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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3, Jun 2014

미술관의 공간

Space of Art Museum

헤르조그 앤 드 뮈론(Herzog & de Meuron)이 밴쿠버 아트 갤러리(Vancouver Art Gallery)의 디자인을 맡아 다시금 화제다. 테이트 모던의 건축을 맡아 주목을 끈 이 그룹은 현재 홍콩 M+의 건축도 진행 중이다. 폐공간을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구축해 낸 그들이 또 다시 어떤 현대미술관과 갤러리를 완성해낼지 이목이 쏠려 있다. 물론, 한편으로 이들은 ‘몇몇 스타 건축가들이 여러 미술관의 디자인을 맡는 것이 옳은가’란 비판의 중심에 선 주인공이기도 하다. 글로벌리즘 때문에 미술관 건축이 획일화된다는 우려부터, 일명 스타 건축이 과연 미술관의 소장품을 포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까지 그 목소리는 다양하다.
● 기획·진행 문선아 기자

Zaha Hadid Architects 'Heydar Aliyev Cultural Center' in Baku, Azerbaijan Exterior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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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미술관 건축의 현황은 어떤가. 이미 건축됐거나 건축되고 있는 미술관들은 그 곳을 채울 콘텐츠와 어떤 연동을 맺으며 지어졌으며 계획되고 있는가? 본래, 미술관 건축은 미술관의 비전과 긴밀히 닿아 있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빌바오 구겐하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구겐하임 뉴욕, 렌초 피아노(Renzo Piano),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 지안프랑코 프란키니(Gianfranco Franchini)의 퐁피두 등은 각 미술관의 비전과 목표를 여실히 드러내며 건축됐고, 이에 성공적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번 특집에서는 스타 건축가들이 어떤 식으로 아이덴티티를 공간을 통해 구축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 부분이 미술관의 정체성 형성과 부딪히지는 않는지, 현황에 대한 문제점은 없는지 등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현대의 미술관은 어떤 건축을 통해 공간성을 드러내야하는지 제시한다.  



SPECIAL FEATURE Ⅰ

미술관 짓는 스타 건축가들_문선아


SPECIAL FEATURE  Ⅱ

미술관, 문화산업의 기념비인가?_김정혜


SPECIAL FEATURE  Ⅲ

미술관의 공간-비전과 실제_강성원





Zaha Hadid Architects 

<Chanel mobile art pavilion> 

in Paris, France Interior view 





Special Feature Ⅰ

미술관 짓는 스타 건축가들

● 문선아 기자



자하 하디드(Zaha Hadid), 렘 쿨하스(Rem Kool haas), 헤르조그 앤 드 뮈론(Herzorg and de Meuron)…. 가히 익숙한 이름들이다. 렘 쿨하스는 이미 십년 전 삼성미술관 리움의 건축가 3인 중 한 명이자 서울대학교 미술관의 건축가로 우리에게 이름을 알렸고, 자하 하디드는 최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ongdaemun Design Plaza, 이하 DDP) 설계로 논란만큼이나 큰 유명세를 치렀다. 테이트 모던을 새롭게 탄생시켰던 헤르조그 앤 드 뮈론은 아직 한국에는 미술과 관련된 건축을 짓지 않았지만, 전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는 홍콩 M+의 설계를 맡으면서 화제의 중심에 있다. 독자적이거나 혹은 팀을 꾸려 세계 곳곳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수많은 건축물들을 설계·전파하고 있는 이들. 이른바 ‘스타 건축가(Star chitect)’들이다. 이들이 최근, 혹은 그 이전부터 꾸준히 관심을 보여 온 분야가 바로 ‘미술관 건축.’ “지난 50년 동안 수많은 미술가들이 회화, 조각, 영상을 작품 주위의 건축공간으로 확장시켜 왔고, 또 많은 건축가들은 시각예술과 관계를 맺어 왔다. 


이 두 분야의 조우는 현재의 문화·경제 지형에서 이미지 만들기와 공간 구성하기의 근간이 되는 지점이다.”라는 저명한 미술비평가 할 포스터(Hal Poster)의 말을 반영이라도 하듯, 위의 건축가들은 앞 다퉈 자신들의 프로젝트 리스트에 전 세계 곳곳에 분포한 다수의 미술관 건축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헤르조그 앤 드 뮈론(이하 헤르조그)은 독일 뮌헨의 괴츠 컬렉션(Goetz Collection, 1992), 영국 뱅크사이드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2000), 미국 캘리포니아의 엠에이치 드 영 기념박물관(M. H. de Young Memorial Museum, 2005), 미국 미네소타의 워커아트센터(Walker Art Center expansion, 2005), 스페인 캐너리 아일랜드의 테네리프 예술 공간(Ten erife Espacio de las Artes, 2008), 스위스 바젤의 문화 박물관(Museum der Kulturen, 2010), 영국 런던의 서펀타인 갤러리 써머 파빌리온(Serpentine Gallery Pavilion, 2012), 미국 뉴욕의 파리쉬 미술관(Parrish Art Museum, 2012), 미국 플로리다의 페르즈 마이애미 미술관(Pérez Art Museum Miami, 2013) 등을 지었고, 최근에는 홍콩 서구룡문화지구의 M+와 캐나다의 밴쿠버 아트 갤러리(Vancouver Art Gallery)의 건축도 맡았다. 




Herzog & de Meuron 

<M+ Winning Design - Found Space> 

ⓒ Herzog & de Meuron Courtesy of Herzog &

 de Meuron and 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 Authority




자하 하디드(이하 하디드)는 어떤가. 영국 런던의 서펀타인 갤러리 써머 파빌리온(Serpentine Gallery Pavilion, 2000)을 시작으로, 미국 오하이오의 로젠탈 동시대미술센터(Rosenthal Center for Contem porary Art, 2003), 도쿄, 홍콩, 뉴욕, 런던, 파리, 모스코를 아우르는 샤넬 모바일 아트 파빌리온(Chanel Mobile Art Pavilion, 2006-08), 이태리 로마의 맥시(MAXXI - National Museum of the 21st Century Arts, 1998-2010), 영국 스코틀랜드의 리버사이드 박물관(Riverside Museum, development of Glasgow Transport Museum, 2007-11), 영국 런던의 로카 런던 갤러리(Roca London Gallery, 2009-11), 아제르바이잔의 헤이다알리에이 문화 센터(Heydar Aliyev Cultural Centre, 2007-12), 미국 미시간의 엘리 에디스 미술관(Eli and Edythe Broad Art Museum, 2010-12)을 건축했으며, 최근 7년 여의 시간을 걸쳐 이뤄낸 DDP(2008-14)를 공개하기도 했다. 


하디드의 선배 격인 렘 쿨하스(이하 쿨하스, 실제로 하디드는 그의 건축팀인 OMA에서 일한 바 있다.) 역시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쿤스트할(Kunsthal, 1993), 미국 라스베가스의 구겐하임 에르미타쥬 미술관(Gu ggen heim Hermitage Museum (Las Vegas, 1980, 2002), 서울의 삼성미술관 리움 - 어린이 센터(The Children’s Centre, Leeum, Samsung Museum of Art, 2004), 영국 런던의 서펀타인 써머 파빌리온(Serpentine Gallery Pavilion, 2006), 서울대학교 미술관(Seoul National Uni versity Museum of Art, 2003-2005)을 건축했으며, 최근에는 유고슬라비아 쳬티네에 마리나 아브라모빅 커뮤니티 센터(Marina Abramović Community Centre Obod Cetinje - MACCOC, 2012-)를 건축하고 있다. 물론 더 다양한 건축 분야에 참여하고 있지만, 미술관 건축 리스트만 보아도 가늠할 수 있는 사실은, 이들이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허물고 굵직굵직한 미술관 건축을 도맡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자연스레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게 되는데, 이 스타 건축가들이 과연 얼마나 지역의 맥락을 이해하고 미술관의 소장품들을 고려하면서 건축에 임하는가 하는 것이다. 




Rem Koolhaas / OMA 

<Faena Arts Center Miami Beach> 

in Miami, Florida, USA Exterior view




건축에 대한  스스로의 아이덴티티가 강한 이들이, 미술관의 지역적, 기능적 특수성보다 ‘이미지 만들기(Image-Making)’에 주력하지는 않는가 하는 우려다. 요컨대 건물의 기능보다는 건물 표면의 효과가 과장되거나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비판하기에 앞서 확인해야할 사항이 있다. 우리가 뭉뚱그려 ‘스타 건축가들’이라고 칭하는 그룹이 크게 두 입장으로 나뉜다는 점. 한 쪽은 미술관 건축을 그 자체로 또 다른 예술로 파악하는 입장이고, 다른 한 쪽은 예술품을 위한 건축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아마도 전자에 쿨하스와 하디드를, 후자에 헤르조그와 그 스승격인 스위스 개념미술작가 레미 조그(Rémy Zaugg)를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미술관 건축에 대한 생각 역시 조금씩 다르게 드러난다. 먼저 미술관 건축 시 지역성의 반영에 대해서는, 서로 입을 모아 지역의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먼저, 쿨하스와 하디드의 입장을 살펴보자. 하디드는 자신들이 건축에 임하게 되면 가장 처음으로 하는 것이 “환경, 지형, 장소의 흐름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지역 환경과의 연결선들과 순환선들을 그 장소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문을 열면서 건축과 역사적 장소성에 대한 논란을 다시 한 번 일으킨 DDP에 대해서도 본래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관문이었던 옛 도시 성곽은 이번 작업의 핵심 요소였다고 밝혔다. 성곽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새롭게 조성된 지형을 제안했고, 그것이 실제로 공원과 디자인 센터를 연결하는 건축적인 풍경을 연출토록 했다고. 또한 그 장소가 운동장이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조명탑 역시 그대로 보존했다는 것이다. 쿨하스는 건축이 선행되기 이전에 그 지역의 사회 현상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편집증적으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통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그 사회에 대한 통계를 만들어 건축에 반영하는 것. 그 한 예로 서울대학교 미술관의 경우 그는 데이터에 기반해 설계를 3번이나 바꾸었다. 한편, 헤르조그 측 역시 지역성의 반영에 대해 동의한다. 자크 헤르조그는 “건축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가능한 건축을 만든다는 점에서, 주어진 텍스트 내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건축에 지역의 사회·역사적 맥락을 십분 고려하고 있음을 밝혔다. 



Herzog & De Meuron 

<M. H. de Young Memorial Museum> 

in San Francisco, California, USA Interior view




또한 그는 아방가르드 디자인은 미친 것 같은 형식이거나 가장 불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자신은 일명 우상화된 건축, 매우 복잡한 건축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첨언했다. 따라서 자신들은 디자인의 단순성을 생각할 때, 인문 예술과 건축의 전통 안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 전통이야말로 수 백, 수 천 년을 이어온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란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스타 건축가들의 건축물은 지나치게 획일적이라기보다 지역에 맞게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세 팀은 입장에선 공통적이나 그 방법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장소의 지역성을 하디드와 쿨하스는 형식-건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면(쿨하스는 본인이 건축했던 쿤스트할에 대해 “어떻게 하면 미술관을 네 개의 독립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연속적인 스파이럴(Spiral)을 형성하면서 모순적인 경험의 연속으로 설계하는가가 문제였다”고 밝힌 바 있다), 헤르조그는 보다 미술관과 연계하여 내용-건축적으로 반영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하디드와 쿨하스가 미술관 건축물을 또 하나의 예술로 인식하여 각각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나선형 구조와 위상기하학에 따른 구조를 어떻게 그 본래의 지형과 연관시키고 그 구조에 다양한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헤르조그는 이상적인 미술관의 건축적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한 레미 조그의 후예로서 보다 미술관의 구조에 깊이 관여하며 미술관을 위한 건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세 건축가의 이상적인 미술관 건축에 대한 생각 역시 다르게 나타난다. 쿨하스는 공간의 가변성과 다양한 활용에 관심이 많으며, 공간의 성격을 단정해서 정의하기보다는 다양한 활용의 가능성을 갖도록 한다. 미술관 건축여부를 떠나 건축물의 설계안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항상 기존 건축물들의 프로그램에 의문을 가지고 새로운 운영방식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의문을 제시하는 범주는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의 변화, 그리고 기술의 발전에 따른 변화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미술관 건축 역시 그의 이러한 성향을 반영하며, 그가 설계한 미술관은 오히려 어떠한 프로그램으로 전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거나 새로운 제안을 한다. 




Zaha Hadid Architects 

<Serpentine Sackler Gallery> in London, UK 

ⓒ 2013 Luke Hayes Exterior view




하디드 역시, 미술관을 미술관으로 규정짓기보다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 건축의 활용가능성을 더 중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새로운 기술을 건축에 접목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미술과 건축이 만나는 지점은 흔히 신소재, 신기술, 뉴미디어에 주목하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기술의 발전이 디자인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다시 나에게 영감을 준다. 훌륭한 작품은 늘 이 같은 강력한 상호작용을 통해 탄생하는 법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하디드의 이러한 성향은 사실, 그의 불가능해 보이는 미래적 건축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건축계에서 오랫동안 ‘페이퍼 아키틱트(paper architect)’로 불렸는데, 기술의 발달 이전까지 그의 건축이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헤르조그 측은 이상적인 미술관 건축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특히 비전과 미술관 컬렉션은 모든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역시, 미술관이 주로 컬렉션을 보여줄 것이냐, 아니면 항상 변화하는 일시적인 전시들을 보여줄 것이냐 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헤르조그의 업무 파트너 아스칸(Ascan Mergenthaler)의 답변)”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성공적인 미술관에 대해서는 그것이 건축물의 퀄리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프로그램에 달려있다고 첨언했다. 


헤르조그 측의 이상적 미술관 건축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레미 조그의 『내가 꿈꾸는 미술관, 혹은 작품과 사람들을 위한 공간(das kunst museum das ich mir ertraume, oder der ort des werkes und des menschen)』을 상기시켜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관람객이 작품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 건축의 조건들을 바닥, 벽, 천장의 기울기와 모양부터 공간의 비례, 출입구, 조명, 실(Room)의 배치에 까지 걸쳐 다루고 있다. 이 이론을 따르는 듯, 헤르조그의 건축은 관람객의 시야 확보, 작품 감상 방해 저지 등을 위하여 널찍한 수직·수평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미술관 건축이 레미 조그의 수직·수평의 형태나 정확한 치수, 각도, 비율 등을 따라야하는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방법론은 유효한 듯 보인다. 미술관 건축 시에 건축물을 단독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있을 관람객을 고려하여 진입부의 구성, 전시 공간 구성, 채광형식, 동선체계 등을 고려하는 방식은 현대건축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항으로 변모했다. 이는 헤르조그 측과 입장이 다르다고 파악되는 쿨하스와 하디드 역시 자연스레 고려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쿨하스는 한 인터뷰에서 “당신의 건축철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나의 철학을 갖는다는 게 비생산적인 일이며, 변화하는 사회에서 철학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라고 대답했으며, 헤르조그 측 역시 “우리가 꽤나 많은 수의 미술관들을 지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가 미술관을 디자인하는데 어떤 특정한 공식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프로젝트는 각기 다르다.”고 밝힌 바 있다. 바꿔 말하면, 스타건축가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그 지역과 미술관의 특성을 고려하여 건축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스케일이나 화려한 외관, 그 인기 등에 가려 그들의 노력이 가려지고 있는 상황일는지도 모른다.   




SANAA <New Museum> 

in New York, NY, USA Photo ⓒ Takashi Okamoto 

Courtesy of SANAA Exterior view  





Special Feature 

미술관, 문화산업의 기념비인가?

● 김정혜 건축이론가



21세기에 들어 전세계적으로 미술관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과 소위 스타 건축가들의 대규모 건축 시장 독점은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의 확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쇠락한 근대 산업 도시들은 1990년대 중 후반에 들어서면서 문화(실제로는 문화-엔터테인먼트 산업)를 앞세워 브랜드화 하는 도시 마케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근대 광산도시에서 신 문화 산업 도시로 성공적으로 탈바꿈 한 빌바오 시의 경우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 한 구겐하임 뮤지엄 빌바오 건축물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면서 관광 수익에 큰 몫을 하게 되었고, 이 예를 따라 유사한 행보를 걸어 온 도시마다 빌바오 효과를 노리며 스타 건축가의 브랜드 가치가 더해진 랜드마크 건축에 열을 올려왔다. 한국 역시 1990년대 지방자치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도시 간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졌고, 도시 발전의 척도가 곧 도시 브랜드 가치의 향상과 동일시되면서, 도시마다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역점을 둔 국제 문화 이벤트를 개최하거나 더 높고 더 거대한 최첨단 건축물을 도시의 상징물, 랜드마크(landmark)로 세우는 것을 기본적인 조건으로 여겨왔다.




Zaha Hadid Architects 

<National Museum of the 21st Century Arts(MAXXI)> 

in Rome, Italy 1998-2009 Photo 

ⓒ Helene Binet Exterior view




미술관의 레저/엔터테인먼트 산업 공간화


물론 상업적 용도나 주거 용도의 건물이 랜드마크 건축물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결합된 레저 용도의 건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미술관(근래에는 도서관)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미술관이 제공하는 기본적인 볼거리를 기반으로 최근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과 공연 등의 이벤트가 더해지면서 말 그대로의 복합에듀테인먼트 공간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문화를 교육의 방식으로 소비함으로써 단순 소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생산적인 레저로 교체하기 때문에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원하는 계층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 ‘접근’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더해져 건물 자체의 시각적 랜드마크 효과에 사회적 브랜드 가치를 더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참여’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참여는 흔히 체험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데, 이것은 가상의 것, 복제된 것, 임의로 주어진 것에 대한 대체된 경험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경험을 대신하여 축소된 테마관에서 생태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테마파크적 모의(거짓) 경험이다. 


한편, 주로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미디어 전시에서 관람자의 인터랙션을 유도하는 것을 두고 일방향적인 정보 제공과 대비되는 쌍방향적인 교류로 보고 그것을 참여적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주어진 조건과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반응적 체험에 불과하다. 그런데 체험을 자발적인 참여, 나아가 민주적인 것과 같은 의미선상에 놓음으로써 체험 공간에 대한 막연한 긍정의 모조적 이미지를 생산하게 된다. 현재 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미술관 공간 경험이 가져오는 계층적 간극-나도 이제는 미술관에 간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하기는 어렵다-은 이러한 의미상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모조적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여하튼 현재 미술관은 흔히 박물관으로 불리는 컬렉션에 기반한 고전적인 의미의 전시보다 기획 전시, 특히 센세이셔널 한 대중적 기획전시로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고, 이 같은 이벤트성의 전시와 더불어 카페, 레스토랑, 쇼핑 공간 등이 확대되면서 전형적인 종합 레저/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SANAA 

<21st Century Museum of Contemporary Art> 

in Kanazawa, Japan 2004 Photo ⓒ

Takashi Okamoto Courtesy of SANAA Interior View




미술관 건축물의 기념비화


세계 각지의 대도시에서 랜드마크 건축물로 지어지는 대규모 미술관의 디자인은 대부분 이름 값이 높은 소위 스타 건축가들에게 그 일이 맡겨지고 있다. 렘 쿨하스,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렌초 피아노, 딜러 스코피디오 앤 렌프로, 장 누벨, 타다오 안도, SANAA(카즈요 세지마, 류에 니시자와) 등 불과 열 명 안팎의 건축가들이 글로벌 뮤지엄 건축 디자인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건축가/회사는 공모와 경쟁을 통해 선정되지만, 많은 디자인 커미션이 이들에게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보다 건축가/회사의 명성과 그들의 시그니쳐 스타일이 보유한 브랜드 프리미엄을 더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 이들이 디자인 한 건물은 누구누구의 건물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번쯤 찾아가 볼 만한 관광명소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한편,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이것이 진정한 브랜드 가치를 더하는지, 또 지역의 장소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부분이다. 건축가는 디자인적인 차원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이들 스타 건축가들의 디자인은 특히 시그니쳐 스타일(렘 쿨하스의 세포분열적 기하학 형태, 자하 하디드의 유기적 곡면, 렌초 피아노의 날아갈 듯 가벼운 투명성)에 대한 요구와 의존도가 매우 높아 상대적으로 해당 지역만의 장소적 특수성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렘 쿨하스가 베이징에 중국공영방송 CCTV 본사 건물을 디자인할 때 베이징 시내의 오래된 전통 가옥 집합체의 반복적 선에서 건물의 기하학적인 사선을 연상하여 신-구의 조화를 고려했다고 설명하지만, 인근의 모든 건물을 삼켜버릴 듯 압도하는 CCTV 건물의 거대한 규모를 보아서는 지역성이나 주변 환경을 고려했다는 논리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디드는 자신의 유기적 디자인을 형태상으로 나타나는 곡선/곡면, 대지와 건물의 연계, 건물과 지역 커뮤니티 간의 연결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지만 역시 압도적인 규모와 하디드만의 독특한 수평적 펼침에 기반한 곡선/곡면 형태는 그 장소의 역사적 흔적을 말끔하게 삭제해버린다.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인 훈련도감, 일제강점기의 경성운동장, 해방 이후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전)근대적인 국가 주도의 집단적 훈육 공간을 신자유주의적 문화 경제의 상징 공간으로 완전히 대체한 것이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특히 아랍에미레이트연방의 두바이, 아부다비,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청두 같은 신흥 기획도시들, 그리고 뉴욕이나 런던처럼 재개발이 본격화 된 근대 메트로폴리스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는 글로벌 스타 건축가들의 시장 독점 및 이들의 기념비적 건축의 세계화가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와 맞물려 있음을 말해준다. 




Renzo Piano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Extension> 

2005-12 Photo Courtesy of Virginia 

Raguin Interior view  




세계 어느 곳에 가도 같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수 있고 동일한 H&M 매장에서 옷을 구매할 수 있듯이 어느 도시에서든 거의 유사한 하디드 스타일의 건축물을 하나쯤 찾아볼 수 있고, 그것은 그 도시가 아닌 다른 지역 어느 장소에 두어도 자체의 브랜드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장소적 문맥과는 별개로 탄생한 작품이자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념비화 되어가는 미술관 건축물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스타일 상의 특징은 가벼움과 투명성이다. 하중을 줄이고 지지체를 최소화하여 공간을 최대화하는 것이 건축사의 전개과정이었다면 지금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조, 외피가 곧 구조가 되는 기술에 거의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투명 유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이음매 없는 곡면을 창출함으로써 건축가들은 중력에 대한 저항을 시각적으로 한층 더 부각시켜나간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렇게 기화될 듯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전면 유리벽 구조의 경우) 공간 없음이거나 (하디드의 창 없는 벽면의 경우) 폐쇄공포적 공간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글로벌 스타일이라면 스타일 자체라기보다 그것의 끊임없는 재생산으로 인한 장소성의 삭제, 역사적 컨텍스트와의 분리, 건축물과 공간의 상품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세계를 축소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모두 미술관의 콘텐츠보다 미술관 건물 자체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내용과 외관(미술과 건축) 사이에 불안한 긴장을 발생시키는 문제로 이어진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미술관 건물의 목적 자체가 에펠탑과 같은 상징적 구조물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로 기념비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미술관이 무엇을 위한 기념비가 될 것인가는 콘텐츠의 문제로 귀결된다. 미술관의 콘텐츠는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외화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미술관이 보유한 컬렉션과 아카이브에 기반한다. 미술관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개인 수집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컬렉션이 일정한 양적 한계를 넘어설 때, 그리고 카테고리화를 통해 의미상의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 대중을 대상으로 공개하는 인스티튜션의 형식을 갖추게 되면서 미술관이 탄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미술관의 핵심은 컬렉션에 있고 그 존재의 지속가능성은 콘텐츠가 계속해서 세포 분열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전시 기획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체 컬렉션과 콘텐츠 기획이 부재할 때 미술관은 외부 전시 대관으로 유지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미술관을 임대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외부에서 생산된 문화 상품을 빌려와 수익을 내는 부동산과 자생적 문화를 일구어가는 창조 공간은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자체 컬렉션과 기획이 부재한 미술관은 두바이의 루브르 박물관 분관처럼, 궁극적으로는 식민화된 문화의 이식과 확산에 기여하는 임대 시설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지자체마다 랜드마크 건축물로 외부의 시선을 주목시키고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경쟁 속에서 텅 빈 기념비적 미술관들이 계속해서 기획되고 있다. 




Zaha Hadid Architects

<National Museum of the 21st Century Arts(MAXXI)> 

in Rome, Italy 1998-2009 Photo 

ⓒ Helene Binet Interior view




무엇보다 미술관 같은 콘텐츠 기반의 건축물은 부동산 임대 개념과 전혀 달라서 정치적 혹은 행정적인 성과를 위해 일정 기간 내에 완성시킨다거나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말 그대로 문화 공간으로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미술관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기획해야 하고(박물관 형태, 아카이브-도서관 형태, 기획 전시 혹은 대관 전시 중심 형태, 체험 교육관 형태 중 어떠한 방향을 추구할 것인가) 그에 부합하는 컬렉션과 아카이브 구축 계획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장기적인 투자가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 기관으로서의 미술관 건립이 정치적/행정적 성과를 위해 이용되지 않도록 분리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박물관에서부터 체험 위주의 어린이 교육 공간까지 포괄하는 뮤지엄(Museum)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미술관으로 불리면서 시각예술 전시장으로 의미가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 박물관 또는 그 밖에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간에 오늘날의 뮤지엄은 유형의 오브제를 중심으로 지각과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위주로 유지, 발전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어떠한 전시를 어떻게 꾸리는가?’, ‘자체 기획인가 대관 전시인가?’에 있으며, 교육도 마찬가지로 기관의 목적에 맞는 컬렉션과 아카이브에 기반한 연구가 수반되지 않으면 오리지널 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어렵다. 따라서 무엇보다 기존의 미술관뿐만 아니라 앞으로 기획되는 미술관에서는 컬렉션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개인 소장품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이들에게 충분한 크레딧을 부여하면서 의미 있는 컬렉션을 구축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미술관을 곧 (텅 빈 기념비적) 랜드마크 건축물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유무형의 콘텐츠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미술관은 절대적으로 콘텐츠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그것은 스타 건축가가 만들어내는 독특한(글로벌 맥락에서는 획일화된) 공간일 수도 있고, 때로는 매우 뿌리 깊은 지역의 장소성을 담아낸 소박한 공간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콘텐츠의 다양한 재구성을 가능케 하는 버추얼 공간일 수도 있다. 미술관(Museum)에는 영감을 주는 뮤즈(Muse)의 의미가 담겨 있다. 미술관이 진정한 뮤즈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와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모여 끊임없이 새로운 논의를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 시도하는 플랫폼이자 장(場)으로 기능해야 한다. 이것은 곧 블록버스터 전시로 수익을 창출하는 임대 공간에서 창조적 ‘참여 공간’으로 전환하는 궁극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미술관이 역사적 공간에서 의미 있는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의지로 문화적 논의와 실천에 개입하는 개인, 미학적 논의를 사회적/정치적 논의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회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  



글쓴이 김정혜는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 석사 및 보스턴대학 미술·건축사학과(건축사 전공)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런던 UCL 바틀렛 스쿨 오브 아키텍쳐에서 건축 이론 박사과정 중에 있으며, 식민과 압축적 근대화를 거치고 개발주의와 소비자본주의가 중첩되는 과정에서 한국 도시의 공간성과 장소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삭제되어 왔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로비입구(Robby entrance)> 

서울, 대한민국 ⓒ 남궁선  




Special Feature 

미술관의 공간-비전과 실제

● 강성원 미학·미술평론·큐레이터



21세기 들어 미술관의 기능과 역할은 어느 때 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신하는 중이라는 것이 아니라 ‘발전’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미술관 기능이 집중,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미술관’이 처음 생겼을 때는 개인의 관심과 취향으로 수집된 물건을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었다. 20세기 들어서는 미술작품에 대한 연구의 실제 기반을 제공하는 공간이자 연구자인 큐레이터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수집과 보존, 해석과 연구의 결과물에 대해 대중과 소통하고 작품의 가치를 알리는 평생교육 기관으로 자리잡아왔다. 하지만 지금 미술관은 연구, 교육 기능은 물론이거니와 미술관의 안팎 공간을 장(場)으로 한  교양, 여가문화 등 문화생활에서의 중심공간이 되고 있다. 현재 규모가 큰 미술관 공간은 공연장이나 영화관, 도서실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미술관은 인류의 시각적 생산 작업을 선별해 수집하고 보여주는 공간이요, 시각이미지 시대로 규정되는 앞으로의 인류문화에서 전문 저술이나 글쓰기보다 시각이미지 생산이 훨씬 더 보편적 기술이자 소통도구라는 점에서, 사회생활에 대한 대중적 문화적 소통과 표현의 중추기관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과학기술과 정보, 영상, 음향언어 등을 포함해 ‘소통을 위한 표현방법과 매체’도 그 외연을 확대하면서 장르 간 통합과 학제 간 융복합의 문화기술 수준을 높이고 있다. 미술관의 공간 속에서 큐레이터는 작가들과 협업하면서 실제 이런 변화들의 실험과 모색, 보존과 연구를 실현에 옮긴다. 미술관 공간과 큐레이터의 역할전망이 이렇다면, 이제 미술관에서 최고의 작가와 작품을 선별한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을 뿐이다. 시대의 대중이 미술관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문화의 역사요 동향이자 사회생활에 대한 사고와 반성의 표현, 그 내용들이다. 생각과 표현의 콘텐츠가 보여주는 다양성과 풍부함, 창의성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로툰다(Rotunda)> 

서울, 대한민국 ⓟ HanKoo Lee




유명작가 리스트 곧 최고의 작가라고 평가받는 작가의 작품과, 작품론, 작가론만은 아닌 것이다. 개인전이나 기획전을 열고 작가와의 대화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아동들이나 직장인들에게 미술의 이해와 감상에 대해 배우게 하는 정도에서의 미술관 공간의 기능은 이제 전근대적 유산의 끝머리에 와있다. 이제 미술관 공간은 융복합문화의 스튜디오이자 랩이요, 허브로 이에 적합한 유동적인 공간변이와 변주의 경계를 구조화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미술관의 전문인들은 인간과 사회, 자연과 기술에 대한 문화적 동향과 전망, 역사와 사회,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아우르는 기획력을 ‘전시’형태로 선보여야할 뿐만 아니라, 대중과 대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까지도 찾아야 하는, 거의 르네상스 천재들의 전인적(全人的) 문화 이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미술관은 설립목적에 따라 특정 이념이나 경향, 지역과 시대에 속하는 대상 작품들을 수집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몇몇 미술관들은 현대미술 전체를 포괄하고 전통미술만 컬렉션 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미술관들은 소장품이 포괄적이든 특정 방향의 것이든 위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인류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고 사유할 수 있으면서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활동의 창조적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들로 채워진 공간을 제공하고자 한다. 인류 공동체의 문화허브가 되고자 한다. ‘작품’을 전시하며 수집하는 최고 권위의 ‘기관’으로만 존재해서는 이러한 미술관 공간이 될 수 없다. 미술관 자체는 사적 소유물일지라도 공간에서 ‘행해지는’ 콘텐츠로 인해 미술관 공간은 공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공적 책임과 권한의 공간으로 인정되는 공간이다. 미술관 공간에서의 프로그램들은 그것이 평면작업 전시이든 설치, 영상 등 복합미디어 작업이든 퍼포먼스이든, 모든 개별 작업들이 하나의 특별한 ‘사건’이다. 개별적 발화요,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로그램들이 기획되고 준비되는 모든 진행과정과 진행현장, 프로그램의 주제와 내용, 방법과 전략, 진행의 효과, 그리고 이와 관련해 제작된 텍스트와 이미지, 대중과의 소통내용 등 모든 것이 한 프로그램, 전시의 콘텐츠이다. 이런 일들 하나하나에 담긴, 결정해 앞으로 나아간 ‘의지’와 ‘고투,’ ‘사고’와 ‘감각’등의 내용들이 ‘미적 차원’이다. 미술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콘텐츠’와 ‘콘텐츠 해석’이 미술관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고 공적 책임과 권한의 위상을 보증한다. 미술관 전시공간에서 행한 작가의 ‘전시’와 ‘작품’들, ‘작가이력’이 미술관 공간의 유일한 콘텐츠가 아닌 것이다. ‘작가’와 ‘작품’은 미술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공적 행위, 곧 예술 혹은 문화적 실천의 시작이자 끝이 아니다. 작가와 작품은 심지어 미술관의 ‘전략’과 ‘전술’을 위한 진지(陣地)일 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미술관에서의 교육과 아카이빙 기능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콘텐츠’를 전달하고 ‘해석’을 체계화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지금의 ‘작가주의’에서 거듭나야한다. 




Zaha Hadid Architects <DDP> 

‘살림 1관(Design Lab 1)’ in Seoul, Korea  




지금 전 세계적으로 미술관의 공간은 이 같은 비전에서 움직인다. 미술관 공간은 작가를 미술사의 반열에 올려놓거나 작품의 완전성으로 작가를 우상화하고 숭배하기 위한 공간으로서만은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다. 미술관은 이미 “창작이란 무엇을 완벽하게 만든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혼란시키고 뒤흔든다는 것이 점차 자명한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1) 혹은 “존재란 셈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만큼이나 막연한 표현이다. 한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작품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점을 파악하는 작업이다.”2)라는 이미 오래된 주장에서처럼, 작품이 담고  있는바 ‘뒤흔들고 혼란스럽게 하는’가에 대한 내용, 이 행위를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점을 파악하는’ 해석 행위자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미술관, 그 미술관의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미술관은 그 생성에서부터 재력 있는 수집가의 애장품이거나 희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놓은 공간이었다. 이제는 미술관 자체도 수집품에 버금간다. 미술관 건물을 새로 짓는 경우에도 취향이 맞는 건축가들에게 의뢰해 ‘특별한 공간’으로 미술관을 지어왔고, 요즈음은 공장 등의 폐건물을 다시 수리해 지역 경관도 살리면서 새로운 미술관을 짓고 있다. 이때 아무래도 미술관 건축설계는 컬렉션 내용과 미술관의 비전에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건축가는 파악한 소장품의 가치를 자신의 건축 작품으로서 다시 한 번 총체예술로 구현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미술관 건축물은 대개 미술관 소장품만큼이나 가치를 압축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건축의 조형성을 띠게 된다. 그래서 미술관은 특정 지역 정신의 랜드 마크처럼 여겨진다. 이런 경향은 요즘 들어 더욱 경쟁적으로 심화되면서 미술관 건축물 자체가 미술관의 정체성과 권위를 상징하듯 대한다. 미술관의 컬렉션 가치보다는 미술관 건축물로 미술관이 할 일을 다하는 듯 한 일들이 생기고 있다.


특히, 국제적 규모의 미술관 건물의 외관과 내부공간은 사람을 압도한다. 예를 들면 삼성미술관 리움은 알려져 있다시피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의 작품들인데, 거대한 어둠의 심계, 그 권력의 혀, 식도, 위장, 대장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미술관 공간이기보다는 리움의 건축물 컬렉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곳에서의 전시는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인정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한다. 리움이란 공간을 통해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미술관에서 이미 인정한 작품들만이 공간에 수용된다. (홈피에 명시되어 있음) 내부는 큐레이터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해석하고 설치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그 구조가 가히 위압적이다. 리움 공간과 전시는 ‘스펙터클’을 제공하지만, “스펙터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3) 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미술관이라는 공간, 그 외형과 내부현장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그 공간이 거기서 하려고 하는 일들을 제대로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술관 공간구조의 핵심은 전시공간이다. 전시공간은 가상적 실체의 공간이다. 




<경기도미술관> 외관 서울, 대한민국




가상적인 것을, 비실제적인 것을 ‘실체’화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꿈을 현실로, 운동을 제도로 콘텐츠화 하는 공간이다. 건축물이나 공간 자체가 실체적이어서는 꿈들은 포말(泡沫)이거나 가신(家臣)의 애환이기 쉽다. 미술관에서의 ‘공간성’은 비가시적 위상학의 지평에서 가늠되는 ‘퍼스펙티브(perspective)’를 의미한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은 구기무사 건물을 재건축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열었는데, 결과적으로 볼 때, 서울관은 꽤 짜임새가 있다. 공간과 공간사이를 잇는 복도와 입구 등 실내 인테리어가 맹목적이라는 점 등을 제외하곤 한국적 규모감과 공간감이 있으면서도 전시공간의 연결과 전개가 비교적 다양하다. 좋은 전시들을 일구어 내 볼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관전의 핵심화두이자 미술관의 정체성을 보여준 개관 기획전인 <시대정신>전에서 이러한 공간에 대한 이해력이 조금 부족한 듯 보였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 전시에서는 뷰포인트(view point)와 퍼스펙티브에 대한 고려 역시 부족했다. 문화관료주의적 심계가 정교하게 ‘기관화’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 전시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생각하는 서울관의 정체성이었다면, 과연 미술관 공간이 앞으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서울관의 모든 일을 꾸려나가는 사무 공간 역시 전시공간만큼이나 중요한 미술관의 얼굴이자 두뇌이지만, 행정과 관리편의를 위한 구획을 위해 관료주의적이고 반문화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 역시 이 우려를 심화한다. 미술관의 공간은 미술관 건축 공간, 그 외형과 곧 미술관 안팎을 둘러싸거나 연결하는 공간, 내부의 격자화된 공간을 포함한다. 공간에 무언가 물리적 구조를 잡아 세운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한 경계영역을 만든다는 것이다. 각 공간에는 나름대로 다른 할 일들이 있다. 미술관 공간의 외부공간은 길, 마당, 다른 건물 등에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하는 방식도 미술관다워야 한다. 미술관 내부는 미술관의 목적을 수행하는 각각의 별개 공간들로 구조화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각 공간들은 미술관의 목적과 특징에 따라 규모나 연결동선의 매개 등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모든 가치의 가치전환의 실험』 글 모두에 다음과 같이 붙였다. “세계는 무한히 해석가능하다.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인 것이다. 통일 일원론은 타성의 욕구이며, 해석의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 해서는 안된다.”  니체가 하려고 했던 것이 현대철학의 시작을 알렸지만, 지금 작가들이 하고 있는 것도 여전히 ‘모든 가치의 가치전환의 실험’이다. 시대의 요구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다. 미술관 공간은 불특정한 인격의 관점들이 사물화 되는 곳이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현실에 대해 던지는 하나의 혹은 무수히 다양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즉 ‘힘의 징후’가 될 수 있는 것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시도되는 생의, 사건의, 알레고리의 해석의 다수성, 그 가능성에서이다. 바람직한 미술관 공간은 ‘해석의 힘’을 강력하게 재현한다. 현실의 경계들은 새로운 가치론의 위상학으로 배치된다. 분리되고 분열하면서 소멸되고 도약한다. 




<이응노미술관> 외관 서울, 대한민국  




[각주]

1) 앙드레 말로, 『덧없는 인간과 예술』, 유복렬 옮김, 푸른 숲, 2001, 16쪽

2) 앞의 책, 21쪽 

3)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이경숙 역, 현실문화연구, 1996, 25쪽



글쓴이 강성원은 서울대학교 미학과,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일민미술관 기획위원, 일민시각총서 편집장, 인문학박물관 건립기획책임, 인문학박물관 학예실장, 아시아문화개발원 프로젝트 매니저, 아트선재센터 실장을 지냈으며, 계원예술대학 겸임조교수를 역임하고, 서울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했다. 저서로는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 『시선의 정치-한국미술이론을 위하여』(시지락), 『미술과 생활』(교과서-공저, 시공사), 『귀스타프 도레』(한길사), 『한국여성미학의 사회사』(사계절), 『이미지로 보는 한국근현대미술』(사계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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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문선아 기자,김정혜 건축이론가,강성원 미학·미술평론·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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