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네덜란드관 작가로 선정되는 등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벤덜린 판 올덴보르흐(Wendelien van Oldenborgh)의 개인전이 도쿄도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 ‘유연한 무대(unset on-set)’는 20여 년에 걸친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의 무대나 대본의 구조를 차용해 영상 제작에 참여하는 이들의 대화나 행위의 우연적인 양상을 드러내 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 여러 접근 방식을 담은 기존 작품과 더불어 일본에서 제작한 신작을 포함해 총 6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 글은 전시의 유연한 무대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와 시점, 몸짓을 체현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판 올덴보르흐는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에서의 식민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젠더와 관련된 문제들을 영상 및 설치작업을 통해 다뤄왔다. 영상의 주된 제작 방법은 역사상의 특정한 인물이나 문화적, 정치적 실천과 사건을 기반으로 그와 관련된 장소에서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다. 작가는 참여자가 제작 과정의 일부가 되어 내용을 구성하고 분석하는 워크숍을 진행함으로써 그들이 매체를 둘러싼 자신들의 역할을 인지토록 하고, 관람객에게는 자신만의 관점을 발견하도록 요청한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영상 제작이라는 공동의 수행을 통해 대화 구축의 계기와 다양한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그의 작업을 살핀다.
<obsada> 2021
Production still Photo: Jakub Danilewicz
전시실을 들어서면 공간을 대각선으로 길게 분할하는 나무 벽과 벽면에 헤드폰이 걸려있다. 관람객은 헤드폰을 들고 영상 주변의 벽이나 구조물에 설치된 이어폰 단자를 사용해 영상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나무 벽 이외에도 문이나 창문 모양의 뚫린 부분, 관람객이 앉을 수 있는 계단 형태의 무대가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비교적 가벼운 소재인 나무로 만들어졌고 벽을 지탱하는 뒷면의 뼈대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관람객은 이러한 전시 공간을 각자가 원하는 동선에 따라 이동하거나 머무르며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영상과 책자로 구성된 <Maurits Script>(2006)는 17세기 브라질 북동부에 실재했던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테마로 한다. 당시 총독 마우리츠 판 나사우(Maurits van Nassau)에 관한 서간, 정치 회의록 등의 1차 자료를 바탕으로 대본을 구성했고, 영상 제작을 위해 정치적, 사상적으로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참여자들을 불러 모아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Mauritshuis)에서 대본 낭독 및 토론 장면을 촬영했다.
<Two Stones> 2019 Still
두 개의 채널로 이루어진 영상은 각각 촬영장 한편에서 참여자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문헌을 낭독하는 모습과 다른 한편에서 나머지 참여자들이 테이블을 끼고 토론하는 장면을 비춘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식민지 역사가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들, 예를 들어 시민권이나 다문화주의와 같은 주제를 다룬다. 작가는 편집 과정에서 대화 속의 갈등을 봉합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각기 다른 입장과 복잡한 관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구성하는데, 참여자의 개별적인 경험을 체현하며 관람객은 그 속에서 다양한 목소리와 사고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Two Stones>(2019)는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한 독일인 건축가인 로테 슈탐-베제(Lotte Stam-Beese)와 카리브 출신 행동주의자, 문필가인 헤르미나 하위스바우트(Hermina Huiswoud)의 궤적을 현대의 인물들을 통해 조명한다. 슈탐-베제는 1930년대에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 양식을 구사해 공동주택을 지었고, 1950년대엔 도시계획자로서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주택지 펜드레히트를 설계했다(이 건물들은 영상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No False Echoes> 2008 Still
한편 하위스바우트는 1970년대에 카리브계 네덜란드인에 대한 차별적인 주택법에 반대하는 데모를 주도했다.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주거 환경을 둘러싼 평등을 주창한 두 사람의 사상은 공명과 불일치 사이를 오간다. 영상에서는 이처럼 얽힌 역사에 관해 개인적, 직업적으로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다. 작품은 하나의 영상에 두 가지 트랙의 음성을 결합하거나, 영상 화면의 바깥에 위치한 패널에 자막을 비추는 방식을 통해 다원적 목소리가 공존하는 모습을 시각적, 촉각적 방식으로 전달한다.
<Heir.>(2021)는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의 문화가 혼성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음악 형식인 크론총(Kroncong)을 테마로 한 작품이다. ‘여기’라는 뜻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품은 현재의 젊은이들이 주도하는 문화 실천을 통해 과거의 억압된 사람들이 만든 해방의 음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는다. 보수공사 중이던 아른헴미술관(Museum Arnhem)에서 촬영한 영상은 인도네시아, 수리남, 네덜란드 출신의 세 여성으로 구성된 밴드 프레드(FRED)가 전통적인 크론총의 즉흥 연주와 자신들의 현대적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MauritsScript> 2006 Still
아른헴미술관은 19세기 네덜란드 식민지 역사와 관련 깊은 장소이기도 한데, 콘크리트 골조 사이로 드러난 오래된 건축 양식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함축된 시간을 암시한다. 작품은 이러한 장소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음악 연주와 더불어 소설가와 연구자가 주제에 관한 글을 낭독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거시적인 사회정치적 맥락뿐만 아니라 개인이 느끼는 나약함과 삶에 대한 의문들이 동시에 교차한다.
<obsada>(2021)의 제목은 폴란드어로 ‘배역’ 혹은 ‘공동작업’을 뜻하며, 남성 우위가 팽배한 영화산업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는지를 다룬다.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등을 배출한 폴란드의 우치 영화학교(Łódź Film School), 우치 미술관(Muzeum Sztuki w Łodzi)과 같은 역사적인 장소에서 영화학교의 학생과 졸업생, 전문 촬영팀과의 협업을 통해 제작되었다. 참여자들은 초기의 전위 예술이 문제 삼지 않았던 가부장적인 특권이,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느낀 본인들의 절망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토로하며 영상 촬영을 진행해 나간다.
Exhibition view of
<Wendelien van Oldenborgh, unset on-set>
November 12 2022 - February 19 2023
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Photo: Kenji Morita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전위 그룹 워크숍 오브 더 필름 폼(Workshop of the Film Form)의 퍼포먼스와 폴란드의 여성 조각가 카타르지나 코브로(Katarzyna Kobro)의 작품을 분석해 원색 계통의 투명 아크릴판을 겹쳐 다양한 색상의 조합을 만들거나, 신체를 조형하는 즉흥적인 동작을 수행한다. 이러한 영상 속 여성들의 목소리와 일련의 몸짓은 그들이 영화업계에서 경험한 곤궁과 불안을 포함하면서도, 협동과 개방성을 중시하는 영상 제작 과정의 가능성을 넌지시 제시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들이 서구권의 역사를 다루었다면 <of girls>(2022)는 1920년대에 활동한 두 사람의 여성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Fumiko Hayashi)와 미야모토 유리코(Yuriko Miyamoto)를 통해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정치와 계급, 젠더의 역사를 바라본다. 하야시는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성 노동자를 향한 공감과 자신의 성적 욕망을 진솔하게 표현했으며, 미야모토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사회주의 사상과 여성해방을 주창한 인물이다. 영상은 젠더나 성 정체성에 관한 문화적 실천을 행하는 아티스트, 큐레이터, 연구자들이 하야시가 살았던 일본 가옥이나 1950년대에 지어진 건물에서 하야시와 미야모토에 관한 글을 낭독하고 토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Two Stones> 2019 Still
이들의 대화는 두 여성의 업적을 단순히 미화하기보다 그들의 글과 행동에 내포된 갈등과 모순을 꼼꼼히 짚어 나간다. 예를 들어 미야모토가 사회주의 이념에 충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동성애 역사를 부정했던 대목에 관해 참여자가 각자의 의견을 공유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이처럼 현재의 젊은 세대가 역사상 실재했던 목소리에 다양한 방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오늘날의 젠더, 정치를 둘러싼 실천 양식을 고안하는 단서가 된다.
‘유연한 무대’는 영상의 제작 과정에서 참여자가 가진 각기 다른 생각과 목소리를 중시하고, 제작 구성원들의 역할이나 관계를 유동적으로 설정하는 제작 방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는 관람객이 다양한 동선과 시점을 통해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작품 간의 접점을 인지하는 과정으로 이끈다. 가령 관람객의 위치에 따라 하나의 작품을 보는 동시에 벽이나 창문 너머로 다른 작품이 시야에 들어오도록 하는 수법을 들 수 있다. 이는 관람객이 개별 작품의 내용을 확인하는 행위를 넘어 각각의 작품이 다른 작품과 연관된 지점들을 탐색하게 한다.
<Wendelien van Oldenborgh, unset on-set>
November 12 2022 - February 19 2023
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Photo: Kenji Morita
이외에 전시실에 배치된 스터디룸과 복도에 있는 책장에는 이번 전시와 관련된 책과 자료들이 놓여 있고, 전시 기간 중 작가, 퀴어 활동가, 진(Zine) 창작자 등이 참여하는 토크 및 독서회가 진행된다. 이러한 방식은 관람객 또한 작품이 다루는 기억이나 문화적 실천에 공감하고, 나아가 그 과정 속에서의 경험과 지식을 각자가 처한 현실이나 상황에 적용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그것이 설령 비약 섞인 바람일지라도 전시는 사회 현상에 대한 단순한 재현이나 기록이 아닌, 관람객 스스로가 각자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지식 생산의 무대라 부르기에 충분할 것이다.PA
글쓴이 권상해는 도쿄예술대학에서 예술학 전공으로 석사학위, 아트프로듀스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현대미술 연구와 더불어 미술과 공연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큐레토리얼 실천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도쿄에서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전시 기획, 퍼포먼스 플랫폼 Stilllive 운영, 글쓰기, 번역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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