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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0, Sep 2021

강용운, 나를 춤추다

2021.6.29 - 2021.10.31 광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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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추구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새로운 미술 즉, 추상을 한다는 것은 타성에 젖은 기성과의 결별, 구태를 비판함으로써 새로움의 힘을 얻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 새로움의 지향은 평생의 지독한 고독과 빠져들기 쉬운 자기부정의 개미지옥을 탈출하려는 투쟁에 들어서는 일이었다. 1950년대 부상하던 새로운 작가들을 포용한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미술작가초대전>을 발판으로 비상하던 강용운이 바로 후자의 경우였다. 방근택 미술평론가는 1959년 <현대미술작가초대전>의 여러 작가 작품 중 강용운은 “용해액의 화학적 변화 작용을 이용한 점살법(點撒法)을 쓰고 있는데 마치 쉬르의 데까르꼬마니와 같은 그로테스크란 것이었다”1)고 하였다. 그는 1960년에도 강용운의 작품을 “소품이면서도 깊고 큰 폭을 내포한 역작”이라 하였다. 광주에서 전시도 함께하고 새로운 미술에 대해 열띠게 토론했던 방근택은 이미 강용운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현실주의가 선택한 의도하지 않은 방식에 의한 새로움을 강용운은 추상성에 대입하였다. 앵포르멜 초기의 표면 질감에 탐닉하던 작가들과 달리 그는 작은 화폭 안에서 추상화에 대한 성찰과 추상에 이르기 위한 기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1962년 <현대미술작가초대전>의 전위적 성격을 몇 개의 경향으로 구분한 이경성은 화면의 표면구조나 조직적 성질을 통해 표현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텍스처(texture)파 중에서 강용운을 ‘피부파’로 명명하였다.2) 지나치게 표면의 효과에 집중하는 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럼에도 강용운의 다양한 표현에 관한 연구 즉 ‘이질 감각의 강렬한 집념’만은 상찬하였다. 구상이 주도적이던 남도 화단에서 추상화를 전개해가던 그가 느꼈을 고독은 당대 현대미술의 옹호자들 사이에서도 그리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기에 더욱 외로웠을 것이다. 1963년 <현대작가초대전>의 서양화가들은 추상, 반추상, 앵포르멜 계열로 구분되었는데 강용운과 양수아가 대표적인 앵포르멜 작가로 언급되었다. 이미 다른 작가들이 앵포르멜에서부터 추상의 이름으로 내용적인 추상을 추구할 때 여전히 이들은 순수한 표면의 언어를 찾고 있었다. 


“안료가 유동하듯 흐르고 또 흩뿌려지는 화면은” 액션페인팅의 제스처와 물질성을 상상케 한다. 의식적으로 조작된 형태가 아니라 회화의 기본인 색채, 붓, 물감 그리고 질감과 화가의 몸짓이 드러나는 화면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가져온다. 그런데 강용운은 “스스로 오늘의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보다 더 새로운 내일의 자기를 창조할 수 있다. 예술은 생명의 구토(嘔吐)여야 한다”는 예술론을 피력하였다.3) 시 형식으로서 순수한 예술의 당위성을 예술 안에서 찾은 것이지만 그의 화면이 갖는 예술적 의미를 납득시키기에는 구체성이 결여된 지나치게 추상화된 면이 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순수지향적인 태도는 화업을 관통하는 자세다.




<축하> 1950 종이에 수채 

40×40cm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강용운 작품의 특징은 색과 제스처 그리고 우연의 효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싱싱한 색채와 굵은 붓질로 야수파적인 성향을 보이던 초기작 1940년대 작품에서도 그러하였다. 거친 붓질에서 나아가 심리적인 화면과 우연의 효과가 강해진 1950-1960년대의 화면은 초현실주의에서 나아간 결과다. 부조리, 뜻밖의 결과, 전혀 의도치 않음과 같은 것을 지향하는 그의 태도는 오지호를 중심으로 한 인상적 구상이 강세를 띤 호남 화단에서 이례적인 것이다. 또한 한국 화단에서 이토록 화가로서 등장부터 새로움과 추상적인 경향을 지향한 경우는 드물다. 형태에서부터 표현으로 나아가는 경향과 달리 그는 추상화의 완벽한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신문에서 오지호와 예술에 대한 격론을 팽팽히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가 주장하는 회화의 본질은 색과 선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추상이 영원히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외부의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앵포르멜이 시들어가던 1960년대에 여전히 추상의 힘을 믿은 것도 그러한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생전에 1999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화업 60년의 전시를 가졌다. 국내 최초의 지자체미술관 역할과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얻은 자긍심의 열매 중 일부였다. 생존 작가의 추상미술 전시는 지역 화단의 일부를 이끈 작가에 관한 관심이기도 했다. 이때 그의 작품세계는 1940-1950년 ‘추상화 탐색기’, 1951-1969년 ‘도깨비대학과 앵포르멜’, 1970-1989년 ‘무한한 우주공간과 투병 생활’, 1990-1999년 ‘관조와 승화의 세계’, 네 시기로 구분됐다. ‘추상화 탐색기’라는 구분법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를 이해하는 전제는 ‘추상화’다. 구상 주도의 화단에서 고독하였을 것이나 이토록 독보적으로 인정되는 상황을 결코 고립이라 지칭할 수는 없다. 그의 추상화 작품은 결코 김환기와 같은 주변의 유명세에 억눌려 묻힌 것도 아니다. 추상의 세계는 단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용운이 실제로 오지호와 더불어 호남 화단의 산맥이 되었던 것은 오히려 선명하게 구상회화와 구분되는 세계를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모더니즘의 기수로서, 여러 인사와의 인문학적 교유와 시대의 혈기를 드러내었던 그의 작품은 색과 선으로 구성되었으며, 후에 강렬한 공간감 그리기와 지우기의 방식이라는 대비적인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강렬한 붓질로 형태를 잡고 색으로 채워진 화면은 깊은 공간감을 도출한다. 이는 물감을 흘리거나 뿌려서 만들어진 화사한 화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기법이다. 이들은 결코 서로 엉키는 법이 없이 시간순으로 드러난다. 한편 화면에서 형태를 지워내거나 다른 색을 얹어 아래층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방식 등 형태 이전의 제스처를 지워냄으로써 화면을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다. 지워지는 것들은 시간 축적의 결과이며 무한한 깊이감을 촉발하는 강렬한 붓질과 색채의 대립 또한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워내기, 흘리기, 그리기의 반복적인 행위가 화면에 안착했을 때 눈앞에 가득한 것은 작가의 신체성이다. 




<예술가 藝術家> 1957 목판에 유채 

33.3×24.2cm 유족 소장




형태가 사라지고 색과 선 그리고 의미만이 있던 그의 화면은 1990년대 들어 형상을 유추케 하는 작풍으로 변화했다. 부서진 색채 조각들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군상들, 두 사람의 대화 같은 것들이 가시화됐다. 색과 선으로만 그려내던 추상은 동양의 사상과 유머와 같은 내용을 입고 변화한 것이다. 이를테면 <대화>(1996)에서는 짧은 직선의 강렬하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선들이 쏟아져 박히는 느낌이 있는데, 이 짧은 선은 두 인물을 형상화한다. 비수처럼 박히는 언어의 날 선 관계성이 기본적인 추상화의 원리로 재현되지만 매우 서사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적이고 이야기 구조를 지양하는 추상화에 대한 태도는 삶을 담은 내용으로 변화하였다. 인간, 풍경과 같은 것을 상기시키는 화면의 등장이 추상화의 퇴보가 아닌 것은 추상적으로 문자를 표현해내는 것과 동시에 나타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현실에 파격을 더하는 경지에 대한 시도를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이란 작가 생의 기록이자 삶의 태도, 지식의 과시와 같은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 작가의 제스처에 기대기 십상인 추상화는 현혹하는 색채이든 강력한 힘의 선이든 작가의 신념을 보여준다. 구상회화가 강세인 호남 화단에서 강용운은 추상화를 구현하였다. 일본 잡지에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소개되어 있었다. 새로운 미술에 대한 정보는 동시대 대개의 화가가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 누구든 이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미술의 본질에 대한 꾸준한 탐색, 그것은 어떤 시도를 하든 용기가 필요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작품인 탓에 망설이게 한다. 그런 점에서 새로움의 구사는 순수한 미술에 대한 강렬한 선망을 가진 이의 운명이었다.  


[각주]

1) “한국화단의 현황”, 『동아일보』, 1959. 4. 282)  “고독한 저항의 지속”, 『조선일보』, 1962. 4. 183)  “예술은 생명의 구토”, 『조선일보』, 1965. 6. 10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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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은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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