이 같은 맥락으로 2020년 나이로비 컨템포러리 아트 인스티튜트(이하 NCAI)를 출범시켰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 위치한 NCAI는 동아프리카 현대미술의 성장과 보존을 위한 비영리 시각 예술 공간으로 지난해 1월 대중에 공개됐다. NCAI 큐레이터 돈 한다(Don Handa)는 ‘동아프리카 현대 미술 작가들의 이야기와 프로젝트를 전달하는 유산을 구축하는 것’을 핵심 가치로 꼽으며 “나이로비에 형성된 풍부한 현대 미술 풍경에 비해 작가가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우리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케냐의 경제 중심지 나이로비는 다른 동아프리카 지역과의 접근이 용이해 다양한 범위의 예술가와 작품을 흡수해왔다. 이곳에 자리한 NCAI는 풍부한 지역 예술의 전통을 유지함으로써 대중에는 동아프리카 예술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작가들에게는 예술에 대한 보다 실험적인 접근을 유도하며, 실무자들에게는 긴밀한 네트워크 형성으로 동아프리카 예술 아카이브 개발, 공개강좌, 다학제 교육 프로그램 등에 관해 연결·협력할 수 있는 기관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궁극적으로 예술가들에게 보금자리 기능을 제공하고 동아프리카 예술계 허브이자 자원으로써 관람객에게 영감을 주는 문화 공간을 위시하는 것이다.


Installation view of <Eltayeb Dawelbait & Immy Mali>
2022 Courtesy of Nairobi Contemporary Art Institute 
Photo: Renée Solomon



이전에도 나이로비에 많은 예술 공간과 그룹, 운동이 있어왔지만 NCAI는 자신들의 역할이 동아프리카 예술 보존과 진흥을 목적으로 기존에 형성된 인프라를 보완하는 것임을 자각하고 있다. 한다는 “상업적 공간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시장의 압력에서 벗어나 작가들이 보다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또 케냐에 아직 본격적으로 현대 미술 컬렉션을 구축한 곳이 없어 예술가, 연구자, 큐레이터들과 함께 다른 기관 전시에 대여할 수 있는 동아프리카의 근현대 미술 컬렉션을 구축코자 노력 중이다. 우리는 특정한 맥락에 반응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필요에 따라 프로그래밍을 설계한다. 다방면으로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배우고 탐구해야 할 것이 아직 너무나 많다. 우리는 기관으로서 엄청난 흥분을 느끼는 동시에 겸허함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고 전했다.




Installation view of <Silk to Silicon> 
2022 Backlit, Nottingham, UK



마지막으로 한다는 예술가 주도 공간에 대한 견해를 첨언했다. “물론 NCAI의 설립자가 예술가고 그가 팀을 이끌고 있지만, 많은 비예술가와도 협업하고 있기 때문에 꼭 예술가가 주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예술가로서 그의 관점과 관행이 프로젝트와 비전에 투영되는 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계속해서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유토피아는 장소가 아닌 시간과 같은 것이다. 다른 어떤 곳에도 있고 싶지 않은 짧은 순간들이다.”* 현실의 순간을 그러모아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 예술 존재의 당위성은 실존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주체인 예술가의 공간에서 이는 보다 자유로운 자기 결정의 형태로 완성된다. 공동체에 기쁨과 상호작용, 영감을 제공하고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에 대한 사려 깊은 비판으로 사회적 진보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예술의 지속은, 우리가 사는 지구처럼 생태계의 다양성과 순환 구조에서 비롯한다. 예술가 주도 공간이 건강한 싹을 틔우기 위해선 우리의 지속적이고 주기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PA



Installation view of 
<Tau Lewis, Patty Kelly_I heard a heartbeat down in the black hole>
 2019 Cordova, Barcelona, Spain 
Courtesy of the artists and Cordova





[각주]
* Susan Sontag, In America: 임옥희 옮김, 『인 아메리카』, 이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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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미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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