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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82, Jul 2013

공공미술 비하인드 스토리 ②

Chicano Mural Movement
치카노 벽화 운동

“쓸 데 없는 벽화 같은 것 말고~” 요즘 공공미술을 말할 때 심심치 않게 툭 하고 튀어나오는 말이다. ‘벽화는 구석기 시대부터 존재해왔다’는 거창한 말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알타미라 벽화를 생각해 보라!) 예로부터 체제 저항이나 공공 환경 조성의 가장 요긴한 매체 중 하나로 계속 쓰여왔는데, 요즘은 찬밥 신세가 말이 아니다. 아마 본지 5월호에서 이미 다룬 바 있듯이 주민과 동기화가 되지 않거나, 사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등의 문제가 클 것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사례도 분명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치카노 벽화 운동. 이 운동은 1960년대 멕시칸-아메리칸 계열의 아이덴티티 폴리틱의 일환으로 미국 남서부지역에서 촉발되어, 이후 미국 전역에 영향을 미쳤던 자생적 공공벽화 운동이다. 이번 달에는 공공 벽화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치카노 벽화 운동의 면모에 대해서 살펴봤다.
● 기획·글 안대웅 기자

이스트 로스 스트리트스케이퍼즈(East Los Streetscapers)
좌: 신부와 신랑(The Bride and Groom)
우: 새로운 불(El Nuevo Fuego)> 24×25m 1985 Victor Closing Company Building, 242 South Broadway,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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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카노(Chicano)? 일단 말부터 생소하다. 치카노는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칸-아메리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1986년 미-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에 남게 된 멕시코인 노동자를 백인이 경멸적 의미로 부르는 말이었는데, (스페인어를 정확하게 발음할 수 없는 미국인이 ‘메카히노’ 혹은 ‘멕시카노’를 치카노 잘못 들었다는 설도 있다.) 1960년대 미국 내 인권 운동 시대를 거치면서 좁게는 멕시코인을, 넓게는 히스패닉 전체를 대상으로 자신의 민족을 정체화시킨 말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역사상 인권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다. 소수 민족, 젠더와 페미니즘,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의식, 기성세대에 대한 반문화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소수인종 세력 중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마틴 루터 킹의 흑인인권운동이 전개되는가 하면, 같은 시기에 세자르 차베스(Cesar Chavez)를 필두로 농장을 중심으로 히스패닉의 인권 운동이 전개됐다. (당시 멕시칸-아메리칸의 90%는 노동자나 농민 계층에 속해있었으며, 주류 백인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채 갖은 사회적 경제적 차별을 겪고 있었다.) 차베스가 이끌던 농장노동자조합은 델라노에서 새크라멘토까지 대대적인 항의 행진을 벌였고, 이것은 곧 이어 치카노 예술 운동의 촉발로 이어졌다. 이들은 먼저 그들 자신을 의미하는 ‘멕시칸-아메리칸’을 ‘치카노’로 개명한다. 자신을 낮게 부르는 부정적인 말을 거꾸로 주체 인식의 계기로 전환시킨 것이다. 치카노는 더 이상 백인 주류문화에 귀속되지 못한 타자로서가 아닌, 자신들의 유산, 즉 멕시코 원주민 문화를 정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치카노 예술 운동에서 벽화 만큼 널리 행해진 것도 없다. 미적 즐거움이 아닌, 정치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 그러니까 치카노를 선전, 선동하는 것이 치카노 벽화의 첫 번째 목표였다. 그들은 주류 미술계에 대해 (치카노 운동 일반과 같이) 분리주의적 입장을 표명했으며 자신들의 공동체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티브와 전통적 도상을 차용해 벽화, 포스터, 행위 예술 등의 형태로 확산시켰다. 이 중 벽화는 멕시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로 대표되는 멕시코 벽화 운동이라는 정통성과 함께 ,벽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공공에게 열린 성격 때문에 아주 유용한 매체였고,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최초의 치카노 벽화는 캘리포니아의 델 레이에 있던 엘 테아트로 캄페시노 센터에서 시작됐다. 1968년 안토니오 베르날(Antonio Bernal)이 두 개의 판넬에 각 각 그린 이 작품은, 최초일 뿐만 아니라, 이후 1970년대 정치적 벽화에 나오는 도상의 예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두 벽화 중 한 쪽 파트에는 프레-콜럼비안의 리더가 일렬로 서 있다.




ASCO <첫 번째 저녁(대난동 후에) 
First Supper (After a Major Riot)> 1974




보남파크(Bonampak) 신전의 벽화를 연상시키는 이 벽화는 어두운 피부의 원주민 혈통을 드러냄으로써 인종적 자부심을 강조했고, 마찬가지로 그 일환으로 마야스타일의 도상이 활용됐다. 다른 쪽 벽에는 1960년대까지의 멕시코 혁명의 리더가,  멕시코 혁명의 전설적인 여전사였던 라 델리타(La Adelita)를 필두로 줄 지어져 있다. 뒤따라 서 있는 인물들은 순서대로 프란치스코 “판초” 빌라(Francisco “Pancho” Villa), 에밀리아노 자파라(Emiliano Zapara), 호아퀸 무리에타(Joaquin Murieta), 농장노동자연합의 세자르 차베즈, 뉴멕시코 랜드 그랜트(Land Grants) 운동의 레이즈 로페즈 티저리나(Reies Lopez Tijerina), 블랙 팬더 단원 그리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다. 따라서 벽화는 멕시코인에게 있어 과거의 중대한 사건과 치카노 운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들로 채워진 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프레 콜롬비안 멕시코의 토착적 문화와 혁명, 1960년대 이후 흑인 인권 운동, 그리고 그 이후에 탄생하게 될 멕시칸/치카노 운동의 리더들에게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베르날의 벽화를 시발점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수많은 벽화 콜렉티브 및 치카노 갤러리가 탄생하게 된다. 벽화가들은 때와 상황에 따라 콜렉티브를 조직하고 해체하는 일을 반복하며 벽화 운동을 지속했다. 샌 프란시스코에서 두각을 나타낸 벽화 콜렉티브는 비영리 공간 갤러리아 데 라 라자(Galeria de la Raza)를 중심으로 활동한 멕시칸 아메리칸 자유 예술 프론트(Mexican American Liberation Art Front, MALAF)였다. 네 명의 예술가, 마뉴엘 에르난데스-트루히요(Manuel Hernandez-Trujillo), 말라퀴아스 몬토야(Malaquias Montoya), 에스테반 비야(Esteban Villa), 그리고 르네 야네츠(Rene Yanez)로 이뤄진 이 콜렉티브는 68년부터 2년 동안 미션 디스트릭트를 중심으로 벽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중 몇 몇은 새크라멘토 스테이트 칼리지의 학생들과 함께 레벨 치카노 아트 프론트(Rebel Chicano Art Front, 이후 Royal Chicano Air Force로 개명)라는 아트 콜렉티브를 조직해 이후 샌 디에고 치카노 공원과 새크라멘토 등지에 많은 벽화를 남기게 된다. 또 산타 페에서는 콜렉티브 ‘아르떼 과달루파노 데 아즈틀란(Artes Guadalupanos de Aztlan)’가 넘쳐나는 알콜과 마약중독자들과 함께 벽화 운동을 전개했으며, 샌 디에고에서는 로스 톨테카스 엔 아즈틀란(Los Toltecas en Aztlan)이라는 콜렉티브가 그 일을 맡았다. 특히 톨테카스는 비영리 공간 ‘센트로 컬쳐럴 데 라 라자(Centro Cultural de la Raza)’를 만들어 치카노를 위한 멕시코와 아크틀란의 전통 연극, 음악, 춤, 예술, 공예 등에 관한 강좌를 열기도 했다.  




에스테반 비야(Esteban Villa) 
<이중적 문화 사회에서의 치카노 사회 운동의 출현
 (Emergence of the Chicano Social Struggle in a Bicultural Society)> 
부분 1969-1970 워싱턴 네이버후드 센터
(Washington Neighborhood Center)  



한편 L.A.동부에서는 괴츠 갤러리(Goez Imports and Fine Arts Gallery)가 벽화 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곤잘레스 형제는 치카노 예술을 만든 멕시코 조상을 표현한 <우리의 예술의 탄생(The Birth of Our Art)>을 갤러리 오픈에 맞춰 파사드에 작업하기도 했다.) 괴츠갤러리는 이윤 추구 공간으로 출범해, 멕시코-스페인의 순수예술 부흥, 프레-콜롬비안 전통 예술품과 현대 미술 작품의 판매, 가구, 프레임, 광고디자인, 벽화, 기념비, 성당 커스텀 디자인까지 다양한 사업을 벌였으며, 이후에는 펀딩을 통해 노동 계층 커뮤니티의 생활공간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의 커뮤니티 벽화 프로그램 위원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여기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동부 LA 벽화 커뮤니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데이비드 보렐로는 로스 도스 스트리트스케이퍼(Los Dos Streetscapers)를 조직해 맹위를 떨쳤으며, 찰스 “가토” 펠릭스(Charles “Gato” Felix)는 에스트라다 코트(Estrada Courts) 지역의 주민 벽화 프로그램을 추진해 수많은 벽화를 남겼다.

특히 문제 청소년을 위한 기술 직업 훈련 프로그램 의 일환으로 청소년들에게 여름 기간 중 직업을 제공하기 위해 제안된 에스트라다 벽화 프로젝트는, 주민들의 전례없는 직간접적 참여로 자생적 공동체 벽화를 생산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1973년에서 1978년까지 총 82개의 각각 7×10m의 대형 벽화들이 완성되며 이 지역 경계의 담들에도 20여개의 작은 벽화들이 그려지면서 에스트라다 벽화는 성공적인 저소득층 주거 벽화의 예로 지속적으로 칭송받게 된다. 또 한편으로 이 프로젝트에는 미래에 치카노 벽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어린 윌리 헤론(Willie Heron)이 참여하기도 했다. 헤론은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던 전형적인 에스트라다 벽화가로서, 이후 아스코(ASCO)란 전위 벽화 퍼포먼스 그룹을 조직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아스코는 <걷는 벽화(Walking Murals>(1972), <즉석 벽화(Instant Mural>(1974) 등의 퍼포먼스를 통해 전통적 벽화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으며, 이후 현재까지 대표적인 치카노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다.



ASCO <걷는 벽화(Walking  Murals)> 1972  
* 크리스마스이브에 ASCO  멤버들이 이스트 LA의 중심 
지역으로 걸어 내려가면서 펼친 퍼포먼스다. 
그롱크는 초록색 트리로, 헤론은 
“그를 둘러싼 환경에 지루해진” 벽화로, 
 발데즈는 치카노 미술의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였던 과달루페 성모로 분장했다.  



이렇듯, 예술을 통해 치열하게 자기 정체성을 재규정하려고 했던 치카노 벽화 운동은, 미술사학자 김진아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인권 운동이 약화되는 것과 함께 제1기를 마감한다. 하지만 그 이후 치카노 벽화는 퍼센트법 등의 제도와 만나 더욱 전국으로 확산되며 제2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주디스 바카(Judith Baca)가 대표적 인물이다. 치카노 벽화는 초기 운동의 성격을 넘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도시나 국가 차원의 ‘공공미술’로서 발전해나간다. 그와 함께 흑인문화와 여성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며 민족적 성격이 아닌 다문화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 또 벽화의 주제와 상징형식, 그와 동시에 초기 벽화운동에서 나타났던 기술적 문제가 더욱 전문적으로 연구되어, ‘훌륭한 미술’로 변모케 됐다. 바카의 <로스앤젤레스의 장벽(The Great Wall of Los Angeles)>(1974-84)은 총 40명의 역사학자, 민속학자가 참여했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 출신인 450명의 학생과 선도 대상 청소년, 40명의 보조 작가, 100명이 넘는 보조 스텝의 협동 작업을 통해 완성됐다. 선사시대의 푸에블로 족의 이야기에서 동시대 도시 모습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역사적 시간을 840m의 긴 벽에 재현한 걸작 중의 걸작이다. 치카노 벽화 운동가 걸어온 길은 바로 지금,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들이 추구했던 공동체적 주체성의 재규정, 자발·자생적 참여와 연대는 주류 미술에 대항하는 한 방법론을 제시했다. 또한 공동체적 삶과 예술을 항상 함께 생각했던 점은 90년대 행동주의적 공공미술의 한 선례로서도 가치가 있다.  




주디스 바카(Judith Baca)
 <로스앤젤레스의 장벽(Great Wall of L.A.)> 
총 800m 1974-84 산 페르난도 벨리
(San Fernando Valley)의 수로, L.A.




[참고문헌]
김진아, 「자생적 공공미술의 출범: 치카노 벽화운동(1968-1975)」, 미술사학 22,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8
Goldman, Shifra. “Siqueiros and Three Early Murals in Los Angeles.” Art Journal 33. Summer 1974
http://en.wikipedia.org/wiki/Centro_Cultural_de_la_Raza
http://en.wikipedia.org/wiki/Chicano_Movement
http://en.wikipedia.org/wiki/East_Los_Streetscapers.
http://en.wikipedia.org/wiki/Great_Wall_of_Los_Ange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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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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