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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7, Oct 2014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임승천

2014.5.2 – 2014.7.27 성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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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천의 신형상조각을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임승천의 조각은 서사구조의 신형상조각이라고 할 만하다. 구본주의 조각들이 한국사회의 이면구조를 서사적이며 해학적으로 풀어낸 것과 유사하다. 특히 빼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각각 인물들에게 풍부한 서사를 투영시킴으로써 1980년대의 기념비적 리얼리즘 조형론을 삶의 현실태로 불러냄으로써 대중적 거리감을 좁혔던 구본주의 노력이 임승천에게 와서 보다 심화되고 성숙되었다는 판단이다. 임승천은 마치 영화 시나리오를 쓰듯이, 혹은 삶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트루기처럼 조각적 구성과 연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을 탄생시킴으로써 조

각이 가진 개체성의 한계를 넓게 확장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구본주가 보여주었던 놀라운 형상성의 면모를 또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올해 성곡미술관에서 보여 주었던 공간연출과 각각의 인물조각들은 심연의 내적 구조를 보여주는 탁월함마저 엿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구본주예술상으로 선정된 까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지금 여기의 한국사회를 날카롭게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판적 리얼리즘과 마술적 리얼리즘이 혼재한 그의 작업들에서 여전히 방향타를 상실한 채 부유하고 있는 우리사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작품을 세 가지 키워드로 깊게 읽어보고자 한다.



<Butterfly> 2014




서사구조의 신형상조각 시리즈  


임승천은 2007년 서울 모로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 <정지된 또는 부유하는>을 통해 ‘이야기(소설적 픽션)’ 서사를 가미한 새로운 형상조각(新形象彫刻)을 제시했다. 1980년대 김광진과 류인의 형상조각들이 개별적 서사성을 함축했고 그 뒤 구본주의 형상조각들이 서사의 장면성을 갖췄다면, 임승천은 더 나아가 전시 전체를 드라마트루기로 연출한 형상조각 작품을 보여준 것이다. 신의 창조물로서의 인체를 탐구하고 재현하는데 무게를 두었던 구상조각과 달리, 시대와 현실, 역사의 능동적 주체로서 억압·고난·저항·절망·분노·화해 등의 인간을 탐색한 형상조각은 1980년대의 신구상이었다. 심정수, 김광진, 류인, 구본주를 비롯한 리얼리즘 조각가들에서 형상조각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신형상조각은 리얼리즘 형상조각의 미학에 마술적 판타지를 뒤섞어 미학적 상상력과 조형적 형상실험, 현실비판의 미의식을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때때로 우화적이고 음울하며, 예지적이고 키치적이다. 신형상조각을 표현하는 작가들마다 주제어에 따른 미적 형상을 창조하기 때문에 그렇다. 임승천은 거기에 장편서사를 더했다. 


2007년의 전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편 판타지드라마의 조형적 모험이자 그 시작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전시를 그래서 ‘기함프로젝트(Flagship Project)’라고 명명해도 좋으리라. 이야기의 출발에서 끝까지 모든 것의 조형적 상상은 배를 중심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 <네 가지 언어>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최종회에 이르렀다. 예컨대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그의 신형상조각은 8년 동안 총 5회에 걸쳐 제작된 ‘단일 서사구조의 형상조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각 작업은 현재까지 그 유래를 찾기 힘들다. 물론 몇몇 신형상 조각가들에 의한 작품들에서 짙은 서사성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적 관점의 일관성에서 시도된 개별 편제의 주제전이었다.       




<Nocebo> 2014




드라마트루기(Drama turgy)의 신형상조각론 


신형상조각론의 드라마트루기는 말 그대로 신형상조각에 대한 극작법이며 극작술이라 할 수 있다. 연극과 희곡에서의 드라마트루기를 그대로 원용한 것이다. 임승천은 실제로 그의 신형상조각을 위해 시나리오를 먼저 구상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에 따른 조각적 연출을 다시 구상했다. 드라마에서의 극작법과 극작술을 임승천의 조각어법에 맞게 바꾸면 신형상조각 창작법과 신형상조각 공간연출법으로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이 때 창작법은 시나리오와 구체적 현실의 반영태인 형상조각까지를 동시에 아우르며, 연출법은 전시될 공간과 형상조각의 관계를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조각에서의 드라마트루기는 영화와 달리 전시공간에 따른 제약 때문에 시나리오와 조각, 공간의 선후를 두지 않고 종합적으로 검토된다. 특히 전시공간은 이미 확정적 추상공간이자 절대공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시나리오의 장면과 조각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임승천의 드라마트루기는 많은 부분에서 공간에 따른 장면서사 연출을 선행했다.


드라마트루기가 극작법과 극작술의 개념에서 작가 또는 연출가와 동등한 창작주체로 변화했듯이 임승천의 작업과정에서도 드라마트루기는 유사하게 등장한다. 대체로 그 스스로 작가이자 연출가이며 드라마트루기로 활동했지만, 초기에 창조적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로서 협업하고 지원했던 천성명과 윤돈휘, 그리고 필자는 그의 서사적 형상조각의 실험을 구조적으로 완성하고 심화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천성명이 서사의 지속적 가능성과 그에 따른 형상조각의 다양태를 근거리에서 긴장시켰다면 윤돈휘는 임승천의 상상력을 실제 시나리오로 구현해 낸 협업자였고, 필자는 서사와 조각과 공간의 통합적 상상력과 상징구조에 대한 비평적 크리틱 담화를 제공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모든 것은 감독의 몫이듯이 임승천에게 있어서도 어쨌든 그의 몫이어서 지금 그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감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수년 동안 그는 그의 작업을 심화시켰고 이야기의 끝에 이르렀다. <네 가지 언어>에 이른 그의 신형상조각은 현대 한국조각에서 하나의 경이로움처럼 느껴진다. 


   


<Castaway> 2014




공간연출의 상징과 의미들


<네 가지 언어>의 서사적 장면과 공간구성은 <실종(Missing)>, <노시보(Nocebo)>, <고리(Link)>, <순환(Circle)>으로 제시된 옴니버스 섹션구조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섹션주제는 8년 동안 이어진 이야기에서 발췌된(실제로는 전체이야기가 공개된 바 없다) 주제장면의 서사를 공개하면서 시작된다. 시나리오와 공간연출의 서두를 장식하는 <실종>의 경우 ‘유랑’을 표제로 part1(표류자)과 part2(꿈꾸는 물고기)가 따라붙는 형식이다. <실종>이 네 개의 옴니버스를 구성하는 첫 번째 개념어라면 ‘유랑’은 그것의 주제어이고 ‘표류자’와 ‘꿈꾸는 물고기’는 이야기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형상조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가령 ‘유랑’의 서사는 이렇게 적혔다. “이 이야기는 ‘소외된 이들의 남태평양 표류기’이자 가상의 이야기인 ‘Dream ship3’의 마지막 생존자이며, 그 다음 이야기인 ‘북위 66도 33분-잠들지 않는 땅’의 제3관찰자로 등장했던 ‘낙타’라는 표류자의 여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자, 그렇다면 성곡미술관은 이제 임승천의 작품들이 전시되는 전시공간이면서 동시에 각각의 형상조각들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미학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흰 좌대위에 걸터앉은 ‘낙타’라는 <표류자>의 공간은 그러므로 검푸른 바다위에 떠 위는 폐허의 Dream ship이다. 서사에 따르면 그는 이 배의 마지막 생존자다. 목 뒷덜미의 척추선을 따라 깊게 베인 듯한 상처는 흰 날개가 있던 자리고. <꿈꾸는 물고기>는 이 표류자의 날개를 먹고 자란 물고기다. 그래서 물고기의 비늘은 날개깃처럼 펄럭이며 거친 쇳소리를 낸다. 왜 임승천은 이 마지막 생존자의 이름에 ‘낙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게다가 상실의 흰 날개, 세 개의 눈, 날개를 먹은 물고기가 상징하는 바는 ?


임승천의 서사와 신형상조각들의 형상들은 우리사회의 안개에 휩싸인 미래적 징후들을 예지한다. 라오서(老舍. 1899~1966)의 소설 『낙타샹즈(駱駝祥子)』에서 ‘낙타’라는 인물은 그늘진 초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과 너무도 많이 닮아있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임승천의 ‘낙타’와 라오서의 ‘낙타’를 동일시하며 떠올렸다. 문학평론가 장성규는 그의 평론집 『사막에서 리얼리즘』(2011)에서 바로 지금의 후기자본주의를 ‘사막’에 비유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사막을 가로질러 건너가기 위한 문학적 예술론으로 주저 없이 ‘리얼리즘’을 꼽았다. 이러한 장성규의 문학비평이 묘파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과 그 리얼리즘의 형체를 조각적으로 재현하는 곳에 나는 임승천의 ‘낙타’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막의 낙타에게 있어서 사막은 자신의 혹을 태워가며 견뎌야 하는 생사의 현실이다. 또한 비열하기 짝이 없는 투쟁의 장소이자 멈추기를 허락하지 않는 무한 걷기의 현기증이다. 이런 낙타의 삶에 빗대어서 임승천은 후기자본주의의 사막을 역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Circle> 2014

                 



* <Link>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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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종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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