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Features
  2. Public & Tech
현재 위치
  1. Features
  2. Public & Tech
현재 위치
  1. Features
  2. Public & Tech
현재 위치
  1. Features
  2. Public & Tech
Issue 76, Jan 2013

소통과 참여, 전이의 예술 ②

Typology of community art
커뮤니티아트의 유형학을 세울 것 : 공동체적 전망

이 글을 위해 주어진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커뮤니티아트의 형식적 방법과 과정을 ‘작품’으로 부를 수 있는지?” 즉, 커뮤니티아트의 형식과 그 과정이 예술적 작품이라는 규정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하는 것인데, 이것은 분명 아주 오래된 논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질문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따옴표 안의 작품은 이미 경화된 프레임 안에서 이해되는 작품이라는 뜻을 함의하며,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동어반복적 논의를 계속하게 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또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방법적 개입이 예술의 영토 안에서 승인된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질문이 다소 소비적인 논의처럼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 기획·진행 이정헌 기자 ● 글 현지연 미학자

허태원 '말들의 정원' 2012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우리 사회에서 커뮤니티아트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의 질문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뫼비우스의 띠의 끝을 찾는 행위처럼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을 폐기해야할 질문으로 치부하는 것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다. 예술작품이란 규정을 최대한 확장시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결과적으로 혹은 형식적으로 남게 되는 시각적 무엇인가에 집착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커뮤니티아트가 사회적, 정치적 행동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예술적 실천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예술행위에 대한 미학적 평가의 요구는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커뮤니티아트의 형태와 관련된 사유에서 특히나 어려움을 겪는 이유이다. 그러나 커뮤니티아트를 포함한 현대예술의 형태들을 조금만 고려한다면, 커뮤니티아트에서 비판되는 ‘예술의 증발’이 현대예술 전체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예술이 물질적인 형태보다는 일종의 미학적 경험으로 전환되면서, 사회적으로 포화된 미적 경험들은 예술의 독단적 위치를 흔드는 동시에 일상적인 경험이 예술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열어 놓았다. 태도와 개념, 참여와 전이는 저마다 예술을 ‘증발’시켰지만 현대예술의 ‘새로운’ 형태들을 발생시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현대예술의 형태들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효과적인 질문이 더 효과적인 도구와 함께 필요하다. 다시 말해 커뮤니티아트의 구체적인 프로젝트에서 생산되는 예술형태들을 ‘작품’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커뮤니티아트의 지금, 현재의 구체적인 형태는 어떠한가로 옮겨갈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예술의 실제적인 실행성과 수행성이 강조되는 커뮤니티아트에서 예술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주의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현재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형태들에서 출발해서 그 형태와 해석적 가능성을 찾아야 할 뿐이다. 커뮤니티아트는 극단적으로 유동적인 예술의 형태이다. 한 순간도 동일한 의미로 규정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형태를 취하지 않는 이 예술적 실천들을 고정시키는 순간, 그것은 경화되고 퇴색되어 버릴 것이다.




광주 대인시장 프로젝트 전경



물론 이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일례로 커뮤니티아트의 프로젝트들이 공공기관의 자금으로 진행되는 경우 그것은 종종 체제순응적이거나 잘해야 심미적인 예술적 실천들이 되거나 패턴화되고 제도화된 형태를 띠게 되며, 사목권력의 좋은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공공조각은 여전히 세워진다. 시장 앞, 마을 입구에 세운 조형물로 시장과 마을을 재생시킨다는 기획들 역시 이 모호한 커뮤니티아트에 지분을 요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름다운’ 조형물 하나는 아름다운 공동체성과 조형성보다는 키치적 풍경만을 남겨주고 있다. ‘죽어있는’ 지역을 재생시키고 사람들의 소속감을 고취하려는 시도들의 많은 수 역시 알록달록한 벽화만 남은 관광지를 양산할 뿐이다. 이런 경우 커뮤니티아트의 잔재들은 지역 관광 안내지에 포함되고, 텔레비젼의 프로그램에서는 풍물시장처럼 ‘체험의 공간’으로 소개된다.

독일의 철학자 볼프강 벨슈(Wolfgang Welsch)는 공공영역에서 포화상태에 이른 과심미화와 그 결과 눈요기로 전락한 예술을 비판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낯섦, 방해, 중단, 다름”을 예술의 실천에 있어 필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벨슈에게 있어 공공영역은 예술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너무나 아름답다. 도심의 쇼핑몰과 식당과 같은 상업적 영역, 기차역과 은행, 박물관과 같은 좀 더 공적인 영역, 그리고 사람조차도 철저하게 스타일화되고 심미화된 이 영역에 예술이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더하는 행위는 소란스럽고 무의미할 뿐이다.  여기서 “낯섦, 방해, 중단, 다름”은 이러한 피로함과 과도함을 중단시키는 저항적 ‘끼어들기’이다. 그것이 다소 곤혹스러운 개입이 될지라도 과도하게  스타일화된 공공 영역을 분절시키는 예술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벨슈가 예로 든 리차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와 같은 설치일수도 있지만 공간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분절적인 계기들이 되는 모든 형태의 예술적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커뮤니티가 자연발생적인 집단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이토 준이치는 「민주적 공공성-하버마스와 아렌트를 넘어서」에서 공동체가 매우 폐쇄적이고 균질적인 가치가 강요되는 곳으로 규정한다. 이 일본의 정치학자는 공동체가 동질의 가치를 가지고 ‘일원적이고 배타적인 귀속’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커뮤니티가 민족, 애국심, 동포애 등의 정념적인 사고로 통합되고, 통합된 이상 배타적이 되는 공동체를 의미하는가? 현재의 우리에게 이러한 공동체 개념이 효력을 갖는가?  커뮤니티가 자연발생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물론 매우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지만 확인된다. 그러나 근간에 회자되는 커뮤니티의 우연성, 일시성, 유연성은 분명 배타적, 인위적 공동체와는 다른 형태의 연대와 소속감을 갖는 특성을 요구하며 오래 전 커뮤니티의 자율 공동적 생성을 환기시킨다. 기술적, 사회적 변화가 추동한 유대의 기술의 변화에 주목한 피에르 레비(Pierre Levy)는 역사적으로 유대의 기술이 형성하는 ‘의미작용의 공간’과 관련하여 세계를 이해한다.




장흥삼색프로젝트 마을박물관 내부 전경




특히나 그가 상정하는 2000년 이후 공간인 지식의 공간(그의 「집단지성」이 쓰여진 시점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던, 그리고 실현 여부가 불확실한 공간인 지식의 공간은 네트워크 기술과 사이버 공간의 발달에 의해 추동될 것으로 여겨졌다)은 “집단적 변화로부터 부상하는 변모의 공간”이다.  지식의 공간의 “구조는 결코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주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지속의 타래들을 표현하고, 지도로 작성하고, 가시화한다.”1) ? 이곳에서 주체는 지식집단이자 인류 전체이다. 이들은 모두 각각의 활동지도를 들고 이 공간을 항해하며 돌연변이적 언어를 발명함으로써 이 새로운 공동체의 “살아있는 인간들이 주도하는 집단적 발화 체제의 형성”2) 에 기여한다. 이 ‘집단적 발화체제’는 개인 각각의 발화를 억압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그 경계들을 변경하며 어느 순간 실제적인 동원이 가능한 비담론적 지식이다. 삶과 일치하는 이 지식은 자신과 타인, 사물과 기호, 우주와의 관계를 재편할 때마다 동원되는 유대의 기술인 것이다.

커뮤니티아트는 각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실천적 행위이다. 물론 이것 역시 가정에 불과하다. 다만 커뮤니티 구성원의 개별성은 유지하되 공통의 감각을 창출하고 세계 인식의 감각을 생산하는 것, 그 결과 커뮤니티의 자율 공동적 힘이 생동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현재 우리의 활동지도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다양한 경로들을 그려 넣으며 커뮤니티아트의 실제적 형태들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커뮤니티아트의 존재론적 조건은 결국 공통의 감각을 창출한다는 목적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커뮤니티아트가 자율 공동적인 사회적 유대의 기술을 발명할 수 있다는 기대가 이렇게 수많은 커뮤니티아트 프로젝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아직도 가정할 뿐이다. 이것을 니꼴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는 “사회성의 모델”을 창출하는 것으로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예술작품은 더 이상 유토피아적이거나 상상적인 현실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예술가가 선택한 층위가 어떠하든 실존적 현실 안에서 존재 방식 혹은 행동의 모델을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3) 고 보았다.

그 역시 “예술적인 실천의 본질은 주체들 간의 관계의 발명”4)에 있다고 보았는데, 부리요는 가타리의 미학을 빌어 예술의 정치적 가능성과 형태의 정치학을 기획한다. 가타리는 예술이 주체성을 생산하는데 있어 특권적 매체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작품은 “존재론적 영토를 구체화한다. 존재론적 영토에서 이미지는 주체화의 매개체 역할, 즉 우리의 지각이 다른 가능성들에 재접속되기 전에 지각을 탈영토화하는데 적절한 ‘변속기’의 역할, 그러니까 ‘주체성에 있어 분기점을 조작하는’ 역할을 담당한다.”5) 이런 관점에서 관계의 미학은 공동체적 전망을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관계의 미학이 창출하는 예술적 형태의 저항성에 대한 전망을 그려볼 수 있다.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은 마치 과심미적 세계에 낯섦, 방해, 중단, 다름의 분기점을 조작하고 실행하는 것과 유사하다. 부리요에게 이것은 틈을 만드는 것, 예술 실행의 조건과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세계의 사회성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 된다.  




스페이스오뉴월 ‘주민 명랑 대토론회’
프로젝트 광경  



그런데 의미를 생산하거나 그 모델을 만들고 의미의 방향을 정하며 일상생활에서 그 의미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부리요에게 있어 ‘형태’이고, 이 형태는 ‘능동적인 관계와 만남’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견고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이 형태를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능동적인 관계와 만남’은 (그 상황이 예술적이든 아니든)  실행자로서의 예술가와 참여자로서의 관객들이 그 만남을 현재화하며 발명하는 것이다. 이들은 활동지도를 들고 세계를 항해하는 항해자들이기도 한데, 우리는 여기서 커뮤니티아트의 존재론적 형태들이 그것의 ‘실행’에 의해 창출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다. 최근 수원미술전시관에서는 배영환 작가의 <느리게 읽는 미술책방> 안에서 예술 매개자들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수원미술전시관은 작년과 재작년에 걸쳐 예술가들이 직접 실행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그런데 올해의 프로그램은 예술가보다 직접적인 현실에서 더 큰 실행력을 갖게 될 예술 매개자들을 교육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좀 더 길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겠지만 분명 커뮤니티아트의 기획 안에서 예술가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기획이었다. 그리고 이 실행은 수행성(performativity)이 그러하듯 독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셸 칼롱(Michel Callon)에 의하면 “수행성은 창조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다 사건은 전적으로 구체적이고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수행성은 “현재화의 체제”를 갖는다. 그것은 언제나 그가 속하고 유지하고 있는 특정한 세계 안에서 현재화되므로 수행성은 현실의 조건들과 마주해 끊임없이 논의되고, 의심되고, 현재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처럼 불확실성에, 비결정성에 가장 큰 자리를 내어주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수행한다는 것은 “형태를 만드는 것, 공통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된다.6)

이것을 관계적 형태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부르지 않아도 무관하다 관계의 미학을 현재 우리의 커뮤니티아트의 미학적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은 우선적으로 90년대 서구의 예술의 다양한 유형학을 설명하는 해석적 용어이다. 다만 관계의 창출이라는 개념을 커뮤니티아트의 위상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관계를 창출하는 예술적 형태들은 커뮤니티아트의 윤리적, 미학적 측면들과 더불어 다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공동체적 전망을 발명하는 커뮤니티아트의 유형학을 우선적으로 구성해 보는 것으로 우리는 앞서 제기했던 질문들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글은 잡설이 될 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시끄러운 수다일 뿐이다. 유형학을 구성하듯 잡스러운 수다들이 커뮤니티아트 비평의 부재라는 비판을 용서할 수 있을까?




정기현 <아트 닭장> 2012



글쓴이 현지연은 인하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미술사 석사와 루앙대학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현재는 전시기획과 동덕여대와 홍익대, 한양대 등에서 미술사와 문화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각주]
1) 피에르 레비, 「집단지성」,
권수경 역, 문학과 지성, 2002, p.210  
2) 같은 책 p.91  
3) 니꼴라 부리요, <관계의 미학>,
현지연 역, 미진사, 2011, p.21  
4) 같은 책 p.36  
5) 같은 책 p.180  
6) Jerome Denis, 「Les nouveaux visages de la performativite」, Etudes de communication, 29, pp. 7~24.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현지연 미학자

Tags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