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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0, Mar 2014

이제는 생태주의다

The Ecological Art

‘자연 보호’라 하면 너무 오랫동안 들어왔던 말이라 식상하려나. 올해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4년 째다. 내일은 또 다시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라는 자연법적 사상이 유전자 깊숙히 박혀 있기 때문일까? 당시 폭발적이었던 여론과는 달리, 현재 우리는 다시 이것을 삶의 조건처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자원고갈, 대기오염, 지구온난화 등은 이제 마치 불치병처럼 받아들여지며 관심 밖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퍼다 주기만 하는 어머니가 아니다. 각종 이상 기후와 그로 인한 자연/인간 재해의 연쇄는 자연의 법이 인간을 더 이상 좌시하지만은 않는다는 증거다. 3월을 맞아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하는 이 시기. 「퍼블릭아트」는 생태위기에 대처하는 미술에 대해 다룬다. 생태를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존재론적 차원의 미술부터 사회적 참여를 통해 생태 문제를 비판하는 미술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미술을 소개한다. 이제 대세는 생태다!
● 기획·진행 안대웅 기자

리차드 롱 'Wood circle' (installation at Van Abbemuseum, 2004)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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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생태적 판단과 미적 판단의 연대를 위하여_이진경


SPECIAL FEATURE Ⅱ 

자연생태의 위기와 한국의 자연미술_전원길


SPECIAL FEATURE Ⅲ 

후쿠시마·자본주의·미술_안대웅





닐스 우도(Nils Udo) <The Nest> 1978 

Earth, stones, birch trees, birch branches, grass 

독일 Luneburg Heath *자연 속에서 변형하고 발전시켜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는 작가. 시간이 흘러 침식과 부패가 

일어나 더욱 자연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을 때 완성이 

된다고 생각했다. 자연 재료들을 조심스럽게 배치하고 

자연의 역할이 전개되도록 하여, 

마침내 ‘사라지는 창작물’을 설치했다.  





Special Feature Ⅰ

생태적 판단과 미적 판단의 연대를 위하여

● 이진경 철학자



생태주의는 아이러니한 역사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을 인간의 시각에서 보는 인간중심적 태도와 달리, 지구의 관점, 생태계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는 것으로 알려진 ‘생태주의’의 ‘에코(eco)-’란 말은 원래 인간의 집, 가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 kos)’에서 나왔다. 생태주의와 반대로 돈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 ‘돈 되는 것’을 지고의 원리로 삼아 개발과 성장의 이데올로기로 자연의 ‘파괴’에 선봉이 된 경제학(economics)이 똑같은 단어를 어원으로 삼고 있음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어원의 동일성보다 더 강한 의미에서 경제학과 생태학은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세계, 그리고 그 산업혁명에 실질적 추동력을 제공한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그 이전에도 자본은 있었고, 상품화된 관계도 있었지만, 상품의 생산은 장인들의 숙련노동에 기초하고 있었다. 장인이 되려면 7년 이상의 도제기간을 거쳐야 했으니, 생산할 수 있는 ‘노동자’는 희귀했고, 장인들의 제작속도는 아무리 다그쳐도 빨라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하는 속도 역시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아마도 자연의 복원능력이 작동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기계의 본격적 도입으로 어린아이도 생산자가 될 수 있게 되었고, 노동자가 되는데 필요한 기술은 7년 아니라 7시간이면 충분히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증기기관을 필두로 한 동력장치의 발전은, 인간의 힘으론 생각도 못할 힘과 속도를 ‘개발’과 ‘이용’에 제공했다. 이용을 뜻하는 말 ‘exploitation’은 착취를 뜻하기도 한다. 자연의 이용/착취의 속도는 이제 자연의 복원력이 작용할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었다. 게다가 비용을 극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논리는 미친 속도로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해갔다. 런던의 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연은 나비의 날개 색깔마저 바꿔놓았고, 스모그는 런던 주민의 목숨마저 대량으로 앗아갔다. 제국주의는 이런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강력한 착취와 파괴력을 전세계로 급속히 확장했다. 경제학이 이렇게 새로이 도래한 미친 속도와 경쟁의 세계 속에서 남들에게 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생태학은 미친 속도로 경쟁하는 개발과 착취로 인해 망가져가는 세계의 자연적 본성에 눈 돌리라는 호소로 탄생했다.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 

<Un titled (Tree of Life series)> 1977 

tree and mud executed at Old Man’s Creek Iowa City




이런 호소에 사람들이 귀기울이게 된 것은, 그 파괴로 인해 자신들의 삶이 더는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게 망가져버린 이후였다. 효율적인 농사를 위해 치는 농약이 자신들이 먹는 것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자신들이 맘껏 쓰던 자원들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환경문제’는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생태주의는 의로운 자의 고독한 외침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의 전망과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석유의 고갈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 때문에 생산을 줄이거나 개발을 포기하려는 국가는 아직 없으며, ‘여섯 번째 멸종기’라고는 하지만 생물의 급속한 멸종을 막고자 인간의 서식지를 줄이려는 정부도 없고 자신의 집과 땅을 자연에 되돌려주려는 사람도 없다. 온난화로 인해 극지방의 얼음과 히말라야의 빙하가 녹고 있으며 ‘엘니뇨’라 불리는 이상기후가 매년 돌아가며 나타나고 있지만, 그걸 저지하려는, 전지구적 차원에서만 가능한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구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 나무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브라질이나 동남아, 아프리카 등의 벌목업자들은 한 시간에 축구장 수백 개 면적만큼의 숲에서 나무를 베어 팔지만, 이를 저지하려는 정부는 없으며, 심지어 벌목저지운동을 하는 이들의 린치나 암살조차 막지 않고 있다. 10억년 이상 지속된 대기 비율의 항상성이 깨져가고 있지만, ‘나의 문제’로 그걸 받아들여 해결하려는 이도, 국가도 없다. 30억년 이상 모든 생명체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해주던 지구가, 200년 남짓의 자본주의와 산업문명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에게 그것은 ‘누군가’ 해결해 주어야 할 일일 뿐이다. 매일매일 돈을 벌고 생활해야 하는 각자로선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농약을 피하기 위해 유기농 농산물을 사먹고, 오염된 물을 피해 생수를 사먹는 방식으로 개인적인 모면의 출구들을 찾는 것일 게다. 함께 해결할 문제를 개인적으로 돈을 들여 해결하거나 모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생태적인 문제의 해결을 지연시키는 도피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보면, 아직도 생태적 위기는 충분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더 난감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야기한 문제를 애꿎은 동물들에게 전가시켜 대대적인 학살을 해결책이라고 자행하는 것이다. 가령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조류독감과 그에 대한 ‘방역’이 그렇다. 청소를 하고 방역을 하며 사는 인간조차, 도시에 많은 수가 밀집하여 살게 되면, 수많은 전염병이 발생한다. 소나 돼지를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넣고 그저 먹이를 먹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게 한다면 어떻게 될는지는 뻔한 일 아닐까? 수백 마리 닭이나 오리를, 한 마리당 A4 용지 반 장 만큼의 공간을 주는 축사 안에 집어넣어 먹고 우는 것 말곤 할 게 없는 조건에서 사육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고기를 탐하는 인간들의 사육장은 분뇨와 쓰레기 등으로 옆에 있기 힘들 정도의 더러운 세계를 형성한다. 거기서라면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축산업자들은 매일 먹이는 사료에 성장촉진제와 더불어 항생제를 섞어 먹인다. 그걸 그들의 살에 섞어 우리가 다시 먹는다. 




앤디 골드워디(Andy Goldsworthy) 

<Icicle Spiral (Treesoul)> 1985 

Dumfriesshire, Scotland




이번의 조류독감은 러시아에서 감염된 철새들 탓을 하곤 있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잠복기간이 10일 정도이기에 러시아에서 감염된 것이라면 한국에 오기 전에 모두 죽었어야 한다(한국에 오는데 한 달 정도 걸린다니까). 한국에서 철새들이 죽은 것은 저 끔찍한 축사에서 발생한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죽은 것이다. 그들 또한 끔찍한 공장형 사육체제의 피해자인 것이다. 그러나 질병이나 병균은 언제나 ‘외부’에서 온다는 믿음 속에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다. 그래 놓고 그 병의 확산을 막겠다면서 발생지 반경 3km 안에 있는 모든 닭과 오리를 죽이는 끔찍한 학살을 전국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조류독감이 국내 처음 발생되었는데, 그후 약 10년 동안 살처분된 가금류는 2,500만 마리(!)였지만 실제 조류독감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된 가금류는 121마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2011년 구제역이 발생하자, 방역이란 이름으로 전체 가축의 27%에 달하는 350만 마리를 죽였던 학살을 어느새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끔찍한 환경의 결과를 애꿎은 자연적 생태계의 탓으로 돌리며, 감염의 위험이란 이유로 멀쩡한 동물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동물에게도 질병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맞지 않는 형질의 신체가 섞이고 공존하며 발생하는 충돌과 갈등이 질병이다. 생태계란 그런 충돌과 갈등 속에서 서로 의존하며 함께 공존하게 된 생물들의 거대한 공동체다. 생태주의란 이런 사실을 통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갈등과 충돌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를 찾는 것이고, 그런 공존의 상태를 어떻게 하며 지속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목적에 맞추어 생물체의 생존을 통제하려고 하는 순간, 이 자연스런 일들은 내가 소유한 재산에 대한 적들의 공격으로 간주되게 되고, 이 적들로부터 자시의 재산을 지켜야 하며, 심지어 자신이 키우는 동물의 대부분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적들을 몰아내고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발생한다. 그것이 이 어이없을 정도의 어리석은 학살을 반복하게 하고 있다. 


질병의 반복적인 발생을 통해 보아야 할 것은 오히려 그런 식의 사육이 갖는 문제점이고, 그걸 막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자신이 키우는 동물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생존환경, 사육환경의 조성일 것이다. 어떤 생명체도 그것이 살기 위한 생태적 조건 속에서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고, 먹이사슬이라는 먹고 먹히는 상호의존관계조차, 그런 삶을 바탕으로서 해서만 제대로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비용과 이윤을 계산하는 생산성의 경제학과 시장이란 이름의 강제적 경쟁체제는 이런 생각을 애초부터 가로막고 있다. 비용과 이윤을 계산하는 이해관계는 이런 생각에 처음부터 불가능성의 빗장을 질러놓고 있다. 우리의 일상이 항상-이미 돈과 결부되어 있기에, 가축을 사육하거나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혹은 이윤을 위한 사업을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스스로 이런 경제적 계산 속에서 산다.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유하고, ‘현실성’이란 이름의 빗장을 벗겨낸 지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생태주의는 불가능한 꿈이다. 




김주연 <Metamorphosis IV> 2012 나무파렛트, 

비계구조물, 부직포, 씨앗, 가변크기 

*김주연의 생태적 미술작업은 생명의 탄생과 지속, 

성장, 순환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면서 모든 존재의

일체적 구조를 다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생태주의가 불가능하다 함은, 좋든싫든 지구적인 생태적 조건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선 생존의 지속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암세포가 자신의 ‘숙주’의 생존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지만, 결국 그 숙주의 죽음을 초래하며 함께 죽는 자살적 운명을 우리가 지구 위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전에 칸트는 미적 판단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란 말로 정의한 바 있다. 어떤 것도 직접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생각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우리는 미적 판단마저 이해관계에 따른 합목적성에 귀속시키곤 한다. 투자가치를 따지는 경제적 판단이 작품을 사거나 만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생태주의는 반대로 경제적인 문제조차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나 판단하고, 그때마다의 계산에서 벗어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생태주의 또한 생태적인 지속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으려는 한, 그것은 어떤 합목적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눈앞의 직접적인 목적을 벗어난 합목적성, 지구의 차원에서, 내가 속한 생태적 조건 전체의 관점에서 사고되는 합목적성이란 점에서 목적을 벗어난 합목적성을 요구한다. 


요컨대 생태적 판단이란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따른 판단이다. 이런 판단이 경제적 판단과 일치하게 되는 때란, 생존이 목전에 닥친 목적이 되는 때, 다시 말해 살아남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목적이 될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때일 것이다. 그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매우 급속하게 다가오고 있음은 많은 이들이 감지하고 있다. 예술은 지배적인 것에서 벗어난 다른 삶의 가능성, 다른 감각의 가능성을 창안한다. 그것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현재의 지배적인 가치,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가치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게다. 그런 점에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미적 판단과 생태적 판단을 하나로 묶어준다. 미적 판단에 따라 사는 이와 생태적 판단에 따라 사는 이의 인접성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예술가들과 생태적 사유 간의 거리는 여전히 놀라운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대지의 예술’조차 생태적 판단보다는 제작적 판단에 따라 행해졌음은 그 한 사례라고 할 것이다. 생태계를 파괴하여 만들어내는 생태공원이나 생태건축은 이런 인접성을 무력화시키는 극단적인 경우일 것이다. 그 극단적인 경우가 매우 빈번히 반복되고 있다. 그렇기에 예술적 판단과 생태적 판단의 거리를 축소시키려는 예술가들의 시도들에 대해 우리는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다.   




앤디 골드워디(Andy Goldsworthy) 

<Horse chestnut tree torn hole stitched around 

the edge with grass stalks moving in the wind> 

1986. 7. 24 Trinity College, Cambridge




글쓴이 이진경은 『철학과 굴뚝청소부』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 『노마디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등의 철학책을 썼고, 『수학의 몽상』이라는 대중적인 수학사 책을 쓰기도 했으며, 『필로시네마』라는 제목의 영화 관련 책도 썼다.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학위를 받았는데, 박사논문은 서양건축사에 관련된 것이었다(「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맑스주의와 근대성』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코뮨주의』 『대중과 흐름』 등의 맑스적 책을 썼고,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라는 칼럼집을 내기도 했다. 연구자들의 공동체인 ‘수유너머N’(www.no madist.org)에서 활동하고 있고, 서울과학기술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테르누보 후지모리(Terunobu Fujimori) 

<Beetle’s House> 2010  467×240×153cm V&A Museum 

설치전경 *자연재료만을 갖고 작업하는 건축가. 

그는 사람들이 좀 더 자연에 노출되어 있었던 

문명 태동 이전 시기의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의 건축은 자연에서 나온 재료를 어떻게 하면 

자연 그대로 원형 그대로 살려 사람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Special Feature 

자연생태의 위기와 한국의 자연미술

● 전원길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 디렉터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후세에게도 여전히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단지 환경보호론자의 관심을 넘어 이미 시대적 화두가 되었다. 예술가 역시 이 문제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60-70년대에 미국에서 대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이 실내중심의 미술을 야외공간으로  확장했고 과정이 미술이 되는 새로운 미술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럽에서도 리차드 롱, 골드 워시, 볼프강 라이프, 닐스 우도 등의 작가들이 서정성이 곁들여진 부드러운 대지미술을 지향하여 한층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시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요셉 보이스의 행동주의적 태도 그리고 아그네스 데니스와 같은 생태 중심적 접근은 환경문제에 직접 개입하려는 예술가들의 선구적인 역할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속에서의 예술가들의 작업은 결국 자연을 재료로서 다루든 하나의 유기적인 생태로서 인간의 삶에 직접 작용하는 자연으로 대하고 접근하든 간에 자연으로 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자신의 존재성을 인식하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의 관계설정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작품 속에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자연현장을 무대로 미술활동이 시작된 것은 1981년 창립된 바깥미술회와 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이후 야투)에 의해서일 것이다. 나는 야투적인 자연미술이 형성되던 1980년대 초중반에 그 현장에 있었던 작가로서 위에서 서술한 미국과 유럽의 대지미술과는 어떻게 다른 태도로 자연을 대했으며, 야투의 자연미술이 이 시대의 생태위기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안을 하고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볼 것이다. 야투의 자연미술은 미국의 대지미술이 갖는 개념주의적 양상과 유럽의 대지미술이 보여주는 자연친화적 태도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나 그 어느 쪽과도 완전히 겹치지 않는 독특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1981년 야투 창립당시 야외현장미술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1980년대 야투의 활동은 당시 한국에서 실험미술을 추구했던 70년대 선배그룹들과는 달리 서구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법론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학습 대신에 자연과의 순수한 맞대면을 우선시 했다. 이들의 미술행위는 방법론적 신념을 추구하는 지적인 판단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고자 하는 몸의 본성적 요구를 따랐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훈데르트 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Rogner Bad Blumau> 1997 오스트리아 

*자연 속에 녹아드는 건축으로 유명한 훈데르트 바서가 

만든 온천 마을. 땅의 형태를 훼손하지 않은 채 건물을 지은 

친환경 마인드. 땅에서부터 곡선을 이루면서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붕 위에는 초록 잔디와 나무가 가득하다. 주변 풍경와 

자연스레 어우러져 건축인듯 숲인듯 구분을 할 수가 없다. 

빗물을 흡수하고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는 

친환경 기능은 기본이다.




야투그룹의 작가들은 사전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자연과 만난다. 담담하게 자연과 만나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준비를 할 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손과 몸을 이용한 간단한 움직임이나 현장의 자연물 혹은 빛과 그림자, 바람 등과 같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현상을 작업에 반영한다. 작업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자연이 말을 걸어 올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야투의 자연미술 작업은 아주 짧은 시간 자연 속에 존재하며 심지어는 작가가 그 장소를 떠나는 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야투의 자연미술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연 속에 밀어 넣기보다는 자연으로부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따라 작업하며 자연 속에 우뚝 세우기보다는 작은 규모의 가벼운 작업을 선호한다. 작품으로 내세우기 보다는 자연 속에 스며들면서도 시적인 메타포(metaphor)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볼 때 환호한다. 자연과 인간의 본성적 만남에 근거한 작업을 수행하며 자연과 인간의 예술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미술상태’를 지향하는 야투의 작업 태도는 자연에 대한 도전적 관계를 시도하는 미국의 대지미술이나 비록 짧은 시간 존재하더라도 확실한 시각적 결과물을 지향하는 유럽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야투가 출발할 1981년 당시는 현재 전 세계적 화두인 지속가능한 지구환경의 문제(Susta inability)가 대두되기 전이었다.  당시 야투는 자연의 질서와 그 생생한 생명력에 몸을 맡길 따름이었지 자연을 걱정하거나 그 지속성을 염려하지 않았다. 야투는 지금도 행동주의적 명분 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예술 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상태 속에 존재하는 창의적인 작품을 소중하게 여긴다. 현재의 환경파괴로 인한 각종 문제가 한 천재과학자의 놀라운 발명으로 일시에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 지금의 쾌적한 삶의 방식과는 또 다른 삶의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될 때 문제의 해결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야투의 작가들처럼 자연으로 부터 무엇인가 듣고 반응하기 시작하고 이로써 자연을 이용하여 부를 취하는 가치보다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소소한 깨달음을 더욱 귀히 여기는 변화가 일어날 때 의미 있는 변화는 시작될 것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야투는 직접 생태적 위기에 대하여 웅변하지는 않으나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어떤 미술적 결과를 내보이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이 시대에 필요한 자연과 인간의 대안적 관계를 예시하고 있다. 




슈퍼플렉스(Superflex) <슈퍼가스(Supergas)> 

타일랜드 쳉마이(Cheing Mai)에 설치 *사람과 동물의

분뇨를 이용해 가정에 필요한 메탄가스를 생산해내는 장치. 

슈퍼플렉스의 대부분은 이런 실용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현재는 슈퍼가스(Superpas)라는 

회사를 설립한 상태. 그들의 작업에는 으레 접두어

 Super-가 붙는 것이 특징이다.  




야투는 1991년 이후 부터 이러한 자연미술의 정신을 확산하기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개인의 작품 활동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미학을 주창하는 미술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실현해나가고자 하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야투가 진행하고 있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와 야투레지던스프로그램 그리고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 등은 이러한 운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미술운동을 위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도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참가할 수 있는 자연미술워크숍을 기획하여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고 자연과 인간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삶을 회복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야투는 출발당시 자연환경의 문제에 대해 경고하거나 그 해결방안을 예술 활동을 통해 추구하는 실천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투의 자연미술의 정신과 방법론적 특성이 위태로워진 지구 환경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균형 잡힌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 가치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다. 자연미술은 야투 회원들이 처음 자연 속에서 무엇인가 시작 할 때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훈련이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연미술은 우리의 영혼과 언제든지 공조하는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미술이 섣부른 이론으로 무장하고 미술관에 모셔지기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속에서 살아서 작용하는 미술로 자리 잡게 되길 바란다. 


아울러 자본주의의 지나치게 상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그 자유로운 영혼을 저당 잡힌 작가들에게 인간의 예술적 의지를 가장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는 자연속의 해방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길 바라는 바이다. 자연미술은 생태미술과 다른가?   원래 자연미술(Nature Art)이라는 말은 1980년대 중반부터 야투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말로서 자연 자체가 미술 안에서 직접 작용하고 있는 회원들의 작품의 특성을 반영하기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헝가리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지칭하기위하여 사용하고 있고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통하여 자연, 환경, 생태에 기반을 둔 미술을 다루는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크리스토와 잔느 끄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 

<둘러싸인 섬> 1983 38×165 cm/106.6×165cm 

Biscayne Bay, Greater Miami, Florida *부부 환경미술가. 

거대한 규모로 공공장소와 건물을 포장하는 대지미술가 혹은 

환경미술가.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는 비스케인 만에 위치한 

열한 개의 섬을 폴리프로필렌으로 감싸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외에도 뉴욕 센트럴 파크를 오렌지색 천으로 물들이거나, 

베를린 국회의사당 외벽 전면을 천으로 감싸기도 했다.  




글쓴이 전원길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82년 야투의 회원으로서 자연미술 작업을 시작한 이래 자연 현장에서 얻어진 아이디어를 사진, 영상, 설치, 회화 등의 방법으로 작업하고 있다. 1999년 런던예술대학교 첼시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한남대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미술사와 실기를 강의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과 경기도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있다. 현재 안성에서 작업하고 있으며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자연미술의 현장』 『자연으로 몸으로』 등이 있다.




데이비드 내쉬 <Iron Dome> 2010 

나무에 조각 큐가든 설치 전경




[전원길 디렉터 미니 인터뷰]


Q: 자연미술은 생태미술과 다른가?   


A: 원래 자연미술(Nature Art)이라는 말은 1980년대 중반부터 야투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말로서 자연 자체가 미술 안에서 직접 작용하고 있는 회원들의 작품의 특성을 반영하기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헝가리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지칭하기위하여 사용하고 있고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통하여 자연, 환경, 생태에 기반을 둔 미술을 다루는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Q: 자연미술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가?  


A: 현장 즉 자연 속에서 작업하기 위하여 사전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자연과 만난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몸을 이용한 간단한 퍼포먼스나 현장의 자연물과 더불어 작업을 진행한다. 자연미술작업들은 아주 짧은 시간 자연 속에 존재하며 심지어는 작가가 그 장소를 떠나는 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연 속에 밀어 넣기보다는 자연이 우리에게 던져주는(野投) 영감에 예술적 반응을 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한다. 자연과 생태를 연구자적인 태도로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몸의 감각과 정신의 흐름에 집중한다. 자연 속에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작위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자연의 다양한 양상들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간단한 설치, 자연과 인간의 관계와 일체성을 표현하는 간단한 행위 혹은 자연과 자연사이의 관계를 시각화한 작품이 많다.  


Q: 자연미술은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사회적 구조나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이런 점이 다소 현실 도피적이거나 온건하다고 여겨진다.   


A: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사회적 구조나 문제를 자신의 작업의 이슈로 삼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미술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노력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만이 작금의 지구환경과 생태문제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미술적 방안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생각의 변화가 세상의 역사를 바꾸어 왔다. 야투의 자연미술이 자연을 단지 자신의 예술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재료나 장소로 다루지 않고 자연과 함께 작용하는 미술을 추구하는 분명한 정신을 가지고 이를 실현하기위한 방법들을 발전시켜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연미술의 정신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이러한 생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찾아지리라 생각한다. 


Q: 오늘날의 생태위기와 관련해 자연미술은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나?  


A: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자연미술운동을 세계적으로 확산하기위한 중요한 행사로서 전시뿐만 아니라 자연미술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하여 자연과 환경 그리고 생태의 문제들에 직면해서 세계의 자연미술가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지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어 왔다. 아울러 야투는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www.yatooi.com)를 통해 그동안 교류해온 135명의 세계 각국의 작가들과 단체들을 네트워킹하는 한편 자연과 환경에 접근하는 다양한 작업의 양상들을 소개하는 작업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해오고 있다.  특별히 야투가 기획하고 있는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 2014-2018은 자연미술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세계일주 프로젝트로서 이미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획자회의를 2013년에 개최하였으며 금년에는 모델프로젝트로서 중요기획자들과 작가를 초대하여 한국에서 그 서막을 열게 될 것이다. 




전원길 <공주 산성공원> 1986





Special Feature 

후쿠시마·자본주의·미술

● 안대웅 기자



개인적인 소회로 시작해보자.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등은 워낙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터라 이 말에 별 위기감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기자는 공업 도시 울산 출신인데, 울산에서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초등학교를 다녔다면 ‘등이 굽은 물고기’를 사진 찍어오는 숙제를 한 번 쯤은 하게 된다. 당시 나는 썩은 내가 진동을 하던 태화강변에 가서 돌연변이를 일으키거나 폐사한 물고기를 두 눈으로 확인하며 지구가 곧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심각하게 고민했더랬다. 하지만 나는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직까지 멀쩡히 물 잘 마시면서 「퍼블릭아트」 기자로 컸다. 따라서 내 가까운 미래를 좌우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분명히 환경오염은 아니란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보단 내 집 마련이나 결혼자금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란 경쟁적 구조 문제가 다소 미래를 어둡고 불투명하게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라면 하도 오랫동안 듣고 경험하고 있는 터라 또 다시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 이 안에서 나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할 줄도 알게 되었다. 꿈을 다 못 이룰지 몰라도 ‘웰빙’이 내 수준에서 아예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가 태평양으로 흘러들기 전까진 말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이유는 먹는 것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맑고 푸르다고 여겨지는 동해 수산물을 즐겨 먹어왔던 나에게 이것은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지구본을 들 필요도 없이 한국과 일본은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그 바다에 지금도 매일 오염수가 누수 되고 있다니(기사를 쓰고 있는 오늘도 19톤의 오염수가 바다에 누출됐다는 기사가 소리소문 없이 떴다) 생선은 이제 다 먹었다는 소리다(어디 생선뿐일까!).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는 동서고금 고등동물 미물 가릴 것 없이 똑같다. 생존과 직결되는 아주 형이상학적이면서도 형이하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인간 심리를 건드릴 수 있는지에 대한 가깝고 좋은 예시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사태다.) 이제 복잡한 생태계 먹이사슬이 방사능을 이리저리 옮길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먹기도 전에 의심하거나 포기하고 먹어버린다. (실제로 기자는 식당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판다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광우병이 걸린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고기를 씹어 삼킨다.) 어쩌면 이제 유기농을 제일로 쳐주는 시대가 가고 무결점 인공합성물이 대안 식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후쿠시마 이전과 이후, 우리의 삶은 무의식 중에 많이 바뀌고 있다. 일단 황태는 먹지 못하는 게 확실하다.




<Orchestra FUKUSHIMA!> 

2011년 8월 15일 프로젝트 후쿠시마! 중에서 

photo : Hikaru Fujii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일어난 해 

일본의 노이즈 음악가 오토모 요시히데의 제안으로 

후쿠시마에 연고가 있는 음악가 시인 등이 모여 

축제를 개최했다. 후쿠시마를 직시하자는 의미에서 

열린 이 축제는 매년 8월 15일에 열리며 

전세계를 통해 반핵 운동가들이 모인다.




프롤로그가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한 가지 일반론을 보태야 한다. 후쿠시마 참극을 부른 문제를 따져 묻다 보면 원전 존재론으로 들어가게 된다. 태초에 석유가 있었다. 근대 산업문명 발전을 가능하게 한 동력도, 탄소가스를 증가시켜 지구 온난화를 불러일으킨 주범도 바로 이것이다. 당장 기름이 없다면 자동차와 기계가 멈추고 발전소가 멈추며 전력 공급이 중단되고 컴퓨터가 꺼진다. 심지어 현대의 농업은 모두 기계화, 자동화되어 있으니 농사도 짓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석유에 문제가 생긴다면 현대 문명의 발전은 고사하고 모든 물가가 제정신을 못 차릴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석유파동은 그런 점에서 ‘석유가 없다면?’이란 위기감을 고양시켰다. 석유 시대의 종언보다 더욱 무서운 경제적 혼란이 예견된 그 시점,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줄 구원투수로 홀연히 등장한 것이 원자력 발전이다. 높은 경제성과 안정적인 연료공급이 가능한 점, 그리고 탄소가스 배출의 걱정이 없다는 점 때문에 각광을 받았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원자력이 ‘대체’ 에너지일 뿐 청정에너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탄소가스 배출의 걱정이 없기 때문에 원자력이 청정하다는 주장은 미국의 TMI 원전 사고, 소련의 체르노빌이나 일본의 후쿠시마 사태 앞에서 확실히 무기력했다. 실제로 대형사고 이후 대규모 반핵 반원전 운동이 심화되었고 20세기 말까지 우리나라와 동유럽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원전 산업이 침체되었다. 그렇다면 인류의 장기적인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는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원자력에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이것이 근본적인 질문이다. 여기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문제점을 찾는다. 저명한 생태주의자 데렉 월(Derek Wall)은 오늘날의 생태 위기가 바로 경제체제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그 경제체제는 다름 아닌 자본주의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하는 모델이며 취득된 이윤을 더 많은 이윤 추구를 위해 재투자함으로써 유지되는 모델이다. 이윤은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에 실패하면 위기에 빠진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재투자에 실패했다면 필시 다른 기업에 의해 보복 당한다. 다른 기업들이 그와 같은 투자를 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물을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야노베 켄지(Yanobe Kenji) <Sun Child> 

2011 620×444×263cm FRP steel neon others 

KUAD ULTRA FACTORY 제작 *켄지는 체르노빌에 

다녀온 뒤(1997) <아톰수트>시리즈를 시작한다. 

모든 것이 파괴된 장소에서 삶을 지탱하고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담아 내고자 한 프로젝트들이다. 

<선 차일드>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새로운 상품을 계발하고 팔아야 하며 이를 위해 자본주의 체제는 가능한 모든 에너지 자원을 고갈한다. 화석 연료로부터 시작해 대체 에너지, 심지어 인간의 삶까지. 한편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이런 에너지 소비의 원칙을 교묘하게 감추기도 한다. 70년대 석유파동을 시작으로 제조업과 고임금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포디즘 모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자 강대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일어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경영합리화, 기업의 구조조정과 다국적화, 금융부문으로의 전환이다. 금융자본이 끊임없이 주변부 투자를 통해 초과이윤을 창출하는 것과 동시에 그 이윤의 일부를 계속해서 가난해지고 있는 대다수 비정규직 국민들의 기초복지비용으로 씀으로써 불만을 잠재우는 방식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존방식이다. 이런 논리에 의거해 강대국은 각종 정치 경제력을 동원해 새로운 시대의 식민지 건설에 앞장서고 있다. 이때 환경오염 물질을 내뱉는 제조 공장은 (줄어들기보다는) 개발도상국에 집중되는 경향을 띈다. 한편 제조업으로부터 해방된 강대국은 본사를 고스란히 자국에 유치한 채 제조 국가에 각종 국제법을 통한 규제(예를 들어 탄소배출권 같은)를 감행한다. 


메이드 인 차이나이지만 디자인드 바이 애플인 상품은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예속 체계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물건은 애플이 만드는데 황사 바람에 쓸려오는 오염물질에 대한 욕은 중국이 먹는다. ‘성장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자본주의의 기조는 세계화되며 오늘날 눈에 보이지 않게 더욱 막강해진 셈이다. 원자력은 어쩌면 성장에 대한 자본주의의 강박이 낳은 사생아라고 할 수 있다. 석유와 같은 화석 에너지의 고갈이 명확해진 시점, 혹은 그 에너지를 둘러싼 각종 환경 규제와 정치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같은 신자유주의적 약소국은 성장의 동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얻어진 동력이 결국 강대국의 이윤창출로 이어진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또 한편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원전이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부실 경영과 관리로 인해 발생한 사고라는 점에서 단지 도쿄전력 사장 개인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앞서 언급했던 내 두 가지 경험 - 등 굽은 물고기와 내 결혼자금의 조달 문제에 대한 고민 - 을 순식간에 엮어버린다. 




쌈지 농부가 주관한 서울 농부의 시장에서는 

매주 토·일요일 광화문광장 등 도심 곳곳에서 

전국의 농수특산물을 저렴하게 사고, 

농업에 대한 체험도 함께 할 수 있다.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광화문 광장, 

북서울꿈의숲, 보라매공원 등 도심 곳곳에서 개최됐다.




고용불안,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와 동해바다 수산물의 방사능 오염이 같은 문제에서 왔다는 뜻이다. 결국은 생태위기와 경제불안의 원인을 모두 자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위기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문제들이 중층적으로 얽혀서 복합적인 위기상황을 초래하고, 그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 말입니다. 세계적 금융파탄, 경제위기, 환경위기, 고용위기, 거기다가 정치적 혼란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그것들은 한마디로 ‘지속가능성의 위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열렸던 한신대 강연에서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이 했던 이 말은 오늘날의 총체적 세계 위기를 압축해서 설명한다. 이 지속가능성의 위기는 좁게는 환경문제이지만 넓게는 오늘날의 세계, 즉 자본주의 경제 성장 모델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원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던 나라의 노동자도 마냥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런 자연자원과 인적자원의 고갈은 많은 전문가들이 자본주의의 파국을 예감하게 하는 주요한 인자다. 문제는 체제를 전환시키는 정치적 힘이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다. 그렇다면 성장 없는 번영이 과연 가능할까? 


월은 환경을 보호하는 경제체제가 번영을 가져다주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을 수 있으며, 그러한 경제 체제는 다름 아닌 공유재(commons)와 사회적 공유(social sharing)의 형태에 기반을 둔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개인의 욕망과 투기를 부추기는 사유재산 제도를 넘어 경제의 공동 관리를 추구할 때 비로소 멸망으로 향하는 성장이라는 폭주기관차를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오늘날 여러 사회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환경운동은 물론이고 영속농법, 협력적 소비(collaborative consum ption: 이것이 궁금하다면 TED에서 레이첼 보츠먼의 강연을 찾아보라), 공동사용주택, 디지털 지식 공유지인 위키피디아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다. 생태위기와 자본주의를 구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시각화한 가장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로 독일 작가 디륵 플라이쉬만(Dirk Fle ischmann)의 <나의열대우림농장(myforest farm)>을 들 수 있다. 플레이시만은 자본주의 비즈니스 모델의 이윤 발생 과정을 미적으로 전유하여 가시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헬렌과 뉴턴 헤리슨

(Helen Mayer Harrison and Newton Harrison) 

<Peninsula Europe: The Force Majeure> 

2007 - 2008 Digital mapping, ink, graphite, oil on 

vinyl 2 maps: 80 1/2×92 1/2inches and 80×93 1/2inches  




예를 들어 “1998년 작업실에서 초콜릿바를 판매하는 일에서 출발한 사업은 6년뒤 태양광 발전 사업으로 전환됐고, 매 달 전기를 판매해 얻는 수익 50유로(한화약 8만 1000원)가 <나의열대우림농장>에 투자되고 있다.”(이 사실은 임근준의 평론에서 인용) <나의열대우림농장>은 ‘탄소배출권’이 사고 팔 수 있는 특별한 ‘상품’의 형태로 유통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된 작품으로, 황폐한 필리핀 임야에 산림탄소상쇄(carbon offset)가 가능한 임야를 조성하고 모든 과정을 다큐먼트해 인터넷을 통해 투명하게 공개한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탄소배출권의 획득인데, 사실은 탄소배출권의 거래에 대한 정당성 및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읽힌다. 한편 콜렉티브그룹 리슨투더시티가 해온 작업들은 생태위기를 초래하는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국내 모든 분야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생태위기와 관련해 행동주의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는 리슨투더시티는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오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4대강 사업은 대운하 사업을 전신으로 한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사례로 현재 많은 비판과 함께 사법적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리슨투더시티는 학술 세미나, 토론회, 출판, 신문과 방송, 전시 같은 미디어 등 공공의 영역에서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의 생태가 4대강 사업을 통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고발하고 비판해오고 있다. 이들은 “4대강의 생태 문제는 그 지역주민 뿐만 아니라 한국과 세계, 나아가 근본적인 존재 차원의 문제”이며 “오늘날의 문제를 가장 총체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생태문제가 발생하는 전국 곳곳을 누비는 리슨투더시티의 미술행동은 때때로 노동권 문제를 제기하는 또 다른 행동주의 미술인 파견미술팀과 함께 연대하여 문제의 다층적인 영역을 가시화하고 공론화하기도 한다. 김용익을 비롯하여 “공공미술삼거리”, “아트스페이스풀” 및 기타 개인 작가들로 구성된 “미술인영농단”의 접근은 권력을 부정하고 공동체적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아나키적이다. 대의민주주의에 한계를 느끼고 “직접적인 삶의 표현을 체제 밖에서 추구해야한다”는 의식 속에서 발족했다는 이 단체는 기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유기농법 농사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 밖에서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미술인영농단은 농사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다. 




<만들자! 농성정원>의 일환으로 성효숙의

<진혼>을 흉내내어 작업화와 화분으로 제작한 작업  




“일(농사)과 공부, 그리고 작품(활동),이 세 가지를 함께 추구하되 농사가 궁극적 의미에서 자립의 가장 근본이 되는 요소이며 우리의 몸과 땅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의식(儀式)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농사를 앞세우는 것이라고 김용익은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구성원은 정기적인 포럼과 워크숍등을 통하여 일과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미술인 생활창작협동조합을 설립할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용익의 블로그를 참고하라: http://blog.naver.com/profyongik). 이외에도 밀양송전탑과 강정해군기지 건설, 쌍용차해고 사건 등에 반대하며 행동주의적 미술을 전개하는 파견미술팀, 자본주의 유통과정을 전유하여 새로운 유통 체계를 만드는 ㈜쌈지농부의 “서울 농부의 시장”, 가능한 모든 것을 공유하면서 생활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혼자이면서 함께 사는 통의동 집”, 새로운 공공 생태계인 디지털 미디어 환경을 오픈소스기술을 활용한 공동 창작을 통해 공유해보는 워크샵 “만들자 연구실” 등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예술적 실험들이다. 


단, 여기에 전제 조건이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말처럼 발전된 자본주의가 이런 새로운 공유지마저 은밀하게 사유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럽게 되물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됐던 탄소배출권은 오히려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을 자본으로 승인하는 역할을 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reative commons: 저작권을 부분적으로 공유하자는 운동) 라이센스를 단 창작물은 결국 구글과 네이버 같은 포털 사이트에 의해 검색되고 사용되고 있다. 또 원래 히피와 홈리스, 가난한 예술가들이 저렴한 보금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던 뉴욕의 브루클린과 소호같은 곳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불리는 도시부촌화 현상으로 몸살을 앓았다. 예술가들이 작업실 겸 보금자리로 고쳐 썼던 폐건물이 ‘쿨한 스타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힙스터가 몰려들고 지대가 상승한 것이다. 또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아방가르드의 전략이 정치 전략적인 공공미술과 디자인의 모습으로 탈바꿈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제라도 자본에 의해 이윤창출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공유지의 이런 속성은 결국 공유지가 낭만의 장소만은 아님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제, 공통적인 것을 어떻게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지켜낼 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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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철학자,전원길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 디렉터,안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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