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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81, Jun 2013

하상림
Ha Sang Rim

자연의 선을 뽑아 축조한 세계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발표된 하상림의 최근작들은 작가 말대로 ‘선과 어디까지 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이다. 선이 두드러지기 위해서는 색 또한 중요하고, 선과 색이라는 조형적 언어의 근거가 되는 참조대상, 즉 자연이 중요해진다. 형태를 이루는 선과 바탕이 강한 대조를 이룰 때는 물론 비슷한 계열로 배색된 은은한 작품들조차, 선이 평면을 튀어 나올 듯한 강렬한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한다. 환영에 불과했던 선과 색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 활개 친다. 평면회화에서 이러한 생생한 느낌이 가능한 것은 인공적인 조형언어의 힘이 극대화되었을 뿐 아니라, 자칫 정제된 형식이나 구조로 굳어질 수 있는 언어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독특한 대상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형식이냐 내용이냐 하는 문제는 하상림의 작품에서 문제될 게 없다. 양자는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가 된 표면과 이면을 통해 연동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은 자연적 대상을 투명하게 재현하는 중성적 언어, 그리고 참조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율적인 언어라는 양극에 치우치지 않는다. 관객에게 어떤 핵심적 진리를 알려줄 수단으로서의 재현도 아니고, 내용이 소거된 아름다운 무늬도 아닌 하상림의 작품은 추상적 언어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참조대상을 괄호 쳐야 한다는 모더니즘의 미학적 전략이나, 관객에게 보여주고 알려주고 싶은 어떤 대상이나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투명한 도구로서의 그림이라는 전통적 해결책, 그 무익한 양자택일을 빠져나간다.
● 이선영 미술평론가 ● 사진 서지연

Untitled-R1126-1129 Acrylic on Canvas 180×340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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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림의 작품에서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어 보이는 미미한 대상은 선과 색이라는 인공적 언어로 존재감이 부여되었으며,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중성적 도구에 불과했던 언어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생명력으로 충전되어 있다. 내용과 형식이 이렇듯 서로를 고무시키는 예는 드물다. 배색은 참조대상과 무관하게 작가의 감성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지만, 유려한 선들은 철저히 자연으로부터 따왔다. 여행을 통해 만난 식물을 사진으로 찍고 컴퓨터를 활용하여 식물의 선을 추출하고, 이렇게 빼낸 선을 강렬한 색상 대조로 표현하기 위해 화면에 그리는 것을 넘어서 테이핑 작업을 거친다. 가는 색선이 강렬한 바탕색에서 도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시각적 효과는 붓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한톤으로 가는 선을 그릴 수 없는 붓 작업은 선이 퍼지면서 이렇듯 확연한 효과를 낼 수 없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밀도와 강도가 다른 선들은 화가가 사용하는 붓만큼이나 다양한 두께를 가지는 테이프와 차후에 그것을 떼어내는 정교한 핀셋을 필요로 한다. 선인장이나 고사리처럼 복잡하기 그지없는 외곽선을 가진 식물의 경우, 테이핑의 달인이 되지 않으면 현전 불가능한 끈질긴 장인적 면모 또한 요구된다. 추상적 색 면을 미끄러지듯 가로지르는 자연스러운 선들은 작가의 육체적 한계를 시험하는 경계 선상의 게임이기도 하다.



Untitled-BL1202 Acrylic on Canvas, 
160×160cm 2012



여러 실험을 통해 확립한, 순차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작업 매뉴얼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질성과 다양성의 위대한 모델인 자연이라는 참조 대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한, 작가가 화면을 선과 색이라는 인공적 언어로 완벽히 제어 하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작가는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지휘자가 아니라, 자연의 한 요소-물론 작품을 시작하고 종결시키는 주체로서 좀 더 유력한 요소이기는 하지만-로 참여할 뿐이다. 자신이 결정한 방식을 따라간다고 해서 최종적인 결과가 예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전 10부터 밤 12시까지 연희동 작업실에서 매일 마주하는 그 징 한 것들이 받아주어야 하고 반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정성은 작가와 자연, 작가와 회화의 대화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음을 알려준다. 막연한 자의성과도 다른, 이러한 불확실성이 예술작품을 다른 생산물과 다른 차원에 놓이게 한다. 정작 작가는 발 닫는 곳에서 발견한 길섶위의 풀들이 어떤 종에 속하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관심 없지만, 어떤 관객은 그것을 알아볼 수도 있을 만큼 정확한 선들에 실려 있다. 선과 색의 향연은 장식성 또한 극대화하지만, 하상림의 작품은 어떤 요소만을 뽑아 반복하는 식물무늬 패턴과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작가의 눈길이 닿은 지상의 피조물에서 빼지도 보태지도 않았지만, 추상적 바탕에 가득 펼쳐놓은 선은 단순한 외관을 넘어 살아있는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내부의 체계 또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Untitled-GR07046> 
Mixed Media on Canvas 
194×259cm 2007



공간공포증적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선들은 식물들이 주어진 공간에서 최적의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연에는 빈 곳이 없음을 알려준다. 이런저런 선별과 강조점에 의해 자연의 형태와 과정이, 겉과 속이 동시에 투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식물의 잎들은 우거진 수풀 속에서 최대한 태양빛을 흡수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다른 개체와 경쟁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 나가는지, 공기 중의 탄소와 빛을 붙잡아 광합성이 수행될 장소까지 토양에서 흡수한 무기물과 수분의 이동을 위해 어떤 미세한 그물망을 구축하는지, 태양으로부터 시작된 에너지의 분배방식이 어떻게 구조를 발생시키고 유지하는지 등을 예시한다. 지구 최초의 생명체로, ‘비유기적 요소로부터 유기적 요소를 생산함으로서 다른 종속 생물체들의 생명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식물’(자크 브로스)의 경이로운 메커니즘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작품은 그러한 생물학적 관심에 의해 추동된 것은 아닐지언정, 그것까지도 예시될 만큼 충실하다. 작품에서 받는 강렬한 인상은 이러한 충실함에 어느 정도 의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선으로 놀 때까지 놀아보겠다는 줄 타는 광대 같은 심정으로 조형언어를 극단까지 벼려낸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적절한 조합은 석화된 꽃이나 금속성 색이 많이 등장하는 이전 작품에도 발견된다.



<Untitled-GR1004> 
Acrylic on Canvas 
130×130cm 2010



근래작업의 최초의 씨앗이 되었던 것은 작가가 30대 중반이었던 90년대 초반, 말라빠진 꽈리로부터 받은 영감이다. 수분이 다 빠진 꽈리 열매는 이미 죽은 것이었지만, 여전히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선들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씨앗이나 열매에서 피어나는 에너지에 대한 발견은 꽃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30대 초반 열정적으로 쏟아냈던, 지금 봐도 일기 같이 읽혀질 정도로 본능에 충실했던 작품들을 정리해보자는 내적 욕구, 가령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단순명료하게,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는 없을까에 대한 작가의 요구와도 부응했다. 꽈리 형상의 작품이 많이 등장하는 1998-2002년을 지나, 2002년에 시작된 시리즈인 석화된 꽃은 아이가 처음 도화지에 꽃이라는 것을 그릴 때 그것이 꽃에 대한 어떤 인상이나 원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화된 대상을 묘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거기에는 아름답지만 곧 사라지는, 꽃 같은 존재에 대한 함축성이 강했다. 자크 브로스의 「식물의 역사와 신화」가 말하듯이, 식물에게 개화란 사실 그 식물의 쇠퇴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종국적으로는 죽음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속에서 싹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식물은 일종의 원형이나 모형으로 다가온다. 순간을 영원으로 고양시키는 것은 한 송이 꽃을 담기에는 다소 과하게 다가오는 200호 크기의 기념비적인 스케일과 금속성 색상이었다.



<Untitled-GRE07044> 
Mixed Media on Canvas 
85×180cm 2007



힘 있는 표현과 스케일은 요즘 작품도 여전해서, 누구에게 보여 지기 위해 피고 지는 것이 아닌, 지상의 작은 피조물들을 화면 전면에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운다. 풀을 그림으로서 더욱 겸허해졌을 작가는 불교신자로서, 동물에 비해 에너지 소모가 적은 경제적 기능체계를 갖춘 식물에 끌렸을 것이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들이 삶의 속도를 늦추고 외부와의 교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작가가 더 보탠 것도 뺀 것도 없는, 풀에서 뽑은 선들은 조형언어에 실려 힘을 받고 증폭되어 해일처럼 밀려온다. 이미 자연에 있었던 것일 테지만, 스쳐지나가고 묻혀버리는 그 잔잔한 에너지를 명료하게 가시화하는 것이다. 마치 X-레이 사진처럼 풀을 지탱하는 크고 작은 뼈대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하상림의 작품 속의 생명, 즉 바람 불면 눕고 가물거나 계절이 바뀌면 말라붙을 연약한 존재들은 겉보기와 다른 굳건한 구조를 가졌다. 풀에서 발견되는 얽히고설킨 생명의 그물망에는 거시 구조와 조응하는 미시구조가 있다. 이러한 역설적 조합은 작가가 그동안 수많은 식물을 골고루 작품 속에 등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적 요소가 있음을 알려준다. 애초부터 기념비적인 스케일을 가지는 굳건한 뼈대의 나무나, 육종 기술에 의해 인공의 힘이 너무 가해져 형태와 색상이 고만고만하게 조율된 식물은 작품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세련된 언어는 다루기 쉬운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언어의 진면목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는 야생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하상림의 작품은 예시하고 있다.



하상림



작가 하상림은 1962년 생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독일 쾰른 미술대학 대학원 회화과(Meisterschuler)를 졸업했다. 절제된 색과 생명의 울림이 느껴지는 선으로 화면을 완성하는 그는, 지난 1989년 서울 수화랑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독일 쾰른 미술대학에서 석사학위 청구전(1989), 갤러리예향(1991), 갤러리인(1996, 2002, 2005, 2007, 2012), 미국 L.A의 Gallery MIYA(2000), 갤러리2(2010) 등에서 총 열 아홉 차례 개인전을 선보였다. 지극히 유연하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이미지를 구사하는 작가는 수없이 중첩되는 형상들을 통해 나름의 언어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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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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