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r | Art in P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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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 Made in Korea |
애초 로미니가 말했던 기간의 2배가 넘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 다행히 입이 아닌 손으로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화가의 길로 들어선 지 60년, 어느새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자유분방하고 힘이 넘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마이클 테일러는 전시마다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하였고, 각종 비엔날레에 호주를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하여 호주의 현대미술을 홍보했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젊은 화가들의 멘토가 되어주었다. 이런 그의 미술 인생을 조망하는 회고전 <Michael Taylor: A Survey 1963-2016>이 캔버라 뮤지엄 앤드 갤러리(Canberra Museum and Gallery)에서 열린다. 호주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의 회화와 드로잉 중에서 주요 작품만을 모은 이번 전시는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그가 그린 호주의 풍경을 시기별로 보여준다. 반세기가 넘도록 그림만 그려온 한 화가의 행적을 되돌아보는 이 전시는 한편으로는 호주 내에서 추상표현주의라는 양식과 풍경화라는 장르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River> 1966 Oil on canvas
122×92cm Harris Hobbs Collection Canberra
오늘날 마이클 테일러는 호주를 대표하는 표현주의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회고전을 기획한 큐레이터 데보라 클락(Deborah Clark)에 따르면, 테일러는 30세가 되던 해에 이미 자신만의 표현주의 스타일을 형성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1950년대 이후 유행처럼 번진 새로운 미술 사조 즉,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으로 미술에서는 추상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경향이 전 세계적으로 지속하였고 호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주의 미술사학자 버나드 스미스(Bernard Smith)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술학도였던 마이클 테일러, 존 올슨(John Olsen), 프레드 윌리엄스(Fred Williams) 등이 호주의 새로운 미술을 이끌었다고 언급했다. 전쟁을 경험한 이들이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에 영향을 받아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들보다 앞서 활동하던 표현주의 작가 이안 페어웨더(Ian Fairweather)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Down the River>(1963), <Caryatid>(1963), <River>(1966) 등 테일러의 초기 작품을 살펴보면 페어웨더의 방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회고전 제목이 암시하듯 테일러가 포착한 풍경은 호주의 지형과 환경의 변화를 아우르고 있다. 큐레이터 앤드루 세이어스(Andrew Sayers)는 이보다 더 다양하게 호주 풍경을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풍경으로서 호주의 정체성을 드러낸 테일러의 작업을 높이 평가했다.
<Monaro Landscape> 1973 Oil and enamel
on canvas 228.5×173.5cm NGA purchased 1973
테일러의 작업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환경적인 요소와 관계 깊다. 1933년, 시드니에서 태어난 마이클 테일러는 레인 코브 강(Lane Cove River)과 파라마타 강(Parramatta River) 사이에 위치한 울위치에서 성장했다. 그는 일찍부터 물놀이를 즐기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땅에서 보다 물속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에게 강과 바다는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맨살에 닿았던 물의 온도, 하늘만큼 파랗던 바다의 색깔, 헤엄을 치고 나와 밟았던 모래밭의 감촉까지 테일러가 소중하게 기억하던 그 모든 것들은 훗날 그의 작업에 중요한 영감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작품에는 바닷가 풍경과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테일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시드니 시 의회에 속한 데생 화가이자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일요화가였다. 집안에는 늘 그림 도구가 즐비했기에 테일러도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라 그림을 그리곤 했다. 테일러의 부모는 화가가 되고 싶다는 그의 결심을 존중해주었다. 테일러는 시드니의 기술전문학교(East Sydney Technical College)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아내 로미니를 만났다. 당시 그녀는 도예를 전공하고 있었으나 결혼 후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며 테일러의 작업을 도왔다. 사람들은 로미니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테일러가 화가로서 성공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19세기 호주의 풍경화가들이 유럽에 다녀온 후 자국에 새로운 미술을 소개하면서 호주 화가들에게 유럽 여행은 진지한 미술가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로 여겨졌다. 테일러 역시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싶어 했다. 다행히 호주 정부의 지원으로 그는 1960년부터 3년간 영국과 스페인에서 체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Flash Flood> 1997 Oil on canvas
122×167.5cm CMAG purchased 1998
유럽에서의 경험은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그는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와 피카소(Pablo Picasso) 그리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와 고야(Francisco Goya)의 걸작들을 잊지 못했는데, 특히 터너의 <Sunrise with Sea Monsters>(1845)는 오랫동안 테일러의 뇌리에 남아 <The Trawl>(1985)를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럽에서 돌아온 이후 테일러는 모나로 평원, 맹그로브 습지, 쿠마 언덕 등 시드니 남동부 지역과 캔버라의 풍경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그는 언제나 캔버스라는 평면 안에서 추상과 재현 사이를 오가는 실험을 시도했다. 결과는 원근감을 잃고 평면화된 풍경, 형상성을 초월하고자 하는 풍경으로 완성되었다. 그의 작품은 뚜렷한 형상을 거부하는 대신 리드미컬한 레이어를 통해 역동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그로 인해 정지한 풍경이 아닌 움직이는 풍경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물감의 두꺼운 층위, 거칠게 진동하는 붓의 터치, 화면에 흩뿌려진 시각적인 어휘들…. 그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격정적인 풍경을 보면서 ‘그리기’라는 행위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추구했던 회화의 진실은 바로 그 솔직한 행위 안에 모두 들어 있을 것이다. 최근 테일러의 작업은 다양한 색감과 경쾌한 리듬감으로 더욱 다채로워졌으며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호주의 초상을 기록해 온 그의 여정에서 마지막을 상상하기란 힘들어 보인다. 다시금 1974년의 인터뷰 때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현재의 그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자못 궁금해진다.
글쓴이 김남은은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에서 「장-미셸 오토니엘의 작품연구」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9년간 신한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캔버라에 거주하면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호주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